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편집본)
서론
본론
여행 식량과 골리앗의 칼을 챙긴 다윗은 바로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한다. 다윗이 블레셋 도시 가드로 도망한 이유에 대해 당혹해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사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죽이리라는 것을 아는 다윗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도망하는 방법은 해외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것도 사울의 적인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유리하다.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가장 두려워하는 적의 장수가 항복해 오는 셈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정치적 망명에 가정 적합한 선물이 골리앗의 칼이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땅에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힘에 정복당했다는 표지였던 것처럼 이스라엘 땅에 안치된 골리앗의 칼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힘 아래에 있다는 상징이 된다. 골리앗을 무찌른 적의 장수가 그 검을 들고 가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기쁨일 것이다. 마치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에 돌아올 때 이스라엘이 느꼈던 기쁨에 비견될 수 있다.
이처럼 다윗은 생존을 위해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다. 이것은 다윗의 문제(사울)를 단번에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블레셋에서 망명가로 어느 정도의 생활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는 불확실하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놉의 성소에서 다윗이 하지 않은 일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로 묻지 않았다. 다윗이 놉의 성소에 왔을 때 망명에 대한 그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치밀한 계획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히멜렉이 검의 위치를 설명할 때 “에봇 뒤에 있다”라고 했음에도 다윗은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이후 다윗은 여러 번 에봇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만 놉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블레셋으로 망명하면 생존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즉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사명에서는 도망가는 것이 아니었을까.
분명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는 다윗을 원수로 생각하고, 그의 망명 요구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다윗은 이런 분위기를 직감하고 아기스를 두려워하기 시작한다(12절). 사울이 두려워서 아기스에게 도망왔으나 이번에는 아기스가 두려워진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만 바뀌었지, 다윗은 이스라엘 땅에서나 블레셋 땅에서나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두려움을 회피하는 손쉬운 방법이 두려움의 대상에서 도망가는 것이지만 절대 영구적 해결책은 아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어디를 가든지 두려운 존재를 만나게 된다. 가드 땅에 오면 안전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다윗은 막상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자 사명을 버리고 안전을 도모했던 것을 회개했을지도 모른다. 다윗이 특히 마음에 둔 말(12절)은 “그 땅의 왕 다윗”이라는 말이다(11절).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조롱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다. ‘그렇다. 나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지명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한갓 인간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서 안위를 도모하려 했던가.’
이런 다윗의 ‘회심’을 보여 주는 것이 “그들 앞에서 다윗이 행동을 바꾸었다”는 말이다(13절). ‘행동을 바꾸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샤나 타암’(šānāh ṭāʿām)은 ‘판단을 바꾸다’ 혹은 ‘생각을 바꾸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다윗이 ‘회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셔서 다윗은 미친 척하기 시작한다.
결론
망명에 실패한 다윗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망명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다윗은 망명을 결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물어 본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도 다윗에게 블레셋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다윗이 가드로 간 이유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 왕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블레셋 지도자들이 자신과 같은 이스라엘 최고 사령관의 망명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실패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나서야 도망 나올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아둘람 근처의 굴에 은신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분배할 때, 아둘람은 유다 지파에 할당되었다. 유다 지파와 아둘람 사이의 인연은 다윗이 아둘람을 은신처로 삼으면서 그 절정에 이른다. 아둘람은 다윗의 왕위 등극 과정 제2기를 시작하는 장소가 된다
후에 르호보암이 이곳에 성벽을 가진 요새를 만들었고(대하 11:7),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게 된다(느 11:30).
마카비 전쟁을 주도한 유다도 마레샤 전투 이후 그곳에서 진지를 구축했다는 기록도 있다(마카비2서 12:38). 그러나 이것은 유다 마카비를 다윗과 같은 인물로 그리려 했던 정서가 작용한 것 같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아둘람을 “오돌람”이라고 부르며, 엘루세로폴리스(혹은 벧구브린)에서 서쪽으로 14킬로 지점에 있다고 기록한다. 그곳은 오늘날 키르벳 에스-세이크 마드쿠르(khirbet esh-Sheikh Madhkur, 북위 31도, 동경 34도)이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은신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형제들”과 “아비의 집”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들도 사울의 견제와 억압 때문에 고향을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 역시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 형제들이 다윗에게 힘을 보태었다는 진술(1절)은 초하루 잔치 때 다윗의 부재에 대한 요나단의 설명에 사울이 화를 낸 대목을 연상시킨다(20장 29절 해설 참고). 요나단은 다윗이 형제들의 요청에 마지못해 매년제에 참석했고 (그래서 초하루 잔치에 빠지게 되었다고) 보고했으나, 사울은 다윗이 왕보다 친족이나 형제들에게 더욱 충성한다고 오해하였다. 그런 오해가 예언이 되었는지, 형제들이 이제는 다윗과 뜻을 같이한다. 이 형제들 가운데는 엘리압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한편 1절에서 “형제들”과 나란히 언급된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형제, 할아버지, 삼촌 등을 포함하는 확대 가족이다. “아비의 집”도 다윗과 뜻을 같이한 것으로 보아 사울은 골리앗을 무찌른 장수에게 약속한 면세 혜택을 그 ‘아비의 집’에 제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랍게도 사울의 통치 아래에서 “환란 당한 자”, “빚에 시달리는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 몰려든다. 다윗은 아둘람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왕, 사울과는 다른 왕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다윗에게 몰려든 이 사람들이 다윗의 사명을 다시 확인해 준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지만 당시 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은 예수님을 역시 갈릴리 마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들 역시 아둘람의 다윗에게 몰려든 자들과 같이 ‘환란 당한 자’, ‘빚에 시달리는 자’, ‘마음이 원통한 자’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한 목자(왕)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이다.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은 약 4백 명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사르, śar)가 되었다. 다윗은 4백 명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원통한 사람들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지만 그 후 다윗 옆에 없었다. 기름 부음 받은 후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기지와 지혜와 용기와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고,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 등극 제2시기(고난)부터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혹은 직접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다윗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 가운데 있자 하나님의 음성이 다윗에게 분명히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