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생명의 가치를 말하다.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마태복음 16장 26절(신약 28쪽)
설교제목: 부활, 생명의 가치를 말하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주는 아시는 것처럼 담임목사님의 출타로 제가 대신 수요예배를 인도합니다. 이번에 담임목사님이 해외를 나갔다 오는 일정인데요. 안전하게 잘 다녀올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지난주 수요일에 설교하고서, 몇몇 분에게 설교에 관한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가 원래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에 관해서는 거의 듣지 못하고, 중간에 긴장을 풀기 위해 우스갯소리로 했던 제 이야기가 크게 들려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엉뚱한 소리는 하지 말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려 합니다. 그러니 피곤하시더라도 절대 졸거나 주무시면 안 됩니다.
사실 지난주도 그렇고 이번주도 그렇고 저는 부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최근에 저는 설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주제를 반복해서 설교했습니다. 이는 제가 최근 부활을 공부하면서 이 주제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여서 착각한 것이 있었는데요. 저는 ‘부활’을 비롯해서 신앙에 관한 어떤 주제를 나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활을 공부하다 보니까요. 제가 많이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한편으로 부활이 제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부활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중요하다고 여기십니까? 제가 요사이 공부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는 부활 신앙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여러 이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죽었던 자도 살리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분명 특별한 분이라 여겼습니다. 또 이러한 생각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치며 환영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또 보게 됩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영하던 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됨을 말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것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 중 하나는 예수님을 배신했고 예수님이 로마 병사에게 붙잡히자 곁에 있던 모든 제자는 달아나버립니다. 앞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많은 이적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심지어 제자들조차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믿게 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그 일에 헌신하는 자로 거듭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완전히 변화된 인물입니다. 이렇게 사실 기독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그로부터 구약의 말씀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보는 66권으로 이뤄진 성경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끝나는데,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가 싹트고 자라난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의 경험이 먼저 있었고 나머지는 그 후에 따라온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기록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식은 언제 깨닫게 될까요? 아마 대부분은 부모가 되면서부터 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험하지 않고서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그것은 아무리 잘 설명을 해줘도 사실은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보고 듣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지도 온전히 믿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할 때 확고해지고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죽음과 부활에 관해 대략 세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처음엔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그 일로 예수님께 반기를 들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소리마저 듣습니다. 그리고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급격한 혼란과 공포에 빠져들었고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버립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성경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그 말씀은 이미 오래전에 기록되었거나 예수님을 통해 들었던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온전한 믿음 안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서부터입니다. 그 이전에 구약성경이 있었고, 그 이전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 그것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기독교의 모든 것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이 기독교에 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져다주는 의미가 크고 특별합니다. 달리 말해보자면,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또 그에 따른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온전한 신앙생활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본래 성경이 강조하고 제일 먼저 가르친 교리 또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인데, 오늘날 우리는 구원에 관한 교리와 가르침에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부활의 의미와 가치를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 부활절이라는 절기를 보내고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이를 깊이 생각하는 건 고작 부활주일 하루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을 통해 정해졌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본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곱 번째 날인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정확히는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여덟 번째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키는 매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에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부활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신앙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활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못할까요? 이것은 앞서 한 신학자의 지적처럼, 우리가 구원에 관한 가르침에 많이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16세기의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로부터 분리된 개혁교회 이른바 개신교에 속해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개혁 중에 강조된 교리가 구원에 관계된 것 정확히는 ‘이신칭의’에 관한 것입니다. 이른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믿음과 구원에 관한 가르침이 좀 더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부활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부활이 뭘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에 관해서 나름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지키는 절기 중에서 성탄절과 더불어서 부활절을 크고 중요한 절기로 지키고 있기에 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은 생각 속에 있기에 부활에 관해 더 잘 모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에 더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에 관한 아주 큰 착각 중의 하나는 부활이 그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부활에 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지만, 그것으로 부활을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은 그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 이상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 인간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흔히 인간을 영혼과 육체를 지닌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건 성경이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혼과 육체에 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가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로는 ‘네페쉬’입니다. 이를 헬라어로 옮긴 단어는 ‘퓨뉴마’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는 숨 또는 호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한글 성경에 이 단어를 영혼으로 번역하지만, 같은 단어를 목숨이나 생명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살아있는 생명으로써의 영혼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에서 보는 육체와 분리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혼이 우리의 생명에 관계된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영혼도 죽는 것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 또는 ‘불멸한다’는 종류의 생각은 사실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이원론에 기초한 그리스철학과 다른 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을 통해 완전히 소멸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부활이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거나,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돼선 안 됩니다. 부활은 철저히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부활이 아주 특별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일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전혀 다른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이는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보면, ‘사륵스’에서 ‘소마’로의 변화입니다. 사륵스라는 것은 언젠가 썩고 부패할 육의 몸입니다. 반면에 소마라는 것은 영의 몸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해를 막기 위해 한글 성경에서는 ‘신령한 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원어적 표현은 ‘영의 몸’이 맞습니다. 우리는 영이라고 생각하면, 앞선 경우에서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육체와는 다른 형태도 없고 물질이 아닌 비물질적인 존재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소마에 따른 영의 몸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이기도 하고 형태를 지니기도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찾았는데, 그 성경 말씀 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보면, 이 소마의 몸 곧 영의 몸에 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어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문을 통과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륵스라는 육의 몸으로는 닫힌 문을 통과할 수 없지만, 소마라는 영의 몸은 닫힌 문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심지어 도마에게는 그것을 확인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확인하고서 이와 같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그러니깐 소마라는 영의 몸이 비물질적인 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도 경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는데, 잠깐 같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성령님은 영이시잖아요. 이때 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같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영이 아무런 물질과 형태를 지니지 않은 어떤 에너지나 기와 같은 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물질과 분리되는 어떤 비물질적인 이를테면, 유령이나 귀신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어떤 형태를 가질 수도 있고 또 물질을 통과하는 비물질의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하는 방식을 흔히 인격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에서도 같습니다. 그러니깐 마치 무당이 접신하듯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람과 교류하듯이 정확한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전인격적인 교감으로써 성령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받았다는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태를 보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의 사람은 성령과 전인격적인 교제가 일어남으로 더 인격적인 성숙함을 가지게 되어야 합니다. 이를 놓고 영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영적이라는 것이 마치 어떤 환상과 황홀경에 취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현상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적인 상태가 적어도 비이성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 이야기로 돌아와서요. 그런데 부활에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장에 우리가 부활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미래에 죽음을 통과해서 부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활의 경험이 시간에 갇힌 우리의 한계이지만, 하나님의 한계는 아닙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단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활이 현재 일어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이것은 증명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성경은 이에 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가셔서 모습이 변화되셨을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죽은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는 장면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이 현재에서 경험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을 이른바 영적인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앞서 영적이라는 것이 마치 귀신이나 유령과 같은 비물질적인 존재들의 세계가 아니라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세계는 사실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세계입니다. 이른바 하늘나라 또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이것을 하늘이 열리거나 하늘에 관계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장면, 또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장면 등을 말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공중 곧 머리 위의 하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실재하는 일종의 다른 차원과도 같은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하늘에서 풀면 땅에서도 풀린다’ 이는 하나님이 속한 영적 세계 또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가 그와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또는 영적 세계에 속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실재를 구약성경의 한 장면을 통해 또한 보게 됩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엘리사 예언자가 이방군대에 포위를 당했을 때, 그의 종 게하시는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게하시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 집 주변을 가득메운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였을 수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부활은 그 세계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서 어떤 이들은 현재적으로 부활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경험되어지는 것은 생명력입니다. 이것은 부활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이상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구약성경에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 이전에는 부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을 일으키는 부활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라는 것은 의학적으로보자면, 심장과 뇌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육체가 움직이는 것에만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실 때 그 아이를 가리켜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말에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아이를 놓고 잔다고 말한 것은 죽음에 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숨이 끝어진 것을 죽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심장과 뇌의 작용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대인들 곧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과도 관련이 있는데, 히브리인들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 또는 살아있다는 것이 제대로 작동을 하는 것을 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깐, 자동차가 있으면, 그 자동차가 시동이 걸리고 제대로 작동해야지 자동차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만약 작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우리는 보통 완전한 무로부터 세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히브리적 사고에 따르면,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인 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질서를 부여하시고 온전히 작동하도록 만드신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제 기능을 가지고 작동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 또는 존재한다는 것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육신이 멀쩡해도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인데, 목사답게 살지 못하면, 목사라고 여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인데 사람답지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이고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행동과 삶에 있는 것이지 그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것이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따라 성령에 이끌림바 되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생명은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부활이 주는 생명력은 죽지 않고 산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산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경험하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사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지금도 부활을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어떤 삶일까를 생각합니다. 아직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16장 2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흔히 이 성경구절로부터 이러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 그런데 실상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말이 진실됨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우리에게 그것을 확실히 나타내 보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 목숨을 빗지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정체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얻게된 생명을 가진 삶 곧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삶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랑의 삶을 이루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 분께서 우리를 무엇보다 귀히 여겨주시고 사랑해주심을 믿습니까? 오늘 우리가 그 믿음 안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오늘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