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8. 주일3부예배. 완벽함이 아닌 완전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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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3 ㄱ)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서론

4세기 수많은 이들이 예수의 명령을 따라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 사막으로 갔습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가 지금 함께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온전으로 번역한 단어를 다른 버전의 성경에서는 모두 이렇게 번역합니다.
마태복음 5:48 (새번역)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48 (공동번역)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5:48 (NIV)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여기서 사용된 원래의 헬라어 단어는 “τέλειος”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인 “τέλος”는 “끝, 마지막, 결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동사형인 “τελέω”는 “마치다, 이루다, 성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아까 말한 “τέλειος”는 형용사형으로서 “다 마치고, 다 이루고, 다 자라서 완전한”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왜 굳이 처음 성경을 번역한 선배들은 “완전한”이라는 단어를 두고 “온전한”이라고 번역을 한 것일까요?
분명 “완전한”이라는 단어가 본래 헬라어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온전한”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에는 번역자의 입장에서 거리끼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완전”이라는 말을 쓸 때 떠오르는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이라는 말을 ‘어떤 성장도 개선도 발전도 필요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미지를 조금 더 정확하게 문장을 써보면 이렇게 쓸 수 있겠습니다. “완전”이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성되어 변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고대부터 철학자들이 “완전”에 대해 내린 정의입니다. 완성되어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이 완전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아 변한다면 완전한 것이 아니지요. 이렇듯 철학자들은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완전한 원을 생각해봅시다. 원은 중심에서부터 모든 점들의 거리가 같습니다. 어떤 한 점을 조금 더 길게 두거나 조금 더 짧게 두면 그 원은 이제 완전한 원이 아니라 불완전한 원이 되는 것이지요. 변화하는 순간 완전함은 깨어집니다. 우리말에는 이런 개념을 가리키는 더 좋은 단어가 있습니다. “완벽”이라는 단어이지요. “완전한 원”보다는 “완벽한 원”이라고 해야 방금 제가 설명한 것에 더 부합하는 것 같지요?
오늘날 우리는 완전과 완벽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분명 의미상 차이가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완전하다는 말을 사용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처음 성경을 번역한 선배들도 같은 부담감을 가지고 굳이 “온전한”이라는 단어를 따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읽으면 이게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우리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럽고 불가능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당시 그들에게 이 명령은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다른 의미,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뜻하셨던 본래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더 나은 것을 향해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완전’에 한계를 두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완전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레고리는 참된 인간은 변화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으며, 피조물들은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육체의 변화가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도덕적, 혹은 영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도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는 존재이니 인간다움은 하나님을 향해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또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닮아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두 세계를 살아갑니다. 하나는 죄와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이 여러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구분을 해봅시다. 죄와 사탄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보다는 동물로서 자기 욕망과 감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는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납니다. 욕망과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즉,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바라보면 완전과 변화는 결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밭에 심어 기르는 각종 씨앗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씨앗들은 각기 생명이라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씨앗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완전하지 않다면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게 될까요? 아닙니다. 내가 씨앗을 심고 열심히 돌보는데도 그것이 자라나지 않는다면, 애초에 그 씨앗이 완전한 씨앗이 아니었던 거지요.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도 같은 일을 하십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생명을 담고 있는 완전한 씨앗을 우리에게 심으셔서 그 씨앗이 자라나게 하십니다. 영적으로 아무런 생명이 없던 우리에게 씨앗을 심으신 결과로 우리는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담고 있는 완전한 생명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안에 완전한 생명이 있기에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회복의 과정에서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완벽해 보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 안에 주신 생명의 능력 자체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가진 완전한 능력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를 이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처럼 완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완전해져보라고 요구하시는 것도 아니요, 지금 당장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내라고 요구하시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하며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완전함이라는 것은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요? 다시 한번 말씀을 읽어봅시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닮아 너희도 완전한 모습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어떤 모습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정직? 용기? 신실함? 절제? 많은 부분들을 우리가 닮아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와 대화하시던 중에 하나님의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사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들을 담아낸 것인데요,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눅 10: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목숨을 바쳐 사랑한 이들이 다른 이들을 완전히 사랑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일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 -> 원과 점
하나님 사랑 = 자신을 사랑 ->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성정으로서의 사랑
사랑은 감정이기도 하나 태도입니다.
감정은 행동으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지만 태도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 압바 아가톤이 약간의 물건을 팔러 도시로 가다가 길가에서 두 다리가 마비된 장애인을 만났다. 그는 아가톤에게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압바 아가톤이 대답했다. “물건을 팔러 도시로 갑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나를 도와주시오. 나를 일으켜 거기에 데려다주시오.” 그래서 아가톤은 그를 업어서 도시로 데려갔다. 그가 말했다. “물건을 파는 곳에 나를 내려놓아 주시오.” 아가톤은 그렇게 했다. 아가톤이 물건을 하나 팔자 그가 물었다. “얼마에 팔았소? 아가톤이 그에게 값을 말해 주엇다. 그러자 그가 “빵 하나만 사 주시오”라고 요구했다. 아가톤은 빵을 사 주었다. 압바 아가톤이 또 다른 물건을 팔자 그가 물었다. “그것을 얼마에 팔았소?” 그 값을 말하자 그가 말했다. “이것 좀 사 주시오.” 아가톤은 그것을 사 주었다. 아가톤이 자기 물건을 모두 팔고 떠나려는데 장애인이 물었다. “떠날겁니까? 아가톤은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나를 처음 보았던 곳으로 다시 데려다주시오.” 아가톤은 그를 업고 그 장소로 다시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그가 말했다. “아가톤, 당신은 하늘과 땅에서 주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았습니다.” 아가톤이 눈을 들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아가톤을 시험하러 온 주님의 천사였다.
위대한 선으로 나아간 압바 암모나스에게는 어떤 사악한 흔적도 없었다. 그가 주교가 된 후 어떤 사람이 임신한 어린 소녀를 그에게 데려와서 말했다. "이 비참한 인간이 행한 바를 보십시오. 그녀에게 벌을 주십시오." 그러나 암모나스는 그 어린 소녀의 배에 십자 성호를 긋고, 고운 모시 세 벌을 그녀에게 주라고 명령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출산할 때 그녀나 아이가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아 걱정이 되네요." 그런 암모나스에게 고발자들이 말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녀에게 벌을 주십시오." 암모나스가 말했다. "형제들이여, 보시오. 그녀는 죽음이 가까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그녀를 돌려보냈고 누구도 더는 감히 암모나스를 비난하지 않았다.
암모나스를 따르던 이들은 그가 하느님의 정의를 집행하기를 바랐습니다. 암모나스는 교회를 대표했고 소녀는 죄를 지었기에 그가 어떤 형벌을 내릴지를 결정해야 했지요. 암모나스가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하느님과의 연합에만 골몰했다면 소녀를 다른 사람에게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사랑이었기에 그는 소녀를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사랑할만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하기에 사랑하는 것
추상적인 사랑을 그만둘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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