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31 수요예배 (이루시는 하나님)

수요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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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7 NKRV
1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보며 실망하여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만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걸림돌과 디딤돌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에서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기에 민망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 부족하고 연약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시간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 자라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옮겨 그랄에 거류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에게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라가 자신의 아내인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사라를 취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의아한 것은 당시 사라의 나이 입니다. 당시 사라의 나이가 20대이거나 30대 혹은 40대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당시 사라의 나이는 90세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18장에서 사라는 스스로 폐경기를 지난 여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왕이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삼으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길 당시 나이와 상관없이 사라가 아름다웠다는 주장입니다. 랍비의 문헌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라를 통애 이삭을 낳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몸을 회복시켜 당시 사라의 피부가 회생했고, 주름도 없어져서 원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인 아브라함이 보기에도 사라가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아비멜렉왕이 사라를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들은 당시 아브라함은 한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길 정도로 많은 부를 지닌 사람이었기에 아비멜렉이 이런 갑부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브라함의 신분과 부를 즐기려 했던 일종의 정략이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아비멜렉왕은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기 위해 데려가게 됩니다. 성도님들이 생각하기에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떠하십니까? 아내가 보았을 때 이런 남편 어떠십니까? 믿음의 조상은 커녕 한가정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자 가장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상황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2 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기근으로인해 먹을 것이 없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에도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사라의 남편이라고 하면 사라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창세기 12 장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 언약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시점이기에 이런 아브라함의 비겁하고 믿음없는 모습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무능해보이고 책임감 없어 보이는 그런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믿음조차 없어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 저를, 또 우리 가정을 지켜주옵소서!! 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모습은 단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이러한 연약하고 무능해보이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 자격없고 연약한 그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는 그 연약한 아브라함에서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능력있는 모세만 보아도 그가 처음부터 훌륭한 지도자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라는 부르심을 받을 때 모세가 처음부터 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렇게 순종하겠습니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이유를 달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의 능력과 힘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훌륭한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인 엘리야도 마찬가지 입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는 바알을 섬기는 450명과 대결을 하여 이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알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이긴 것이 엘리야의 힘과 능력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알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엘리야의 능력이 대단해서, 그의 힘과 지혜가 대단해서 다시말해 엘리야의 힘으로 이겼다면 이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쫓아 왔을 때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힘이었다면 이세벨과 맞서 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 능력있다는 엘리야도 자신을 죽이겠다고 쫓는 이세벨이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기를 간청하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열왕기상 19:5-8
열왕기상 19:5–8 NKRV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5절과 7절에 하나님의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루만지다는 뜻은 단순히 위로와 격려를 주는 행위뿐만이 아니라 다시 사명감을 회복하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능을 부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지쳐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엘리야가 자신의 힘과 능력과 믿음으로 위대한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으로 그에게 맡겨진 사역과 사명을 감당하는 위대한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구약뿐만이 아닙니다. 신약의 제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위대한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려진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평범한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성격 때문이지 그는 늘 예수님의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이 명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잡으러 로마 군사들이 왔을 때 칼을 뽑아들어 그들과 맞설정도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그가 죽게 되었을 때 자신이 감히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정도로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의 믿음이 대단한 것 처럼 보입니다. 그의 능력으로 그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 매를 맞으며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당할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 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 하셨을 때 자신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이 괴로워서인지 그 이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어부가 되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 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가 회복 시키십니다. 그것도 정확하게 베드로에게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면 베드로를 회복 시키십니다. 그것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장소와 같이 숯불을 피워놓고 베드로를 회복시켜 진정한 사도로 만들어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리고 갔을 때 바로 그밤에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사라가 남편이 있는 여자임을 말씀하시며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다시 보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어가실 것을 계획하셨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말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죽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우리는 이미 죽은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2:1 NKRV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것을 인정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은 단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보며 실망할 필요도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죽은 시체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매순간 넘어집니다. 쓰러집니다. 네 그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자신을 보지 말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그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는 우리를 부르신 그 주님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하시면 됩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자리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내게 어려움이 될지라도 죽었던 나를 살려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그 주님께서 끝내 우리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지금 당장 믿음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매번 똑같은 어려움에 넘어진다고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안에 계신 그 주님이 우리를 끝내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눈물로 기도하며 결심했는데 내일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고 그 넘어짐을 통해 우리는 또다른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며 믿음이 단단해 질 것입니다.
자녀가 이제 막 걷기 시작할 때 기억나십니까?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어나 걷고 뛰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가 걷고 뛰기 위해서 3천번을 넘어졌다 일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자녀가 이제 막 걷기 시작하면 수없이 넘어짐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보며 너는 글렀다. 그냥 앉아 있어라, 어떻게 너는 태어난지 1년이 다되어 가는데 아직도 10걸음을 못걷냐? 너는 그냥 기어라! 하는 부모는 못봤습니다.
오히려 한발짝 걷고 두발짝 걷고 넘어지면 그걸로 부모는 난리가 날 정도로 기뻐합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왜그런지 아십니까? 부모는 이제 이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걷고 뛸 것을 미리 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한발짝 넘어지고, 두발짝 넘어지더라도 이것을 반복하다보면 언젠가는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뛰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런 눈으로 보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나의 믿음없음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시시고 이렇게 부족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오늘도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속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계신 주님이 소망이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성도로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연약한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소망없음을 인정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만들어가실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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