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8_주일예배_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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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에게
본문: 마태복음 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많이 듣고 본 이 말씀. 전도지나 교회당 앞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그렇게 쉽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말씀이 그 자체로 그만큼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일반적인 인간의 정황에 솔깃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고통과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수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짐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삶 자체가 전적으로 고통일 수만은 없지만, 고통 없는 삶 또한 없습니다. 부처가 인간의 생로병사 자체가 고통이라 한 것은, 삶의 고통을 깨닫는 것이 궁극적인 깨달음 곧 해탈에 이르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또한 그와 같은 인간의 보편적 정황에 부합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이 말씀은, 성경 본문 말씀의 맥락에서 아주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의 공동체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마가 2:14의 세리 레위와 제자 마태를 동일 인물로 보고 그 사람이 저자인 것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기는 하지만), 마태복음이 기록된 정황, 그 청중이 누구였는지는 대개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전쟁(66-73)에 이어 유대가 완전히 멸망한 직후 상황에서 팔레스틴 북부 곧 시리아 남부지역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기록되고 읽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상황은 그 청중이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의 질곡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는 극한의 전쟁 상황과 그에 이은 유대민족 국가의 멸망 상황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전향하였다고는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유대인었기에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은 가볍게 건너 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고방식, 의식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들은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실질적인 테러의 위협 아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팔레스틴 주변에서의 유대인들에 대한 테러는 공공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소위 정통 유대교인들로부터의 박해였습니다. 유대전쟁 후 비록 허깨비와 같았다 할지라도 그나마 존재했던 국체가 완전히 사라진 후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전통을 강화함으로써 정체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쫓겨납니다. 팔레스틴의 변방에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이를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사실 바로 그런 정황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극한적인 폭력 사태 이후 나라를 잃은 설움과 동시에 동족들로부터도 쫓겨나는 설움을 겪었던 것이 팔레스틴 주변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중의 폭력에 시달린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러한 상황은 팔레스틴 주변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공통되는 상황이었겠지만, 그 폭력적 상황, 특히 전쟁과 그 직후의 폭력적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서입니다.
다른 공동체들이 유대의 전통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농후한 데 반해, 마태의 공동체는 유대의 전통을 단순히 극복하려는 성향을 띠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그래서 그 율법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율법의 정신 자체가 폐기되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율법의 완성을 믿은 이들이 마태의 공동체였습니다. 율법주의에 대항하면서도 율법의 완성을 역설하는 긴장이 마태복음에는 깔려 있습니다. 이 사실은 민족적 일체감을 쉽게 버릴 수 없었던 마태 공동체의 사정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마태 공동체의 정서는, 국권을 상실한 쓰라린 경험과 연이은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경험한 우리의 민족적 상황과 유사합니다. 강대국과 주변 민족의 폭력에 짓밟히고 동시에 동족간의 폭력적 갈등, 여기에 겹쳐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의심스러운 싹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체제 내의 양민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했던 정황과 아주 유사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 말씀은 바로 폭력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로부터 당하는 폭력, 동족들부터 당하는 폭력, 그것에서 벗어나 안식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은 못난 백성으로서의 신세, 현존하는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불령선인', '반동분자' 또는 '빨갱이'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이 바로 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상황에서 그야말로 절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반폭력 평화의 대장전으로 일컬어지는 산상설교(5:3-12)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 참 안식에 대한 갈망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 다시 한 번 산상설교의 내용을 봅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자비함을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바로 그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심리적 안정을 뛰어넘는 차원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단순히 하나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디 딴 데로 도피하지 않고도 삶 자체가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로운 삶, 안식을 누리는 삶을 일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말씀은 '멍에'를 내팽개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도피와 방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책무, 새로운 삶의 연대성에 대한 적극적 선택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그렇게 짐을 가볍게, 기쁘게 나누어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는, 그 말씀의 의미를 개인적 심리적 안정의 차원으로 좁게 이해하고 만 데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과 평화는 사사로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마음 편하자고 예수 믿는 것이 고작인 상태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어찌 우리가 신앙이 주는 개인적 위로를 부정하겠습니까? 그것도 마땅히 누려야 할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개인적 위로를 갈망하는 마음이 내 곁의 형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의 다른 일에서는 눈길을 외면하게 만들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의 울타리, 신앙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자기들끼리 딴 세상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지, 진정한 세상의 평화를 이루고 세상의 다른 사람들의 안식을 위해서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마저도 서슴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이 단순히 하나의 도피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벗는 것은 예수의 가벼운 멍에를 짊어지는 적극적인 행위로 직결됩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는 이 말씀은, 마태 공동체의 또 다른 긴장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세상의 짐을 벗고, 곧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왔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이 공동체는 자신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스스로의 긴장감을 늘 유지했습니다. 하늘 나라 잔치에 초대되었으나, 예복을 준비하지 않아 쫓긴 사람들 이야기(22:11-14)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 가운데 합류했으되 그 가운데서 다시 이탈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반영합니다.
이 사실은, 이방인은 잘못되었고 따라서 영원히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고,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잘못되었고 역시 영원히 무거운 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데 반해 그리스도인만이 옳다는 독선주의적 도취감을 경계합니다. 그들은 이중의 폭력에 희생되어 온 자신들의 경험에서, 자신들 또한 스스로 어떤 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과오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그 독선주의적 도취감에 빠진다면, 오늘 말씀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도취감은 자신들이 벗어 던진 무거운 멍에를 다른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가벼운 멍에를 기쁘게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편하자고 남을 괴롭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 혼자 편하다고 해서 남과 담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리는 평화와 안식을 나누어 누릴 수 있는 길,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나 혼자 편하겠다는 이기적인 도피처를 구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의 어떤 사람이든 바라는 기대와 갈망에 대한 응답으로 이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그 답을 비틀지 않고, 함께 안식을 나누며 함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