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인생역전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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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 12장 24절(신약 168쪽)
설교제목: 부활, 인생역전을 이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근래에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접했습니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었습니다. 그 해당 내용을 영상으로 만든 것이 있어서 잠깐 보여드리려 합니다. 영상이 약간 조잡하지만, 내용에 주목해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 영상: 6분 1초
방금 영상에서 본 것처럼, 죽음을 결심한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삶이 힘겹고 미래에도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겨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죽음 힘을 다해 1년을 살아봅니다. 영상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책에서는 그녀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했던 또 다른 일도 소개합니다. 그것은 누드모델이었습니다.
아마도 보통의 경우라면, 또 죽을 정도의 결심이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주인공인 아마리는 꼭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온 힘을 다해 행합니다. 그리고 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정말 자신의 목표였던 라스베이거스에 갑니다. 과연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궁금하신 분은 책을 보시면 됩니다. 미리 얘기해드리면 재미없으니까요.
저는 이 이야기가 흥미로웠던 것이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삶이 일정 궤도에 오르면, 그 궤도를 따라 흘러가며 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몸에 배인 습관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익숙하고 몸이 편안한 방식으로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삶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고 점점 삶은 특정한 모양으로 굳어져 갑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쉽게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당장 저를 놓고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내향적인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사실은 혼자 사색하기를 즐깁니다. 혼자서도 잘 놀고,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지냅니다. 그래서 아직 혼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회자인 저에게는 분명 변화와 개선이 필요한 점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목회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노력합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고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려 말입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여보려고도 하고, 여러 사람의 관심사를 따라 가보기도 하고, 틈틈히 여러 사람과 대화 해보고 활동에도 참여해 봅니다. 그 노력의 하나가 기회가 닿는데로 소개팅에 나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잘 안 됩니다. 노력이 부족한 것인지, 흔히 위로하는 이의 말처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노력과 무관하게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편안하고 좋습니다. 노력에는 아무래도 많은 힘이 들어가니까 애를 쓰면 쓸수록 스트레스가 쌓이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난 안되나 보다, 별 수 없지. 사람이 생긴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참 변하기 힘든 존재라 생각합니다. 혹은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혹독한 댓가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소개해드린 영상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죽을 각오를 하고 그만큼 노력했을 때 인생의 궤도가 바뀌어지니 말입니다. 그러니 변화를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다만, 죽을 각오 정도 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다행인도 모르겠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니 말입니다. 그래도 저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같이 오늘 성경 구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것이고 그 의미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곧 닥칠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열매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곧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죽음의 댓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변화는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해야 이룩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큰 희생과 댓가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스스로는 쉽게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대신할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죽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사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가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원래 죄로 인해 우리가 죽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습니다. 이러한 결론이 틀린 것이 아니냐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에도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늙어서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 인간은 모두가 언젠가 죽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우리의 끝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끝이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대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고 했는데 영원히 산다니 무슨 말입니까? 그건 앞뒤가 안맞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서 틀린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5장 16절에서 17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방금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써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결과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 곧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이 있기 위해서는 그에 앞선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 그러니까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는 그것을 ‘인생역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역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저는 이상하게도 ‘로또’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자주 로또는 인생역전이라는 말과 묶여서 사용이 되니까요.
아마도 그건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인생이 바뀔만큼 엄청난 돈을 거머질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또 그것은 인생에서 아주 희귀하게 일어나는 종류일을 뜻하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 사실 로또를 통한 인생역전이라는 것은 쉽게 기대할바가 못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주어진 인생역전의 기회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부활이 인생역전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앞서 농담삼아 인생역전을 로또와 연결해서 생각했지만, 사실은 인생역전은 거대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로또가 그와 같은 변화를 줄 수 있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또는 모두가 꿈꿀 수 있는 또는 획득 가능한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부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부활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 로또보다 부활이 우리에게 더 큰 인생역전의 가능성을 줍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어떤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까? 먼저는 존재에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이에 관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서 20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핍박자들로 인해 문을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닫힌 문을 넘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는 부활에 참여하는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존재의 변화가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몸과는 다른 차원의 물질 이상의 신령한 몸의 변화입니다. 이는 우리가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격상되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부활에 따른 존재의 변화라는 것이 성형 수술해서 외형이 완전히 달라지고 하는 차원과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오셨지만, 제자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다른 존재로 오시진 않았습니다. 한편 그 점이 저는 약간 아쉽게 느껴지긴 하는데요. 부활 후에 장동건이나 원빈처럼 되진 못한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은 현재보다 우리를 격상된 존재로 변화시켜주는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고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참 소망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이런 말도 하지 않습니까? ‘죽지 못해 산다’라고 말입니다. 분명 어떤 이에게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롭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분투합니다.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이 단지 부활의 전부라면, 우리에게 부활은 소망이 아니라 절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이러한 교훈을 줍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고 또한 심판에 이르지 않음을 말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영생뿐만 아니라, 심판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부활이 주는 소망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또 다른 변화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우리의 존재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심판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까?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까?
만약 심판이 없다면 많은 이가 살기보다 죽기를 택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많은 경우에 삶은 힘겨움의 연속인데, 무엇으로 우리는 그 힘겨움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선을 행하거나 윤리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를 수는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의 삶이 그와 같은 노력과 열심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면, 우리는 분명 삶을 살아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 같아서 약자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고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짐승의 세계는 문명의 세계로 바뀌게 되고 비로소 모두가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치 스포츠 경기에서 심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공정한 경기를 이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심판은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고 또한 소망을 줍니다. 우리의 삶이 심판의 때에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게 판단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삶의 고단함을 견뎌내고 오늘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부활을 인생역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선 얘기들을 요약하자면, 부활을 통해 우리는 존재가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변화들이 우리의 인생을 이전과 다르게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꿔놓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통해 인생역전을 이룬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아니 우리는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정확히는 이렇게 물어야겠습니다.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그를 따르던 무리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다시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이를 믿게된 이들은 온전한 제자로 거듭났습니다. 더 이상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삽니다. 저는 그와 같은 변화가 바로 오늘 우리가 처음에 읽은 성경구절에 잘 담겨져 있다 생각합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기억하십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을 향한 말씀으로 변화됩니다. 곧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우리는 이와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통해 인생역전을 이룬 우리의 삶은 예수님처럼 죽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부활에 참여한 자인지 아닌지 또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인생역전을 이룬 자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성도님은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 안에 그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직 변화를 이루지 못한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죽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로 우리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살을 권하지 않습니다. 이 죽음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 또는 예수님의 제자를 키워내기 위한 죽음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처럼, 농부가 곡식을 가꾸는 것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귀한 열매를 맺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죽음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부활을 통해 인생역전을 경험한 저와 우리 성도님들은 이 말씀에 의지하여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우리 잠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