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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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 2:17-18(신약 189쪽)
설교제목: 성령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에요. 어떤 일을 할 때, 계획을 충실히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해나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러다 보니 계획을 꽤 정밀하게 꼼꼼하게 세우고자 노력합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에서 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여실히 들어난 일이 있었는데요. 전도사님이 오기 전까지 제가 청소년부를 담당했는데요.
코로나 상황이 조금 잠잠해 질 무렵에 그 동안 야외 활동을 못했으니, 야외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을 계획해보자고 의견이 나왔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놓고 논의를 하는데요. 저는 비가 오면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야 한다고 얘기를 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저의 모습을 선생님들이 당황하셨다고 해요.
제 기준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너무 생각이 많다고 느낀 것 같아요. 그러한 저의 모습에 관하여 담임목사님이 일찍이 눈여겨 보시고 저에게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러한 성향이 지금의 저를 여기까지 인도해왔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목회가 참 힘들 거라고요. 사실은 담임목사님 본인도 그러한 성향이 있었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벗어나는 일을 통해서 더 많은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요.
그런데 제가 그것을 큰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은 이제껏 그렇게 일을 잘 해왔고, 그것이 일을 어째든 안전하고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어요. 그러한 저의 성향이 신앙적인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말이지요. 아마 작년으로 기억하는데요. 교회에서 한 달 동안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했었어요. 기억하시죠? 그 기도를 하면서 저는 좀 염려되었던 것이 정말로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하는 거였어요.
그러니깐 새벽 1시에서 새벽기도 전인 새벽 5시까지 기도를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이것이 좀 무모한 계획이나 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담임목사님이 이러한 무리수를 두는지 사실은 당시에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기억하시죠? 그 릴레이 기도가 거의 빈 시간 없이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요. 그 기도회가 끝나고서 담임목사님이 그 기도회의 취지를 얘기주셨어요.
당시에 코로나 상황이 정리가 되고 이제 공동체도 새롭게 구성을 하고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데, 그간 코로나로 모임도 활성화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서 모임 자체의 활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요. 또 동역장 분들도 그 사역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고요. 그래서 이에 대한 변화가 필요했다고 담임목사님이 생각하셨어요. 그 일환으로 릴레이 기도를 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우리가 영적 각성을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이것은 모험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뜻대로 되면 좋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일은 공동체에 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러한 방법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그러셨어요. 물론 실패의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교훈도 있다고 그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영적 각성을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지성을 뛰어넘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 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완벽주의적 성향이 어떻게 신앙 안에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어요. 저는 저의 지성과 저의 경험 안에서 판단하고 있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으니 사실은 교회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전혀 신앙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넘어 역사하시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온전히 그 분께 내어 맡긴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물론 기대한 방향대로 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실패도 우리에게 분명 성령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좋은 잣대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저의 완벽주의적 성향은 성령 하나님을 믿지도 못했고 그 분의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는 결과를 낳고 있었어요. 그로부터 저는 성령 하나님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어요. 그것이 제가 이번 주일부터 성령 하나님을 나누고자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제가 이를 놓고 여러 권의 책을 읽고 공부를 했는데,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참 많아요. 그러다보니 공부한 내용 중에서 참 좋은 부분이 있었는데 주일에 미쳐 나누지 못하는 상황이 생겼어요.
그래서 오늘 주일예배에서 미쳐 나누지 못하는 성령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을 간략하게 나누려고 해요. 그것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사역을 이해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도 하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과 관련이 있어요.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볼게요.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가 설교하는 내용인데요. 특별히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구약성경 요엘 2장 28절 이하의 내용을 인용해서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과적으로 성령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임하신다는 이야기예요.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특별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인 거예요.
왜냐하면, 고대 사회는 가부장적이고 계급이 나뉘던 세상이었는데요.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서 성령 하나님은 남여노소 관계없이 또 종에게도 역사하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어요. 당시 사회에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지던 여성에게 또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종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이전까지 이와 같은 역사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 왕이나 제사장 또는 예언자 같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어요. 그것이 이제는 각 사람에 임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하는데요. 조선시대에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 곧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또는 한글이 보급되기 전까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양반이라는 특수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었어요. 그것이 한글의 보급과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지요.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 시작했어요.
오늘 사도 베드로가 인용한 구약성경 요엘서의 말씀이 바로 그와 같은 혁명과 변화에 관한 이야기에요. 다시 말해 성령 하나님을 통해 거듭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는 거예요. 그 공동체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그 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 또한 알게 되는 것있어요. 하나님의 백성된 공동체는 소외받는 사람이 없으며, 모두가 존중받는 공동체라는 거예요. 모두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이는 세상의 방식과 너무나 다른 공동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어요. 오늘날 세상은 어떤가요? 어린 아이들은 빨리 나이를 먹고 싶어하고 노인들은 세월을 늦추고 싶어해요. 그 중간 청년이나 장년에 해당할 그 중간이 사회적 황금기이고 그 밖에 있는 삶은 소외되어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죽음에 이르는 그룹이 바로 이들이기도 해요. 청소년과 노인들의 죽음이 부끄럽게도 전세계에서 1등을 차지한다는 얘기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늘 우리 사회 또는 이 세상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령 하나님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공동체는 모두가 존중받고 소외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오늘 말씀을 깨닫게 해줘요.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 교회가 또 신앙공동체가 목표해야할 일이기도 해요.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소외를 경험하기도 해요. 그것은 모두의 목소리의 힘과 크기가 같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분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지요. 아마 세상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이를 가능케하고 이룰 수 있게 될 거예요. 다만, 우리가 이에 관해서 상호존중이라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어리다고 또는 나이가 많다고 혹은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개성과 색깔을 단일화해서는 곤란하다는 거예요.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공동체는 아닐 수 있어요. 어쩌면 그것은 서로의 자기비움과 배려를 통해 이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나의 목소를 크게 내기 보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에 집중하는 일들이 참으로 중요해요.
바라건데 저는 오늘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인 성령 안에서 하나되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귀 기울이므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귀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