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3 양청] 2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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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문.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함의 상태에서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답. 자신의 순전히 선한 기뻐하심으로 모든 영원으로부터 어떤 자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비참함의 상태로부터 건져내시고, 그들을 구속자에 의한 구원의 상태로 이끄시기 위하여 은혜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슬람의 꾸란을 공부하는 것을 거룩한 영적 전쟁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아주 치열하게 공부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공부해서 무지한 기독교인들을 전도하려 한다. 그들에게도 제자훈련도 있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까지도 있다.
엡6장에서 바울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전신갑주를 취할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단 한가지의 장비를 제외하고는 전부 방어용이다. 방어구. 그런데 오직 단 하나의 무기가 주어졌으니 그것이 무엇인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구원의 투구부터 신발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너무 약하고, 원수의 공격에 대해 허점이 너무나도 많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가진 무기 역시도 너무도 녹이 슬어서 제 아무리 휘둘러봐야 원수를 공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들 ‘솔라 스크립투라'는 동의한다. 그러나 제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단도 성경을 사용하면서 자기들의 비성경적 교리를 뒷받침한다. 지난 주일 저녁에 신천지 강의를 들었지만, 신천지도 우리와 동일한 성경을 본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종교개혁자들의 핵심이었던 ‘솔라 스크립투라'와 함께 ‘토타 스크립투라'가 중요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냐. 맨날 성경통독을 하고, 열심히 큐티를 해도 전체성경을 모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체 성경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교리를 배워야만 한다.
오늘은 은혜언약에 대해 배울 것이다. 언약이라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언약이다. 하지만 ‘토타 스크립투라’를 통해 배우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언약에 대해 오해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고대근동사회’, 즉 모세오경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문화의 차이.
그러나 언약이라는 개념을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분명하고 선명하게 이해했다. 우리는 언약 이라고 하면 흔히 약속 정도를 떠올리지만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의미이다. 우리가 ‘언약’을 기억할 때, 언약을 ‘맺는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히브리인들은 ‘언약’을 기억할 때 ‘자른다'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영어로는 CUT. 칼로 자르는 것이다. 왜 언약을 자른다고 표현했을까? 오늘날 우리는 계약을 할 때는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문서 종이와 사인할 수 있는 볼펜 혹은 도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언약을 맺을 때, 계약이나 약속을 할 때에는 동물이 필요했다.
그러면 동물이 어떤 역할을 했을까? 내가 경희와 계약을 맺는다고 하면, 동물을 절반으로 자른다. 절반을 가른 이후에 계약을 맺는 두 당사자가 반으로 가른 동물 사이를 지나간다. 이 행위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내가 당신과 맺은 언약을 어길 시에 눈 앞의 짐승꼴을 당해도 좋다는 것이다. 아주 피가 낭자하고 잔혹한 계약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을 ‘자른다' 라고 표현했다. 이 사람들에게 언약이라는 것이 이처럼 내 생명을 담보로 하는 매우 중요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언약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가 일반적으로는 서로 동등한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우리나라처럼 갑과 을의 관계로 언약을 맺는 경우들이 고대근동 사회에서도 있었다. 큰 강대국이 작은 나라와 언약을 맺는다. 이를 가리켜 종주권 언약이라고 한다. 종주권 언약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내가 가진 힘으로 너를 지켜줄게, 보호해 줄게!” 그러면 약소국은 강대국에게 무얼 약속할까? “조공을 바치고 당신의 모든 명령에 충성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계약은 잘 유지된다. 그런데 이 약소국이 눈치를 슬슬 보다가 다른 더 강해보이는 나라 쪽에 붙는다? 그러면 이 계약은 파기 된다. 그것은 반역이고 전쟁이다. 당장이라도 먼저 언약을 맺었던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해서 멸망시켜도 이것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 바로 이런 성격이다. 지난 시간에 생각해봤지만 창세기 12장 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할게! 대신 너는 나에게 충성하라" 라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 한분만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을 맺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갑과 을이 있을 때, 을은 돌봄을 필요로 하니까 갑에게 찾아가서 나를 좀 지켜달라! 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슈퍼갑이신 하나님께서 슈퍼 을인 사람에게 오셔서 먼저 계약을 맺어주신다. 하나님이 먼저 맺어주셨다. 행위언약, 은혜언약 우리 편에서 말이 어렵지만, 언약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우리가 이해하게 된다면 복음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제 20문을 보라.
20문.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함의 상태에서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답. 자신의 순전히 선한 기뻐하심으로 모든 영원으로부터 어떤 자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비참함의 상태로부터 건져내시고, 그들을 구속자에 의한 구원의 상태로 이끄시기 위하여 은혜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교재 2번을 보라. “영생으로 택하셨다"고 한다. 선택과 예정이라는 문제가 나오면 사람들은 넘어지는 경우들이 있다. “아니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는거지, 하나님이 무슨 선택을 하셨냐" 라고 한다. 7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배웠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셨다. 작정 중에서도 사람과 천사 같이 이성적인 피조물에 대해 계획하신 것을 예정이라고 했다.
예정에서 택하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언제 택하셨느냐, 교재 2번의 B를 보면 택함의 시점을 가리켜 “모든 영원으로부터" 라고 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논리적 사고력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렇다. 인간이 범죄를 하자 하나님께서 “아이고 이 녀석들 사고쳤구나, 어떻게 해야 이녀석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고가 벌어지고 나서 추후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신 것이 구원과 선택과 예정이라는 말을 쓰기가 쉽다. 우리 편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 하나님은 전지하시니까. 모든 것들을 다 아시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택하심은 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임시방편으로 세우신 긴급처방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흔히 “영원 전에" 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다. 차라리 “창세 전”이라고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통해 시간을 만드시기 이전의 때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지만, 영원이라는 개념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기 때문에, 영원 전이라는 개념도 없고 영원 후라는 개념도 없다. 단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원 전에" 라고 표현하지만, 정확한 의미로는 “모든 영원으로부터" 라는 표현이 더 합당하다.
B의 3번을 함께 읽어보자. “영원은 과거 어느 시점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지배하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유한한 우리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 이러한 우리의 시각으로,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서 예정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시점을 과거 어느 시점으로 생각한다. 창세 전. 몇천년 전. 그러나 영원이라는 말은 전도 없고 후도 없고 지금도 없다. 영원 이라는 말 자체가 가진 의미가 이렇다. 따라서 ‘영원’이라는 말은 인간이 사전적으로 정의할 수는 있어도,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그 의미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잡아낼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영원으로부터 어떤 자들을 택하셨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시간개념에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라. 따라서 만약 에덴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구원하고 가인을 버릴지를 결정하셨다고 한다면, 결국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나님 탓을 해버린다. 인간의 편에서 논리적인 원인을 생각할 때, 가인이 그렇게 악한 문명을 이루고 불경건한 자식들을 낳고 그런 악한 길을 걸어간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은혜를 거두셨기 때문, 곧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가인의 범죄, 그가 악한 마음을 먹는 것, 그의 인생의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과거, 현재, 미래 전체의 시간 속에서 그가 행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개념 속에서 그를 선택하거나 유기하셨다는 것이다. 단순히 창세 전에 선택 혹은 유기하셨기 때문에 가인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운명론이나 결정론, 하나님이 버렸으니까 그는 버려진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성경 전체에서 발견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학자들은 “모든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설명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모든 불신자들의 멸망은 하나님 탓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책임을 각 사람에게 물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체 성경의 요점이다. 물론 예정의 영역은 우리의 이해와 상식 가운데 “1+1=2” 처럼 딱 공식처럼 맞아떨어지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에, 또한 유한한 우리는 영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정도로 밖에 설명할 수 없겠다.
이제 교재 3번을 보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택하시는데 자신의 순전히 선한 기뻐하심 가운데 선택하셨다고 한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택하시고 어떤 사람을 버리시기로 결정하셨나?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오직 단 한가지 이유.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순전한 선한 기뻐하심" 이게 하나님의 이유이다. “순전한" 이라고 말한다. 이는 100%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간 편에서의 선행이나 기준이나 조건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먼 훗날 아벨이 하나님을 믿을 것을 아시고 그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니까. 아시고 선택하셨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예지예정” 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충분히 헷갈릴 수 있는 개념인데 매우 중요하니 잘 이해해야 한다. 아벨이 어떤 사람이 될 지를 미리 아시고 그를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아벨의 믿음이다. 이미 그가 가지고 있던 믿음, 복음 앞에 잘 엎드려질만한 그의 성향, 그의 기질 등이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아벨과는 달리 하나님을 떠날 것을 아셔서, 복음 앞에 엎드려지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버리기로 결정하셨다고 한다면,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는 좋은 설명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오직 “하나님의 순전히 선하신 기뻐하심”이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공로가 결국 구원의 기준이 되어버린다고 가르치는 격이 된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100%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각 사람을 예정하셨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본다면, 모든 인간들은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모든 영원 가운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살피시며, 어떠한 죄도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으며,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그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으랴. 진퇴양난이다. 어찌 해야 할 지를 알지 못한다. 지금 비참한 상태로부터 도망을 쳐야 하는데 출구가 없다.
4번을 보라. 인간의 딜레마는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건져내시고 구속자에 의한 구원의 상태로 이끄시기 위하여" 라고 설명한다. 여러분 상상해보라. 백두산이 10분 뒤에 폭팔한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은가? “아! 내 방에 최근에 샀던 한정판 굿즈가 있는데 그거 빨리 가서 챙겨야지!”, “내 여자친구가 써줬던 수많은 편지들을 모아두었던 박스가 있는데, 그거 챙겨가야지!”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챙겨야 할 것들이 생각난다면, 아직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눈 앞에서 화산이 폭팔한다면, 어디로 도망할 수 있으랴? 이런게 인간의 딜레마라는 것이다. 스스로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죄인은 죄와 비참의 상태의 상태에서 스스로 건져낼 수가 없다. 내가 어떤 것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이런 상태를 가리켜 성경은 뭐라고 설명하는가? 엡2:1 말씀에 “허물로 죽었다" 라고 표현한다. 이미 죽었다. 내가 치명상을 입었지만 아직 살아있다면,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손을 쓸 수 있을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었다. 숨이 끊어졌다. 온 몸이 썩고 부패하여 벌레들이 살을 파먹고, 뼈는 말라 비틀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내 생명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외부로부터 임하는 구속자가 필요하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헬기가 날라와서 줄을 내려 우리를 들어 올리지 않는 한, UFO가 나타나서 우리를 광선으로 쏴서 들어올리는 것 같은, 외부로부터 임하는 건져내는 은혜가 있지 않는 한 우리에겐 소망이 없다. 구주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구속자에 의한 구원의 상태로, 우리 자신의 능력, 의지,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를 통해 구원하신다.
이것이 5번의 내용이다. 은혜언약을 맺으셨다. A 언약을 읽어보자.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사 서로 동등한 언약의 관계까지 내려오셨고, 이를 통해 피조물의 순종에 대해 축복과 상급을 맹세하셨다. 창15장을 펴보라. 아브라함이 포로로 사로잡혀간 롯을 구출해내는 장면은 연합국간의 전쟁통 속이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은 늘 두려웠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적국이 연합하여 그를 치러 올 수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창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의 배경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아들을 약속하시고, 말로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확증까지 해 주신다.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에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겨주셨다. 아브라함은 한가지를 요구한다. 창15: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언약에 대한 확증을 달라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뭘 하시는가?
창15:9-11 를 보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우리는 이 일들의 의미를 모르지만 아브라함은 분명히 알았다. 이는 당시 사용하던 언약식이었으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어주시는 것이다. 아브람이 짐승들을 쪼갤 때 솔개가 그 사체를 먹기 위해 주변을 날라다니니 그를 내쫓기 위해 부지런히 훠이훠이 했겠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잠을 주시면서 또한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는데, 창15:13-1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들을 주셨다. 그리고 17절에서 등장하는 화로가 하나님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화로가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그리고 창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지금 이 장면이 언약을 맺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잠을 자는 동안에, 타는 횃불이 담겨 있는 화로가 아브라함이 쪼개놓은 고기 사이로 지나가며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라. 언약이라는 것은 두 당사자가 같이 지나가야 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하나님과 아브라함 둘이 함께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야 맞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환상 가운데 본 언약식에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횃불만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다. 하나님 혼자 지나가시는 언약이 된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동등한 조건에서 맺는다면 그는 지킬 능력이 없다. 못 지킨다. 번번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지나가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은혜언약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혼자 지나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맹세이다. “내가 너에게 이 약속대로 안하면 내가 하나님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아주 선명하게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신 것이다.
우리가 앞서 행위언약에 대해 배웠었다. 아담과 맺으신 언약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행위언약의 조건은 순종이었다. 아담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당시에는 있었다. 죄를 짓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행위언약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순종이라는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너 선악과 먹지마! 그럼 내가 상을 줄게!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너는 죽어. 아담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언약.
그러나 5번의 C를 보라. 우리가 앞서 다 살폈었던 주제들이지만, 비록 아담이 순종을 통해 상급을 받았더라도, 그 언약 자체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인간 세상에서는 A=B라는 공식이 성립이 되려면, A 의 가치와 B의 가치는 얼추 비슷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면, 아담은 하나님께 영생에 걸맞는 뭔가를 드렸어야 맞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아담이라 할지라도 영생에 걸맞는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비록 단어로는 행위언약이라는 것을 붙였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과 하나님이 동등한 조건으로 맺는 행위언약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은혜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은혜언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은혜언약은 D를 보면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구원을 획득하고 적용하시겠다고 택하신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인데, 이 언약의 조건은 너희가 잘하면 너희가 뭘하면.. 이런 조건이 아니다. 이미 죄로 부패한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D의 설명을 보면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구원을 획득하고 적용하시겠다고 택자들과 언약을 맺으셨다”고 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죄인들 가운데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택하신 자들은, 그들을 구원하실 때 그들의 언약 조건에 대한 순종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결코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성부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들의 대표(머리)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순종과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얻으신 의를 저들의 의로 인정하시고, 적용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택자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으로 획득하신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이어서 G를 함께 읽어보자. “은혜언약은 이성과 감정 모든 것들이 부패한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의무를 먼저 알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에, 성령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알고 믿도록,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와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포함한다" 죄로 부패한 죄인들은 대책이 없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죄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셨다. 구원을 주셨는데도 그 구원이 구원인줄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구속의 의를 적용해 주시기 위해, 성령님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확신 가운데 거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은혜언약이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인간론의 최종 정리이다. 첫째,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걸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 3번에서 봤던 것처럼, 다른 이유는 없다. 둘째, 사랑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에 대하여 우리를 심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 언약 안에서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것이다. 셋째,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천국에서 드러날 신비라는 점이다. 세상에서 지금까지 칼빈이나 스펄전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라던지 탁월한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많이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들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완벽하게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의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이는 우리가 유한하기 때문에. 그러나 장차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그 날에는 모든 것들을 다 깨닫게 될 것이다.
적용을 보라. 예정론은 일차적으로 전도적 교리가 아니라 목회적인 교리이다. 이는 우선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예수 믿고나서 보니까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정하고 내가 결심한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모든 것이 태초이전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고, 모든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결정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이 왜 나같은 사람을 살리셨을까, 왜 나같은 사람을 택하셨을까, 이런 감사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된다. 이것이 예정론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다. 하나님이 쟤는 왜 버리고 나는 선택하셨나? 하나님은 왜 나는 버리고 쟤는 선택하셨나를 따지며 불만을 품는 것은 예정론을 잘못 배운 것이고, 더 나아가 이는 교만한 태도이다.
둘째, 전도의 동기와 동력으로서 예정론이 중요하다. 불신가정을 위해, 불신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그리고 전도할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한 구절만 읽어보고 마치자. 행18:9-10 을 찾아보자. 고린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반응이 없자 돌아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던 것 같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내 백성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고린도에 많다는 것이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캐리가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인도로 선교여행을 간다. 이때 윌리엄 캐리가 은혜를 많이 받아 연세가 지긋한 목사님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죽어가는 많은 인도 영혼들을 위해 선교를 해야 한다"이때 유명했던 선배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젊은이, 흥분하지 말고 앉아.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면 알아서 다 구원하시니까 자네가 설치지 않아도 다 돼" 이 견해를 가리켜 하이퍼칼빈주의라고 한다. 초칼빈주의. 지나친 칼빈주의. 이단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많기 때문에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전도하라!”
여러분들 주변을 둘러보라. 여전히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수많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또한 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수많은 겉으로만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지 알 수 없다.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가서 전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그분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이 일에 여러분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