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이야기-삼위일체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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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 1장 9-11절(신약 52쪽)
설교제목: 기독교교리 이야기-삼위일체 하나님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번 주간부터 담임목사님의 안식월이 시작됩니다. 이는 약 한 달 정도의 기간을 통해 담임목사님이 쉼과 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될 텐데요. 바라건대 편안하고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덧붙여서 저를 포함해서 교직원들이 담임목사님의 빈자리를 감당하게 될 텐데요. 그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또 맡겨진 사역에 충성되게 헌신토록 이를 위해서도 같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깐 저를 주목해서 봐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제가 맡은 예배 시간에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저처럼 이렇게 활짝 미소를 지으시고요. 옆에 있는 분과 웃으며 인사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서로 인사 나누고
사실 저도 내향적인 편이라 예배 시간에 이러는 것을 좀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아시겠지만, 제가 자타가 공인하는 재미가 없는 사람인데요. 아니 좀 좋게 말하면, 진지한 사람이라서요. 제가 인도하는 예배 시간이 대체로 진지한 분위기일 것 같아요. 또 설교도 그에 못지않을 것 같고요. 이미 오늘 설교 제목부터 그런 느낌이 팍팍 풍기지 않습니까? ‘교리’,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니 이 무슨 가슴 답답해지는 일입니까?
그렇지만 우리 성도 분들께서 앞으로 저와 약 한 달 동안은 이렇게 수요일과 주일에 저와 마주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뭐 한 달에 한 번이면 몰라도 한 달 내내 이런 분위기에서 예배를 드리면 우리 성도 분들께서 얼마나 팍팍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방학이 있어서 한 달 쉬고 보자고 할 수도 없고요. 혹시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었냐고 생각하시면서 없는 방학은 만들지 마시고요. 또 제가 재밌는 얘기를 하면, 그걸 우리 성도 분들께서 과연 재밌게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이상하게 여기실지 몰라도 저는 오늘 우리나 나눌 주제가 참으로 재밌다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 나름으로는 특단의 조치로 적어도 예배 중에 한번은 그 엄중한 분위기를 벗어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어색하더라도 또 억지로라도 한번은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보면 어떨까 했습니다. 예전에 듣기로 우리가 억지로 웃어도 그것이 ‘엔돌핀’이라는 우리의 몸에 좋은 호르몬을 발생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처럼 내향적이라서 마음이 좀 어려우시더라도 자신을 위해서 또 같이 예배드리는 분들을 위해 기꺼이 제 말을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한번 설교를 시작할 때는 미소 짓고 웃으며 예배하면 좋겠습니다.
한편, 저는 제가 맡은 예배의 시간을 통해 특별히 설교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지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데요. 먼저 수요예배는 오늘처럼 기독교교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오전예배에서는 오는 주일이 성령강림절이기도 해서, 절기에 해당하는 ‘성령’을 주제로 연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혹시 우리 성도 분들은 벌써 가슴이 답답해지시나요? 저는 반대로 가슴이 뜁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를 재밌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다만, 혼자서 즐겁고 혼자서 신나서 얘기하는 것은 설교는 아니까요. 어떻게 이 재밌는 이야기를 같이 나누면 좋을지를 고민합니다. 사실 과거부터 이러한 고민은 계속했지만, 생각보다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저는 자타가 공인하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또 저처럼 이 이야기를 좋아하실 분도 있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특별히 오늘 나눌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또 우리는 그 믿음을 바탕으로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는 일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좀 더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면 본격적인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들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게 사실일까 싶긴 한데요. 한번 들어보세요. 몇 해 전 책을 내고 삼위일체를 연구하는 어떤 신학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유학하던 시절에 친척들이 해외 여행차 그가 유학 생활하던 집에 방문했던 때를 이야기합니다. 그때 두 명의 조카의 인상적인 기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둘 중 하나는 교회를 다녔고 다른 하나는 성당을 다녔습니다. 둘은 당시 모두 다섯 살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권유로 두 명의 조카 중 하나가 저녁 식사 기도를 했습니다. 참고로 그는 교회에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조카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 먹고 힘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될게요. 그리고 음식을 준비한 손길도 축복해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렇게 기도한 조카에게 어른들이 기도 잘한다고 칭찬하니깐, 성당 다니는 조카도 이에 질세라 자기도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내일 하라고 겨우 달래고서 다음 날 아침 식사 기도를 그 성당 다니는 아이가 하게 됐습니다. 그 아이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성당 다니는 조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은총 아뢰시는 성자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는 이 음식을 축복하시고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을 축복해 주세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정말 다섯 살 어린이가 이렇게 진짜 이렇게 기도했을지는 저는 의문들었지만, 그 신학자는 이 조카의 기도를 들으면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신학자는 개신교인이면서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연구하는 이였는데, 교회 다니는 조카와 성당 다니는 조카의 기도가 매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아이들은 교회에서 또는 성당에서 그렇게 교육받고 또는 그것에 익숙하게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아이들의 기도가 우리 어른들의 신앙생활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면, 우리는 이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도 성당도 모두 같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앞선 기도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정말 같은 하나님을 믿는지 생각 봐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방금 이야기에서 성당 다니는 아이의 기도가 다소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습니까? 대체로 우리 개신교에 속한 이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주로 성부 하나님을 향해서만 기도하고 있음을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면 기도하는 것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만 놓고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생각지 않거나, 편향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듯합니다.
오해하시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성당이 교회보다 낫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이러한 점을 놓치곤 합니다. 앞서 말한 기도의 경우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기독교가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고 오해하거나 오해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독교는 유일신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또 왜 우리는 그것을 때때로 오해하거나 오해받음으로 신앙생활 가운데 온전히 나타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가 가진 큰 문제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다시 한번 봐주십시오. (세 손가락을 펴고) 손가락이 몇 개입니까? 세 개이지요. 그러면 (한 손가락을 펴고) 이것은 몇 개입니까? 한 개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같은 것입니까? 분명 같지 않습니다. 만약 같다고 하시는 분이 옆에 계시면 잘 돌봐주시길 바랍니다. 바로 삼위일체에는 이러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셋을 하나라고 하고 하나를 셋이라고 하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시길 바랍니다. 먼저 네모난 삼각형을 그려 봅시다. 어떻게 잘 그려지십니까? 그럼 이번엔 동그란 삼각형을 그려 봅시다. 그릴 수 있습니까? 혹시 주변에서 ‘나는 그렸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면 옆에서 잘 돌봐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이것은 그릴 수 없습니다.
애초에 틀린 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삼각형은 네모나지 않습니다. 또 삼각형은 동그랗지도 않습니다. 삼각형은 세모나서 삼각형이라고 부릅니다. 네모난 것은 사각형이고 동그란 것은 원입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도 이러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은 나름대로 이를 설명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것에 따른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먼저는 물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물은 액체 상태로도 있지만, 얼음이라는 고체 상태로도 있을 수 있고, 수증기라는 기체 상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을 물이 보여줄 수 있지만 그것은 모두 다름 아닌 물 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분 하나님이시지만, 태초에 창조하시는 성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또 이 땅 가운데는 성자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며, 오늘날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각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임재하시지만, 모두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어떻습니까? 꽤 괜찮은 설명이지 않습니까? 저도 이 설명이 이해하기도 전달하기도 쉬워서 과거에 종종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이것은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적 사상으로 규정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흔히 ‘양태론’이라고 부르는데요.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어떤 때는 성부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성자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성령의 모습으로 자신의 모양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온전한 설명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하나님이 세 위격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이는 한 하나님이 모양 또는 양태를 바꿔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세 개의 분리된 위격이라는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이 위격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어째든 이런 이유로 앞서 말한 설명은 기독교 역사에서 ‘양태론’에 따른 이단적 사상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 선배들의 노력은 그치지 않고 또 새로운 방식의 설명을 찾아내기에 이릅니다. 이는 앞서 문제가 되었던 양태론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달걀에 비유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지만, 달걀은 세 개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달걀을 삶아보면 이 구조가 더 선명하게 들어오는데요. 먼저 달걀 바깥은 껍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달걀 안쪽은 흰자와 노른자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달걀은 세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하나의 달걀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각각의 세 위격으로 나뉘어지지만, 이 세 위격은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달걀의 각 부위가 모두 합쳐져 하나를 이루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합쳐져 한 분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역시도 괜찮은 설명이지 않습니까? 분명 이건 앞서 물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과는 다릅니다. 모양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세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태론의 문제를 피해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종종 이렇게 변형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태양에 비유해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태양 또는 해라면 성자 예수님은 그 태양에서 뻗어 나오는 빛과 같고 성령 하나님은 그 태양에서 뻗어 나오는 열과 같습니다. 태양이 빛과 열을 통해 한 몸을 이루듯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한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에 관한 설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이 역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삼신론’이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니깐 신이 세 명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에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위격을 지닌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이 역시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관해 꽤 전문가적 식견을 가진 20세기의 현대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의 말입니다. 그는 삼위일체를 이렇게 말합니다. “삼위일체는 신비이다.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게 만들 수도 없다.”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우리는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건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논리적인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셋을 하나라 하나를 셋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동그랗고 네모난 삼각형을 그릴 수 없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흔히 ‘신비’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무스테리온이라는 헬라어로 쓰여진 것인데, 이 말에서 영어 ‘미스테리’가 나왔습니다. 본래의 뜻은 ‘감춰진 것’입니다. 이 반대말은 ‘계시’입니다. 그러니깐 ‘신비’는 ‘계시’로 알려지기까지 우리에게 감춰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신비에 관해 계시하여 주실 때까지 이를 알 수 없습니다.
인내심이 좋은 분들이라도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날지 모릅니다. 아니 대체 말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라는 것은 왜 만들었는지 하고 말입니다. 이건 분명 할 일 없는 신학자가 책상에서 만들어낸 탁상공론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 생각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공부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이건 탁상 공론 같은 교리가 아니라, 굉장히 피부로 와닿는 현장에서 경험한 생생한 하나님의 체험을 담은 교리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말씀이 그렇기도 합니다. 다시 오늘 성경본문말씀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1장 9절에 11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앞두고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구절 속에서는 뚜렷하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말은 없지만,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로 그려지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모습이 내려옴을 그립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입니다.
또한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우리가 믿고 지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 자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진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로마제국이 유대 땅을 식민지로 삼고서도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자치권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참고로 그것이 산헤드린 공의회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일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때부터 믿었던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다른 신을 믿는 것 같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는 하나님으로 믿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 중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생겨났고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그간 믿어왔던 하나님에 관한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하나님을 예수님으로 인해 전혀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초대 기독교회가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정립한 교리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탁상공론에 불과한 교리였다면, 이것보다 더 세련된 교리를 더 이해하기 쉽고 설명하기 쉬운 교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만들어서 대체 어떻게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초대 교회가 경험한 하나님은 비록 말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지만, 분명히 우리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분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과 고백을 지켜나가는 일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우선은 유대인들의 뿌리였던 유대교로부터 배척을 받는 일이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는 세상의 비웃음을 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고 따를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거나 내 버릴 수 없었습니다. 기꺼이 세상의 조롱과 비웃음에도 이 진리를 수호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가 불만족스럽고 이상하게 여겨지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 그 어떤 종교와도 다른 기독교의 신 곧 하나님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또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참으로 사람이 만든 종교가 아님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우리 임재하신다는 확고한 경험과 믿음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생겨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또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은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기에 하나님은 참으로 신 입니다.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신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며, 우리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역사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교리에 관하여 이 시대에 영향력 있던 목회자이고 신학자이며 시인이었던 이제는 고인된 유진 피터슨의 말을 잘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가 셋과 같다거나 셋이 하나와 같다는 식의 숫자놀음으로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는 산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우리가 응답하는 것을 배우는 방식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로 측량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신비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경험되어지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로 인해 경탄하고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이 오늘 우리의 예배이고 이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배우는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대 오늘 우리에게 이 놀랍고 신비한 주님을 경험하는 은혜가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