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고린도후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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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3:13(신약 301쪽)
설교제목: 신약성경 고린도후서에 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오랜만에 성경 각 권에 관한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고린도후서의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제가 처음엔 잘 몰랐는데, 고린도후서의 내용을 공부하면서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이 굉장히 의미심장한 것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좀 뒤에 하도록 하고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의 이야기를 나누고 또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신약성경 고린도전후서가 기록된 배경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약성경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 그리스에 있는 한 도시이고 성경에서는 아가야로 불리는 땅의 한 도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통해 이곳에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고린도전서와 후서 이렇게 두 권으로된 편지이지만 실제로는 고린도전후서가 쓰여지기까져 총 다섯 통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차례대로 이 편지가 쓰여지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맨 처음 고린도교회에 사도 바울이 보낸 첫 번째 편지는 현재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5장 9절을 통해 앞서 보낸 편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편지가 고린도 교회에 어떤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탐욕스러운 자, 사악한 자’와 사귀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부정적으로 작용해서 이른바 파가 갈라집니다. 예를 들면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나눠진 것이지요. 그 외에도 고린도 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시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이고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번째 편지 곧 고린도전서를 디모데를 통해 고린도교회에 전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두 번째 편지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여전히 고린도교회는 혼란스럽고 시끄러웠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직접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도리어 사도 바울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자신을 맹비난하는 대적자에 관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낙담한 사도 바울이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떠난 뒤에 다시 세 번째 편지를 이번엔 디도를 통해 전하게 됩니다. 이 세 번째 편지 역시 오늘날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2장 4절에 보면 바울이 눈물의 편지 또는 고린도후서 7장 8절에서는 근심케한 편지를 얘기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세 번째 편지가 효과를 발휘하고 고린도 교회가 다시 안정을 찾게 됩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네 번째 편지를 쓰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고린도후서 1장에서 9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쓴 다섯 번째 편지가 10장에서 13장에 해당하는 내용인데 이 네 번째와 다섯 번째 편지에 관한 신학자들의 이야기가 분분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1장에서 9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먼저 썼다는 신학자도 있고 10장에서 13장에 내용을 먼저 썼다는 신학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고린도후서는 1장에서 9장의 내용과 10장에서 13장의 내용이 나눠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 쓴 내용을 살펴보면 주로 자기를 변호하는 내용을 쓰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를 혼란케 만들었던 이들로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를 얘기하는데, 이들은 사도 바울에게서 여러 문제를 삼고 그것을 빌미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사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도 아니고 과거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한 전력도 있으니까요. 또 그는 자비량 선교를 하였는데 고린도 교회에서 후원을 받지 않는 것은 그가 고린도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 외에도 외모에서부터 언변이 뛰어나지 못한 것과 여행 일정을 바꾼 것에 관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거나 성도들을 방치해뒀다는 식의 비난을 받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디도를 통해 보냈던 세 번째 편지가 고린도 교회를 안정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씌여진 혐의와 근거없는 이야기들에 관해서 해명하고 그것에 관해 자기변호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것에 사도 바울이 쓴 편지 중에서는 고린도후서만한 성경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가 앞서 언급한 비난 또는 그외도 여러 비난에 관해서 자기 변호를하는데, 몇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써 부름받은 것의 증거를 고린도 교회에 있음을 변호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자신의 사역의 열매이고 그것이 곧 사도로 부름받은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자비량 선교를 한 것은 당시 떠돌이 순회 설교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이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랬기 때문에 바울은 자비량으로써 선교를 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바울이 생긴것이나 말하는 것이 볼품이 없다는 것에 관해서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능력이 나타난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로 끝을 맺고 있는데요.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것은 오늘날 주로 축도로 사용되는 성경구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약성경 고린도후서를 이번처럼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았을 때는 이 구절이 그냥 축도로 사용되는 구절이지 하는 정도의 이해에 멈춰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가 쓰여지고 그 내용이 무엇에 관계되어 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면서요. 이 축도가 굉장히 놀도록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또 근거없는 이야기들로 자신을 흔들었던 이들과 그것에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근거없는 뜬 소문으로 비난을 받고 거의 매장되는 분위기에서 그 일을 주도하고 그 일로 내게 크게 상처와 고통을 준 이들을 향해 축복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 향해 축복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대못을 박았고 원수와 같았던 이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고 그 은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신가요?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상종 못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를 위해 복을 빌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같이 밉고 자신을 핍박했던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이를 통해서 목회를 배웁니다. 목회자는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는가하고 말입니다. 때때로 마음을 상하게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지만, 그들을 영원히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고 끝임없이 보살피는 일 그것이 목회임을 생각해 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더 넓혀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단지 목회자에 관해서만 주는 교훈만은 아닌 것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결국 사도 바울의 모습은 신앙인으로써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입니까? 원수마져도 품을 수 있는 큰 마음이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참 이기적인 존재인 우리가 원수마져도 품을 수 있는 아주 높은 차원의 이타적인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 신앙이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이니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능력주시면 능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삶을 보여주었으니 말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데, 오늘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하는 상대마져도 품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