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7 양청] 17-19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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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타락의 결과에 대해 공부를 한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부분은 인간론이다. 다음주까지 하면 인간론도 끝나게 된다. 인간론을 공부할 때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고 타락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이런 상태에 놓였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17문. 그 타락은 인류를 어떤 상태로 몰아갔습니까?
답. 그 타락은 인류를 죄와 비참의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18문. 사람이 타락해 들어간 상태의 죄악됨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답. 사람이 타락해 들어간 상태의 죄악됨은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 원의의 상실, 그의 전속성의 부패에 있는데 보통 원죄라고 불리고, 이 원죄로부터 나오는 모든 실제의 범죄들에 있습니다.
19문. 사람이 타락해 들어간 상태의 비참함은 무엇입니까?
답. 자신들의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린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고, 그래서 이생에서 모든 비참함과 죽음 자체, 그리고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2번을 보라. 여러분 혹시 이런 상상해 본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죄가 없던 시절 인간이 에덴에서 누렸던 것들 중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자유, 풍족, 평안, 교제, 기쁨, 사실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자유를 잃어버렸으니까 인간은 반쪽짜리 자유 밖에 모른다. 평안을 잃어버렸으니 불안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풍족이 없으니 늘 부족의 심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잃어버렸다는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기쁨도 없고, 교제도 망가져서 서로가 이기적인 관계속에서 관계를 맺는다. 이런 측면에서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모든 선한 것을 다 잃어버렸다. 죄라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우리의 평생에 가장 싫어하는 것이 죄가 되어야만 한다. 죄 때문에 모든 관계가 망가졌고, 죄 때문에 우리가 이모양이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지으시고 너무나도 좋았던 것들이 죄 때문에 너무나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화되었다. 죄가 우리 가운데 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부터 누리는 모든 은혜들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다.
타락의 결과를 보라. 죄와 비참의 상태라고 말한다. 17문의 대답이기도 한데, 이를 죄악됨과 비참함으로 나눠서 생각해보자. 죄를 죄악됨이라고 표현했는데, 죄악됨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첫째, 아담의 죄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엇인가? 원의의 상실이다. 우리가 원죄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하지만 원의는 조금 생소할 수 있겠다. 아담에게는 원의, 하나님이 주셨던 원래의 의로움이 있었다. 그러나 죄로 이 원의가 깨어졌다. 세번째, 전 속성의 부패이다.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패해진 것인데, 우리에게서 그 어떤 선도 흘러나올 수 있는 구석이 없을 정도로 모두 부패했다는 것이다. 이게 원죄이다. 마지막으로 이 원죄를 우리가 가졌기 때문에 나 역시도 실제의 범죄로 이어진다. 원죄로부터 부패한 본성 때문에 이 모든 죄악들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원죄 때문에 지옥가는 것 뿐만이 아니라, 죄를 지으니까 영원 형벌을 받는 것이다.
죄와 비참의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비참함에 대해 생각해보자. 비참함의 상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상태이다. 세상에서 비참함과 죽음을 경험하는 상태.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는 상태. 다시 말해서 죄 때문에 그 모든 복들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4번에서는 죄의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다시 말해서 죄악됨의 상태를 더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것인데, 이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죄책과 죄의 오염.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상태는 죄책이 있고, 오염(부패)이 있다. 이 두가지가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죄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고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부패한 본성이 아직 남아있다. 이것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오염들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후반부에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이 이것을 의미한다. 주님게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것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건지시는 것이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죄의 결과로 죄책과 죄의 부패를 뒤집어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번에서는 전적 타락이라는 말을 쓴다. 전 속성이 부패했다는 것이다. 모든 속성들이 부패해서 죄를 안짓는 것이 불가능하고, 온전한 거룩함이 어디에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상태이다. B를 보면 아담의 후손은 절대적 순수한 의미의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것,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어떤 존재가 되었나?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존재가 되었다 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는 전혀 내 안에서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C를 보라. 아담은 죄를 지어 죄인이지만, 아담의 후손은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 이것이 우리의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아담은 죄인이 아니었음에도 죄를 범해서 죄인이 되었다면, 아담의 후손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D. 죄인의 부패한 속성은 교육, 설득, 감시, 억압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반 학문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많은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인데, 교육을 통해 인간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설득을 통해 사람을 바꿀 수 있고, 감시와 억압을 통해 사람을 얼마든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절대로 부패한 인간의 속성은 이런 것들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을 잘 받으면 똑똑한 죄인이 된다. 이게 인간이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교육이나 심리학이나 이런 것들로 희망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훈육도 해보고, 설득도 해보고, 교육도 해보고, 사탕으로 구슬려 보려고도 하지만 본성이 바뀌지가 않는다. 이것이 타락의 결과이다.
6번을 보라. 이는 19문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제가 단절"됨을 이야기한다.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을 때, 가장 중요한 영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는데, 성경은 영생을 뭐라고 정의하는가?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면 영생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더불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교제가 상실되었다는 것은 더이상 영생이 없는 것이다.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인 교제가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눈이 밝아졌다고 한다. 눈이 밝아져서 똑똑해지기만 하면 괜찮은데, 눈이 밝아져서 수치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 처음 찾아온 것이다. 부끄러운 것이다. 죄가 들어오자 그런 눈이 밝아진 것이다. C를 보라. 아담은 900년을 넘게 살다가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당장 죽게 하지 않으시고 그 죽음을 왜 연기하셨을까?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시작하시기 위해서였다.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다. 창3:15 를 읽어보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을 가리켜 원 복음이라고 한다. 창세기 말씀 중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인데,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신 말씀일까? 뱀이다. 뱀에게 내가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싸움은 여자의 후손이 너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너는 고작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뿐이다.
여자의 후손은 누굴 가리키는가? 예수님이다. 그런데 하와는 자기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소깅 언제 성취될지 모르니까. 그래서 가인을 낳았을 때,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여기서 하와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했다고 하는데, 우리 말로 표현하면 “아들이다!!!!” 라는 것이다. 이 아들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어버린 원수, 뱀의 머리를 밟아줄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아들은 그 다음에 태어난 동생을 죽여버렸다. 죄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무섭다. 인간의 죄성을 유전적으로 타고 나게 만듦으로서 결국은 하와와 아담이 착각한 것은 이 죽음이 그들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살면서 경험을 한다.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웠던 제일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 어느새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해버렸다. 그러기에 그 비참함을 아담과 하와보다 더 잘 알만한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러나 그러한 비참함 속에서도 그들이 살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창3:15 의 이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태어날 아들을 통해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는 구원의 약속이다.
7번을 보라.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에 있다. 사람 사이의 교제의 단절과 소외가 일어난다. 창3:12 를 보라.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렇게 사랑이 가득했던 이 두 사람이 죄를 범하고 죄를 책망하시자 아담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여자 때문에 내가 넘어졌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너무나 많은 싸움이 남탓하는 일 때문에 시작되지 않는가? 집안의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탓한다. “이게 다 너때문이야!”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죄가 들어오자마자 생긴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부부관계가 상했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하나님이 16절에 설명까지 해 주신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아내가 남편을 원한다. 남편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 그런데 남편은 사랑을 해 주면 되는데, 남편은 너를 다스리려 하지 사랑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부부관계가 행복하질 않는다.
또 땅의 저주와 고통스러운 출산과 노동이 주어졌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고통스러운 출산에 대해 말한다. 만일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녀를 낳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께서 창조하실 때 너희가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다. 그러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기 낳는 것이 쉬운데 누가 이를 거부하겠는가? 그 과정과 결과까지 다 기쁘고 좋아야 하는데, 죄로 인해 고통스러운 과정이 생겼다. 이 뿐 아니라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전에는 노동이 없었나? 있었다. 하나님이 동산을 돌보라 하셨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를 보면 “예배하다" 라는 말과 같은 동사이다. 그러니까 죄를 짓기 전에는 내가 땅을 파는 것도 예배였다. 내가 거름을 주는 것도, 과실에 물을 주는 것도 예배의 행위였다. 그러나 죄를 짓고난 이후에는 노동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왜 그러한가?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땅이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다 했다. 사람만 타락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창조의 머리이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하자 자연까지 타락했다. 땅이 타락해서 더이상 정직하지 않는다. 수많은 이름모를 잡초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좋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걸작품들이다. 보기에도 안 예쁘고, 도무지 쓸모가 없어보이는 잡초와 같은 것들이 땅의 저주를 받음과 동시에 인간과의 관계가 망가졌고 그것들이 역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이상 인간과 친화적이지 않다. 이런 모든 문제들이 진노와 저주라고 말씀한다.
8번을 보라. 19문의 세번째 내용이다. 인생의 비참과 죽음과 지옥이다. 이생에서 모든 비참함과 죽음 자체 그리고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 했다. 이는 추방과 관계가 있다.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쫓겨났다. 쫓겨난 인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동산에서 자신들이 손수 동산을 만들며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지어주신 집에서 살앗는데 이제는 내가 내 집을 지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파주셨던 달콤한 시냇물을 마셔왔는데, 이제는 내가 내 손으로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해야만 한다. 이 변화는 어마어마하다. 이런 인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 살인이라고 하는 초유의 사태가 등장한다. 폭력, 두려움, 살인, 억압 등이 창세기 4장의 내용이다. 결국 여기서 인간의 관점은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주님이 기도를 이렇게 하라 가르쳐 주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구하기 보다 “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내 힘을 기르고, 내가 남을 죽이고 넘어뜨림으로서 내가 여자들을 더 많이 거느림으로서, 내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과시하는 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기 왕국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창세기 6장의 이야기를 보면 노아시대의 홍수를 보게 된다. 노아 시대 홍수심판을 불러온 범죄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눈에 보기 좋은대로 선택해서 결혼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손들에게 경건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건을 유지하도록 자녀를 낳고 가정을 세울 것을 요구하셨다. 그런데 경건과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관심이 없다. 그냥 내가 보기에 좋을대로 취하고,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원하고 얻는다. 그런 식의 결혼들을 통해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내 뜻을 이루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생이다.
이어서 창11 장을 보면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가? 어떤 동기에서 그들이 이 탑을 세웠는가? 창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인간이 자기 이름에 집착을 하는 것, 이것이 타락한 인간이 추구하는 모습이다. 유명한 산에 등산가면 큰 돌마다 왜들 그렇게 자기 이름들을 새겨넣는지 모르겠다. 누구랑 누구랑 하트를 그려넣고 말이다. 해외 유명 관광지를 가면 조각상이나 유적지 벽에 이름을 써둔 것은 죄다 한국사람이다. 누구야 사랑해! 이런 말들로 도배가 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들이 어떻게든 자기 이름을 남기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한다. 하나님의 이름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하라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든 말든 관심이 없고 내 자존심과 내 이름만을 위해 산다는 것이다. 이런 삶의 태도들, 내 나라가 임하고 내 뜻이 이루어지고 내 이름을 창대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 타락한 인생이 추구하는 가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이런 가치와 얼마나 싸우는 싸움을 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은 믿음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다. 아브람은 갈대아인의 우르 지역에 있었다. 갈대아 우르는 지금의 이라크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내야 할 이유가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다.
창1-11 장까지가 성경 전체의 서론이라 할 수 있다.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창12 장부터 계5 까지 본론이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무엇부터 시작하는가? 아브람을 부르시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창3 장에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겠다는 약속이, 역사 속에서 아브람을 불러내는 것을 통해서, 그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그리고 진정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신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본론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실행이 어떻게 실행되느냐?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해보라. 이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한 말씀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겠다? 이게 무슨 뜻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내셨다.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아, 너 이제 똑바로 해라! 죄 짓지 말고! 네 조상 아담처럼 그렇게 하지 말고! 이게 아니라, 창12:1-3 은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해 주마,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이게 복음이라는 것이다. 명령이 아니라 약속. 그 약속은 무엇인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겠다. 세상에 이런 빽이 어딨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이런 보장이다. 이 말씀의 의미가 뭔가? “너 원수 갚지 마, 왜 니가 원수를 갚아? 내가 갚아줄게!”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인도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방금 읽은 3절에,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는데,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직접 주시지만 모든 족속들에게 복 주시는 것은 누구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땅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고 아담 때문에 관계가 망가졌고 아담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브라함을 통해 타락한 인생을 땅바닥으로 추락한 인생을 회복하시길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지만 그들은 약속을 가지고 살았던 자들이다. 히11:9-10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실 땅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넘어가서 보면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약속을 못받았다는 것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못 봤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다.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실 진짜가 있다느 ㄴ것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 히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의이다. 소망 가운데 본향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이다. 이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이것이 바로 1절에서 말하는 믿음,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는 것들이 아직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손에 이미 잡은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믿음이! 히11:15-16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작해서 이 구원의 이야기를 펼쳐가시는데,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내가 죄와 비참함 가운데 살아가고 있고, 자유, 평안, 교제, 풍족 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데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완벽하게 이루심으로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누릴 수 있도록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아직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그것들을 다 취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맛보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 예배를 통해. 맛보는 것은 절대로 배부르지 않는다. 맛보기에 더 먹고 싶고 맛보기에 진짜를 먹고 싶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 때문에 그 나라를 더욱 소망하게 된다.
결론이다. 첫째, 죄의 비참함을 우리는 개인적으로 경험해야만 하는 것인가? 경험해야만 아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아담의 이야기로 죄의 이야기를 가르치길 끝내지 않는다. 아담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왕들의 이야기, 평민들의 이야기 속에서 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반복해서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면 성경을 우리가 보면서 죄가 인생을 얼마나 비참함 가운데 몰아가는가를 본다. 모든 성경의 지면에서 우리는 이것을 발견한다. 출20 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우리의 자녀들이나, 신앙이 어린 초신자들이나, 교회학교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만 죄가 어떤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잘 살면서 영적 손익계산을 제대로 하고 사나 하는 부분이다. 가계부를 쓰는 친구들이 혹 있는가? 내가 뭔가를 지출하면 꼼곰하게 체크를 한다. 그래서 카드사에 줘야 할 부분을 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으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우리는 안다. 성경이 가르쳐주니까. 그런데도 죄를 범한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인생의 영적 장부에서 내가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계산을 해야 한다. 이 죄를 범치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런지도 계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면 우리가 이런 면에서 굉장히 약해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세상 적으로 손익계산이 빠르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계산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영적 손익계산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죄의 파급력을 생각하면서 어떤 선택이 내 영혼이 잘되는 길인지를 계산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영적 손익계산을 하는 사람은 손쉽게 죄악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