230526 설교
Notes
Transcript
주님이 원하시는 말
주님이 원하시는 말
여러분 오늘도 함께 이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 서로를 향해 인사하면서 시작해볼까요? 이렇게 인사해볼게요. 한주동안 수고했어!
네. 우리가 인사한 것처럼, 한주간 여러분들의 삶을 살아내시느라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것들, 또한 상했던 마음들이 있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함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치유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랜만에 또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되었는데요, 어떤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을까 하다가 최근에 우리 체육대회 준비팀에서 잠언을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잠언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누면 너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분량인 12장 말씀을 들고 왔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잠언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처음이에요. 제 설교를 자주 들으시는 하늘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저는 주로 강해 설교라고 하죠, 말씀 하나하나를 가지고서 풀어가면서 설교를 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있는 말씀들을 좋아합니다.
신학교에서 이걸 내러티브 설교라고 하는데요, 이야기의 흐름을 타고 가면서 그 안에서 주시는 말씀의 포인트들을 잡아서 함께 나누는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 준비하면서 잠언을 보니까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스토리식의 전개가 되지가 않고, 오히려 여러가지 말들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그러한 말씀이 바로 잠언의 말씀이기 때문에 평소처럼 말씀을 보기가 쉽지는 않더라구요.
그래서 더욱 세심히 말씀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러면 분명히 저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때에 맞는 말씀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분들에게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한 포인트가 바로 말에 대한 것이었어요.
사실 이 말이라는 것은 매우 가벼운듯 하면서도 매우 무거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말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말하는 것이 듣는 이에게는 매우 무겁게 다가올 수도 있구요,
반대로 정말 어렵게 한 말이 다른 이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죠.
그렇기에 옛날부터 이 말에 관련된 여러가지 우화들이 전해집니다. 황희 정승의 검정소와 누렁소 이야기와 같은 우리나라의 우화들도 있구요, 제가 인상깊게 들었던 우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는데 그 공주가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 공주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사자의 고기가 필요했죠.
왕은 자신의 딸을 낫게 하기 위해서 사자의 고기를 잡아오는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선포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용사가 그 사자를 잡기 위해 떠나고 실제로 열심히 싸워 그 사자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그 용사의 신체부위들이 서로의 논공행상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팔이 이야기하죠. ‘내가 칼을 휘둘러서 사자를 잡았으니 내 공이 제일 크다’
발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사자 앞까지 데려왔기에 내 공이 크다’
눈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있었으니까 너희가 사자를 보고 올 수 있고 공격을 할 수 있었으니 내 공이 크다’
이런 식으로 여러 신체부위들이 각자의 공을 이야기하죠.
그 때 혀가 나와서 이야기합니다. ‘내 공도 크다’라고 말이죠.
그러자 다른 신체부위들이 무시를 합니다. ‘너는 그냥 근육밖에 없는 아주 작은 부위면서 감히 어딜 같은 선상에 끼려고 하느냐’ ‘넌 그냥 가만히 있어라’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이죠.
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좋지 않은 표정을 하면서 들어갑니다.
그리고 용사는 왕 앞으로 도착해서 사자의 고기를 보여줍니다.
그러자 왕은 기뻐하며 말하죠. ‘오 그대가 가져온 이 고기가 정녕 사자의 고기가 맞는가?’
그런데 거기서 용사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니요? 이거 개고긴데요?’ 혀가 행동에 나선 것이죠.
그러자 왕이 화가 나서 말합니다. ‘아니 어디 감히 개고기를 가지고와서 사자의 고기로 속이는 것이냐?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혀가 한번 더 행동에 나섭니다. ‘네 장난하려고 온거에요’
그러자 아까 혀를 무시했던 여러 신체기관들이 혀에게 매달립니다. ‘혀야 왜그러냐 이러다 우리 다 죽게 생겼다’ ‘미안하다 사과할테니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
결국 혀는 다시 본래대로 말을 합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정말 사자의 고기가 맞습니다. 이 고기를 먹이면 공주가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용사는 죽지 않고 살아서 공주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화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보면 이 말 한마디라는 것이 가진 엄청난 힘을 볼 수가 있겠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도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가 어떻게 다른 언어생활을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다양하게 여러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한 포인트를 세 가지를 잡아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첫번째는, 경청하고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지난 교사 세미나를 다녀오신 분들이면 익숙한 이야기일 텐데요, 거기서 공동체를 잘 이끌기 위해서 잘 들어주고, 적절하게 절제하는 것이 좋다라고 목사님께서 이야기를 해주셨었죠.
오늘의 말씀에서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보면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잘 듣는다고 말하죠.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하더라도 그것을 진지하게 잘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6절에서도 미련한 자들은 즉각적인 분노를 나타내지만, 슬기로운 자는 자신의 그 감정을 절제하고 참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23절에서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춘다고 이야기하죠. 이 말씀의 의미는 나 혼자만 지식을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있더라도 그것을 막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절제하면서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언어 생활은 자신의 말을 많이하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잘 들어주고, 자신의 말을 아끼며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특히 공동체 생활에서 이러한 모습은 너무나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요즘의 사회는 남의 것을 잘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냐, 그만큼의 시간을 쏟는 것을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만큼 오히려 자신이 기뻐하는 것을 하고자 하죠.
하지만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오히려 더욱 시기, 질투, 분쟁이 넘처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다른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내세워버리는 모습이 나타나버린 것이죠.
요즈음 들어 청년들이 정치권에 바라는 것이 뭐냐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소통을 꼽습니다. 정치권에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어쩌면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통만 있다고 하더라도 꽤나 많은 사회의 문제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소통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너가 빨리 소통해! 하는 모습보다는 내가 먼저 평소의 삶에서 남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너 왜 그렇게 살아!’라고 타박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주고 열린 자세로 우리가 먼저 소통하는 모습들을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 될 수 있겠죠.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함께 서로의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중요한 지혜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제 앞으로 체육대회를 시작으로 캠프와 선교 등 여러모로 함께해야 할 일들이 있을거에요. 그 순간마다 이 지혜를 기억하면서 경청과 절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두번째 포인트입니다. 바로 진리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들이니다.
17절에서도 진리를 말할 때 의가 나타나며, 18절에서도 지혜로운 자의 혀는 좋은 것을 말하기에 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또한 20절에서도 화평과 같은 선한 것을 의논하는 이에게 희락이 있음을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은 이러한 선한 것들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고 이해하고 서로를 위하는 이야기들을 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나쁨을 이야기하고 남을 깎아내리고 무너뜨리는 이야기들을 자주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공간들, 대학생은 에브리타임, 직장인들은 블라인드죠. 한번 보시면 어떤 이야기들이 돌아다니고 있는지 아마 다들 잘 아실겁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있다보니, 많은 청년들은 앞으로의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절망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절망을 만들어낸 범인을 찾고자 하죠.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딱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미련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당장 분노를 나타내고 남을 속이고 찌르는 말들만을 하는 것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지 않으시고, 당장 우리의 삶에도 전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앞으로의 삶이 절망만 가득하다는데, 누가 미래를 그리고, 꿈을 찾고 하겠어요. 당장 지금 어떻게든 잘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겠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코인과 같은 즉각적인 것들을 얻고자 하는 요즘의 세태가 이러한 절망을 이야기하는 사회의 모습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실제 나타나는 수치들이나 상황들이 그러한 좋지 않은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러면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만큼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우리는 수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불가능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그의 계획을 여러번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분명 우리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고, 밝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희망이 없고 절망만이 가득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그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믿는 공동체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당장의 삶의 언어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바르지 못한 것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말씀의 지혜를 함께 이야기하고, 주님이 주시는 희망과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우리 공동체의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힘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 외부의 세상에게까지도 힘을 주는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포인트입니다. 바로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19절과 21절을 통해 의인에게는, 진실한 사람에게는 재앙이 임하지 않고 영원함만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당장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습을 보면 어때요? 오히려 악인이 잘되고 거짓이 오래도록 있는 것처럼만 보입니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의심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요, 우리만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들조차 하나님께 이 고민을 놓고 묻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후에 있을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공의를 세우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죠.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에서는 마치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일하심을 통해 우리 앞에 그의 공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 모습은 바로 끝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으로 이야기하십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그날까지는 세상에게 많은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공의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끝끝내 이 땅 가운데 임하실 것이고, 우리에게 심판을 통해 공의를 보이시고, 하나님 나라를 통해 사랑을 보이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으로는 어때요? 그때가 언제 올 줄 알고 계속 기다리냐라는 생각이 들거에요.
그렇습니다. 당장 하루도 살기 힘든데, 어떻게 주님의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요.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제가 좋아하고 자주 이야기하는 신학용어 중에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하나인데요, 이것의 의미는 주님의 때까지 성도는 견디고 인내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우리가 인내할 수 있도록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함께하시며 여러분들의 고난 중에서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지난 교사 세미나때 오셨던 분들은 우리 암송 구절 했던거 기억하시죠? 주님께서는 무거운 우리 짐을 대신 지시고 그의 가벼운 짐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현실의 삶을 살아갈 때에도 그러한 희망을 가지고, 항상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언어생활을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진리를 말하고,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경청하는 이러한 모습들을 우리의 삶에서 보이며 나아간다면,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일하셔서, 우리 주변의 영혼들도 변화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제 힘든 한주를 마무리했죠? 그치만 우리에게는 또다른 힘든 한주가 올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 오늘 이 지혜의 말씀을 통해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말들을 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시간 함께 찬양하고 기도할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놓고
내 삶의 모습을 반성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고
공동체를 놓고
체육대회를 놓고
재학생들을 놓고
하디데오 공동체와 앞으로의 사역을 놓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