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데살로니가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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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데살로니가후서 3:10(신약 336쪽)
설교제목: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서에 관하여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후서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쓴 편지 또는 서신 가운데 역사적으로 두번째 순서에 해당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여러 통의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 적게는 3분의 1정도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에서 그 편지는 바울이 쓴 순서대로 나열된 것이 아닙니다. 가령, 로마서가 가장 먼저 나오지만, 사실 바울이 가장 먼저 쓴 편지는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래서 벌써 두 주가 흘렀지만 지지난 주에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를 나눴습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갈라디아서는 남부갈라디아설과 북부갈라디아설에 따라서 그 편지를 쓰여진 시기를 달리본다고 말입니다. 그 내용을 완전히 다시 반복할 수는 없으니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는 오늘날 터키 이제는 튀르기예라고 부르는 나라의 한 지방입니다. 우리로치면 특정 도시가 아니라 전라도와 같은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이 갈라디아 지방을 북쪽으로 볼 것이냐 남쪽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기록시기가 달라집니다. 어느 것이 맞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학자들의 의견이 아직까지는 팽팽한데, 저는 제가 참고한 자료에 근거해서 남쪽 갈라디아라고 보았습니다.
남쪽 갈라디아가 맞을 경우에 이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때 쓰여진 편지이기 때문에 가장 일찍이 쓰여진 편지가 됩니다. 반면에 북쪽 갈라디아가 맞으면,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때이기에 오늘 나눌 데살로니가전서보다 늦게 쓰여진 것입니다. 저는 남쪽 갈라디아가 맞다고 보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가 가장 먼저 쓰여진 바울의 편지라 보았고 오늘은 그 다음에 쓰여진 데살로니가전서와 또 후서를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언제 쓰여진 것일까요? 우선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쓰여졌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 관해서는 바울이 쓰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바울이 썼다는 것으로 여기고 보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고 약 1년 안에 쓰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쓰게 된 것일까요? 이는 데살로니가라는 곳을 이해하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오늘날에는 그리스의 큰 도시 중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실라와 떠나면서 이른바 ‘마케도냐 환상’을 보게 됩니다. 본래 사도 바울은 첫 선교 여행지인 오늘날의 튀르기예 성경에서는 소아시아 지역을 다시 방문하고 둘러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오늘날 그리스에 있는 마케도냐 지방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 첫 방문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빌립보이고 여기서 그 유명한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역하던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을 치유하여 주었다가 그 일로 실리와 감옥에 갇히게 되고 찬송중에 옥문에서 풀려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 꽤 부유하고 발전한 도시였고 그곳에는 유대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바울은 유대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혹시 바울이 왜 유대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했는지 아십니까? 일단 바울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복음의 우선순위를 유대인들에게 두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이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는 길이었을 것이고요. 그 외에도 당시 유대인들은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에 의해서 여러 혜택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군면제를 받거나 황제숭배에 관해 양해를 받거하는 하는 식의 종교적인 차원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을 기독교인들로 변화시켜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훨씬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만약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세계 각지로 전파되는 것에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바울은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을 회심시키고 그들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유대인들이 발생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얼마 머물지 못하고 그곳을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울을 반대하던 유대인들을 통해 왜곡되어서, 기독교를 믿고 따르고 한 이들을 로마의 적으로 몰고 갔으며,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여러 가지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충분히 양육할 시간을 갇지 못한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당할 고난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난 것에 관해 낙담하거나 실망한 이들에 관한 염려였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했으나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디모데를 파견하여서 바울의 상황을 전하고 그곳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움 중에도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그들 가운데 종말에 관한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일찍이 ‘카비루스’라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이는 데살로니가의 수호신인데, 그는 적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어 데살로니가에 묻혀 있지만, 언젠가 다시 부활해서 다시 나타난다는 믿음이 이었습니다. 사실이 이러한 믿음이 데살로니가에 뿌리 내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에 관한 복음을 데살로가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람들은 종말에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궁금해 했고 당시 바울의 가르침도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여겨졌기에 더욱이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삶에 관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편지를 통해 그 종말의 때를 살아는 방법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얘기합니다.
아마 우리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이 익숙할 겁니다. 이는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나오는 것이고 거의 암송하는 구절이지요. 그런데 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보다 일찍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부터 사용하였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얘기하는 것은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삶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서로에게 사랑을 행하며,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소망하며 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데살로니가 전서의 얘기를 어떤 이들은 오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곧 종말이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처럼 얘기합니다. 한 번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아마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일겁니다. 아니,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기독교 밖에서도 종종 인용되는 구절일만큼 유명한 구절입니다. 흔히 이 말은 게으름에 관한 경고로 사용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얘기하려는 것은 단순히 게으름에 관계된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삶에 관한 교훈인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이런 겁니다. 예전에 2000년도가 되면 종말이 온다는 여러 예언들이 있었습니다. 뭐 제가 얼핀 기억나는 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라든가 기타 등등의 예언들이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들이 종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여서, 사람들에게 재산을 갈취하는 일들이 벌어지거나 혹은 현재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논리는 이런 것이죠. 결국 종말의 때 혹은 심판의 때가 오면, 우리가 쌓아 놓은 물질이나 재물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우리의 신앙만이 가치가 있은 것이며 그것이 심판을 받게 될텐데, 그 신앙의 가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놓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일견 맞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까지 허락된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거룩함을 이뤄가야합니다. 또 재림하실 예수님은 우리의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삶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사회적 성공과 물질의 재화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였는지 아닌지를 놓고 평가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온전한 신앙생활을 이루는 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열심 또는 활동에 매진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제대로 온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권면을 따르자면,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않게 말입니다. 그러니 온전한 신앙생활은 종교적 활동의 열심이 아니라 우리 하루를 소중하고 가치있게 보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이루고 그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뤄야할 신앙생활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또한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여러 환란과 곤고와 핍박이 와도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믿음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소망 가운데 거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이루게 됨을 말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저와 우리 성도님들께서 바로 이와 같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 안에서 귀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