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잠든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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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내고자 그 본질적인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아 온 주의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들의 삶 속에 정리되지 않은 현실들이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정리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고군분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서 1장 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한 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여러분, 살면서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한 적 있으십니까? 이것만은 절대 안할거야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일들이 분명 있으실 겁니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죠. 특히 나이가 들면서는 책임이라는 것이 생기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가기 싫은 자리에도 가야 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죽어도 하기 싫었던 일이 하나 있는데요, 아내한테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왠만하면 아내한테 사과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아내한테 사과하는 것도 싫지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제 자신이 더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저 목사님이 사모님과 관계가 안 좋나라고 오해하실 수 있지만, 저흰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빨리 사과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고집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집을 꺾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누군가를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을 할 때, 참 인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께 믿고 맡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를 때에도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어 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숙명이라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답대로 사는 게 어려운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정답보다는 해답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답을 풀어가는 과정, 문제풀이 과정을 차근차근 거치다보면 어느새 정답에 가까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나서를 참 좋아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행동한 사람인데요, 요나의 그런 행동마저도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가도록, 그래서 해답을 거쳐 정답에 이르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자, 먼저 우리는 요나의 이름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요나서 1장 1절에 보시면 요나의 아버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아밋대라는 사람의 아들이 요나입니다. 아밋대라는 이름의 뜻은, ‘진실함'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의 뜻 ‘비둘기'입니다. 오늘 성경이 요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나는 진실한 사람의 아들로서 평화를 전하는 비둘기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름대로 살지 않습니다. 2절 말씀에서 하나님이 요나를 부르셔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고 했지만 요나는 어떻게 행동하죠? 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기 문장에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갑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갔다는 뜻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의 행동인 것입니다.
또 우리가 인상깊게 볼 수 있는 구절은,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삯을 주고 배를 탄 것입니다. 당시 배삯을 지불하려면 집을 팔아야 할 정도의 거금이었습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간 것은 어쩌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려고 제대로 마음 먹은 모습이라는 것이죠.
창세기 4장 16절에 보시면 오늘 요나의 행동과 비슷한 행동한 사람을 볼 수 있는데요,
(창 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여호와 앞을 떠나서’라는 히브리 원어가 ‘밀프네이 야웨’인데요,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했다’고 했을 때 사용된 히브리 원어도 ‘밀프네이 야웨'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간 것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 하나님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는데요, 당시 고대인들은 지역마다 다스리는 신이 있었는데, 그 지역을 관할하는 신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면 그 지역을 떠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요나 역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벗어나면 하나님께로부터 진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 우리 가정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갈보리 장로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기 샌디에고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 가운데 계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다윗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39:7-10입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리시리이다
우리는 주님의 얼굴로부터 결코 멀어질 수 없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끝까지 우리를 추적하여 우리를 찾아내시고 그 분께로 돌아오게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혹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이제는 더 이상 회복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가정과 일터와 학교에서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발견해내실 것이고,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결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니느웨로 가라
니느웨로 가라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좀 한심해 보이긴 하지만, 나름 그래도 그 업계에서는 큰 업적이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을 보시면, 선지자 요나에 대한 추가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왕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요나가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선지자였고,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알리는 예언자였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이 번성할 것을 예언했고, 실제로 여로보암 2세 때에 최대 영토를 확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요나가 이스라엘의 번영을 예고한 점을 미루어서 민족주의적인 선지자였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힌트는, 민족주의자였던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요나에게 니느웨는 대한민국에게 일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니느웨가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데, 일제 치하에 있던 어느 날 일본 동경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철천지 원수와도 같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요나가 그토록 싫어하고 저주하는 ‘니느웨’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그나마 희망적인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민족이 회개할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조차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혼내고 선생이 학생을 혼내는 이유는, 그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더 이상 자녀를 혼내지 않고, 선생이 학생을 훈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녀를, 그 학생을 포기한 것과 다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선지자였던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그들을 용서하시겠구나’라고 느끼고는 도망칩니다. ‘다바르 야웨’,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심판이 아니라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 긍휼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려 하셨다면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 않았겠죠.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아, 하나님께서 이들을 용서하시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뒤돌아 도망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했지만, 나는 가기 싫은 ‘니느웨’는 어디인가? 니느웨는 나의 원수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내가 가기 힘든 곳일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내가 가야 하지만 가기 싫은 곳이고, 내가 품어야 하지만 품기 힘든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저는 적어도 요나가 하나님께 따져 물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냐고', ‘나는 니느웨로 갈 수 없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따지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선지자라는 자신의 소명을 저버리고 도망가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에 요나처럼 도망치지 않고, 솔직한 여러분의 마음을 고백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그 고백을 들으시고, 대화를 시작하실 것이며, 그 속에서 용기와 결단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깊이 잠이 든지라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의 심정이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명색이 선지자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가는 자신의 처지가 참 불쌍하다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왠지모를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불안함과 회피, 무기력의 절정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복잡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어 요나는 깊은 잠에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나서 1장 4-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르자마자 요나가 찾아간 곳은 배의 가장 밑층이었습니다. 깊은 잠을 자기에는 배의 갑판보다는 밑바닥이 안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큰 폭풍이 몰아닥치고, 모든 사공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배에 실린 물건들을 바다에 버리고 있을 때, 요나는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구약학자인 김근주 교수는, 요나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교회의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이방인 선장이 요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정직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깨우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선장과 같은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침묵하고 있는 교회를 부끄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교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잠이 들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라담’입니다. 그런데 이 동사 ‘라담’과 어근을 같이 하는 구절이 창세기 2장 21절인데요,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창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 때 ‘깊은 잠’이 히브리어로 ‘타르데마’입니다. 라담과 동일한 어근을 공유하는 명사입니다. ‘요나 31일 묵상’을 기록하신 오지영 목사님께서는 창세기의 아담과 요나의 깊은 잠을 비교하시면서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수술이 이루어지는 동안 아담은 마취 상태, 즉 거의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든다. 잠이 깬 후에야 아담은 그의 돕는 배필, 하와를 만나게 된다. 아담의 수면 시간은 하나님의 손길이 그를 매만지는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요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잠을 청했을지 모르나, 그 시간은 하나님이 그를 만지는 특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두려움과 영적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깊은 잠을 허락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미래를 준비하시고 태어날 자손을 준비하셨다고 믿게 됩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과 그 해석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깊은 잠을 허락해 주십니다. 다니엘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후 이 환상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갖게 됩니다. 두려움은 물러나고 지혜로운 선견자의 영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안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우리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피와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잠든 사이에, 우리들을 위한 거대한 영적 수술을 감행하십니다. 영적으로 침체된 것 같고,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모르겠고, 신앙생활이 미지근해서 죄책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새로운 일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불안한 미래를 근심하고 염려하며 잠들었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깨우고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깨우고 계신다
그렇습니다. 이 하나님의 거대한 수술은, 다름 아닌 요나가 다시금 소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요나에게 남은 일은, 잠에서 깨어나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이하의 내용은, 하나님이 여러 방법으로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우시는 내용입니다.
이방인 선장이 요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그래서 요나는 9절에서 선지자다운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요나는 다시금 12절에서 체념한 듯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죽음이라는 더욱 깊은 잠에 빠지고자 하는 요나를 하나님은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구원해주시고, 계속해서 그의 잠든 소명을 흔들어 깨우고 계십니다. 함께 17절을 읽겠습니다.
(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엘룰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한 사람을 택하셨을 때, 하나님이 결정한 것을 그 사람이 행하지 않을 때에도 그 은혜는 유지된다. 보라! 지칠 줄 모르는 인내를 가지고 그 사람의 전부를 원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불타는 사랑이 그를 추적한다. 하나님은 그가 자신의 소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모든 자연계를 움직이게 하신다. 소명의 무게와 중력이 얼마나 놀라운가!”
요나의 잠들어 있던 소명은, 포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로 인해 일깨워졌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어지는 2장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선지자의 소명을 다시금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소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잠들어 있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주신 그 소명을 이루시도록 끝까지 추적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도록, 그리고 이 세상을 섬기도록, 우리의 이웃을 섬기도록 그 잠들어 있는 소명을 흔들어 깨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연계를 움직이시면서까지, 산과 바다를 흔들면서까지 여러분이 그 소명을 완수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잠든 사이, 오늘도 하나님은 쉴새없이 여러분의 소명이 바른 자리를 찾아가도록 일하십니다.
이 시간 들은 말씀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 1.
먼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소명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요나처럼 하나님 주신 본질적인 소명을 잊어버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시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다시금 소명에 충실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기도제목 2.
또 기도하실 때는,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요나가 깊이 잠든 모습은 마치 한국교회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윤리적 기준에 뒤처진 것이, 마치 교회의 가치마저 평가되는 현실에
교회는 점점 더 세상의 기준에 못 미치는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바라보며, 교회가 올바른 신학적 해석을 하여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교회가 다시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기도제목 3.
마지막으로, 금요일에 출발하는 몽골 단기선교팀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일상이라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지 않고 선교의 사명으로
몽골로 나아가는 팀원들을 축복하시고,
모든 자연계를 활용하여 요나의 생명을 지켜주셨듯이,
선교의 기간내내 하나님이 그 선교팀을 지켜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마무리 기도.
우리에게 다시금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때론 우리가 어찌해야할지 몰라 체념과 회피 가운데 깊은 잠을 자게 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일하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그 끝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소명의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이 한 번뿐인 인생 가운데 주신 소명대로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정의교회가 그런 성도들로 가득한 교회되게 하시고,
한국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정의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다시금 우리는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밤새 잠든 사이, 우리의 소명이 제자리를 찾고
새로운 날, 새로워진 소명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