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이유, 믿음 사랑 소망(골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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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교회와 성도의 최고 감사 제목은 복음의 열매입니다.
<서론>
골로새교회는 로마옥중에서 바울을 섬겼던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에바브라에 의하여 개척되었습니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에바브라가 보고한 골로새교회의 형편을 듣고 쓴 옥중서신서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통하여 이방인 출신들의 교회였던 골로새 성도들의 신앙을 칭찬하면서도, 교회를 위협하는 「유대율법주의 유대신비주의 천사숭배 이교적인 습성들을 주의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의 처음이시자 으뜸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충분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1:1~8의 내용은 ‘인사와 감사’입니다. 이 시간 인사와 감사를 앞뒤 분에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인사, 어떤 감사를 하셨습니까?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골로새 교회에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합니다(1, 2절).
그리고 골로새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3절).
바울이 감사의 이유는, 골로새교회에 있는‘믿음과 사랑과 사랑’때문이었습니다(4, 5절).
이 ‘믿음 과 사랑과 소망’은 사랑의 종 에바브라가 전한 복음의 열매입니다(6~8절)
이 시간, 바울이 말한 감사의 이유;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본론>
1. 교회와 성도의 진정한 감사는 복음의 열매;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3-6).
본문은 먼저, 교회와 성도의 진정한 감사는 복음의 열매; 믿음 사랑 소망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 3절에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드린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고 가르쳤던 바울은(살전 5: 18), 본문을 통하여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기초’를 말합니다.
감사의 출발점은 가지고 있는 재화나 현실적으로 누리는 혜택이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해서 사랑, 그 믿음과 사랑이 주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선한 목자되신 주님께서 가장 최선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는 주님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미래를 소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라”(4, 5절)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3년 우리 교회의 표어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3의 (함께 외치겠습니다)‘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왜 우리교회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할까요?
왜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 사랑 소망’이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이것이 복음의 열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맺어야 하는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믿음에 수반되는 일이나 수고입니다.
바울의 첫 번째 감사의 이유는 ‘믿음’이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고 합니다.
이는 원어적으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삶의 중심이 이미 예수에게로 기울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이미 머물러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단순히 예수에 대한 지적인 믿음이나 교리를 외우는 정도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안에서 『움직이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비록 골로새는 주변의 라오디게아와 같이 부유하고 발달하지 못한 퇴락한 도시였지만(개요서), 주 님 안에 믿음의 터를 굳게 세우고 살아가는 골로새 교인들은 『충분한 감사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자신의 환경과 여건을 뛰어넘어, 믿음 때문에 주님과 교회를 위해 땀 흘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믿음을 위해 기꺼이 수고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이것저것 봉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저런 손길이 필요하다고 말만하지 말고,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열매; 믿음의 열매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지는 짐입니다.
바울이 감사한 두 번째 이유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은 원어적으로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골로새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아가페 (ἀγάπη)’였습니다. 아가페는 원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물론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골로새교인들의 사랑이 ‘하나님 사랑처럼 완벽한 사랑이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인들의 사랑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경험한 사랑이고, 지금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서,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재로 당시 골로새는 두 번의 큰 지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골로새교회는 이러한 어려움을 (초대교회처럼)‘아름다운 사랑의 나눔’으로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이러한 이웃에 대한 실천적인 사랑의 나눔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술로 사랑을 말하면서 ‘수고하기를 거부하는 가짜 사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진짜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열매; ‘사랑’은 ‘수고’를 동반합니다. ‘사랑의 수고’는 교회와 이웃을 위해 일하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기쁨으로 닦아냅니다. 이런 ‘사랑의 수고’를 우리 열방교회가 하기를 원합니다.
‘소망의 인내’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의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처럼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쓰지 않고, 데살로니가전서와 골로새서에서는 ‘믿음 사랑 소망’이라고 씁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의 시간적 관계’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미 경험한 과거 시제이고,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누리고 나누며 살게 하고, 이 믿음과 사랑은 미래의 ‘하늘나라 소망’을 품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고, 그 날 우리의 모든 수고는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 다 보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있는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누리고 있는 ‘구원의 미래적 선취(先取)’입니다. 비록 지금은 바라보고만 있지만, 하늘나라에 쌓아둔 보화를 미리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런 ‘미래에 이루질 천국의 영광스런 삶’을 ‘현재의 소망’으로 이 땅에서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인내’를 이끌어 냅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망하지만, 미래를 소유한 사람은 결코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포기하지 않는‘소망의 인내’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가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공동체도 부럽지 않는 이토록 아름답고 소중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열방의 모든 가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전령이 되어야합니다(7-8).
두 번째로, 본문은 우리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전령이 되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본문 7절과 8절은 특별한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사람은,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에바브라입니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듣게 된 데는 그 지역 출신으로(4:12), 바울의 전도를 통해 먼저 예수를 믿게 된 ‘에바브라’라는 신실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에바브라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는 골로새서(1:7; 4:12)와 빌레몬서(1:23)에 그 이름이 언급되지만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인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름 외엔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은 에바브라에 대한 바울의(7절) 묘사는 그가 바울의 사역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쉽게 짐작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에바브라를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라고 불렀습니다(7a).
뿐만 아니라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도 말합니다(7b).
에바브로가 골로새교회에게는 물론 사도바울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종’, ‘사랑하는 자’, ‘그리스의 신실한 일꾼’이라는 세 가지 별명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에 복음 전하는 일 뿐 아니라, 교회 성도들 서로 간에는 물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바울을 향한 성령 안에서 사랑의 수고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더구나 골로새서 4:12에 따르면,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도록 항상 애써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에바브라는 ‘사랑의 전령’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그는 골로새교회와 사도바울 등 동역자를 위한 ‘사랑의 전령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속에 다른 지체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마땅히 에바브라처럼 ‘사랑의 전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전주에 있는 금산교회에 「조덕삼」과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덕삼은 금산에서 장사를 해 큰 돈을 벌어 잘 사는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이자익은 남해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서 더부살이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자익은 열 두 살에 집을 나와 무작정 금산으로 갔는데, 금산에는 평야가 넓고 농사짓는 집이 많아서 머슴살이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조덕삼을 만나 그 집 마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테이트 선교사가 선교하던 중 조덕삼의 마방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날 조덕삼은 먼저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전주 금산교회는 조덕삼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성장해서 이렇게 <image 전주금산교회> 예배당까지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09년 교회에 난감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이유는 장로 후보가 조덕삼과 이자익이었는데, 이자익이 선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덕삼은 결과에 순복했습니다.
이후 조덕삼 자신도 장로가 되어서도 자기집 마부였던 이자익을 선배 장로로 섬기다가, 이자익의 신학 공부를 후원하여,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시며 변함없이 교회와 이자익목사를 잘 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덕삼장로의 섬김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복음의 열매; 믿음 사랑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믿음은 주님과 주님의 교회 더 나아가 성도를 향한 사랑이 되었고, 그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쌓아둘 소망을 갖게 하여 그 소망의 인내를 가져 왔습니다.
우리도 에바브라와 조덕삼 같은 ‘사랑의 전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별명이 ‘그리스도의 종’, ‘사랑하는 자’, ‘그리스의 신실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써 내려가는 삶의 편지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며, 우리가 이루어가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으로 제일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감사해야합니다. 가정 자녀 돈 건강 사업 직장...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복음의 열매’를 맺는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열방교회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기억되는 교회’가 되어 누구든 언제든 기도할 때 마다 감사의 기도가 나오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열방의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복음’을 전하는 사랑의 전령이 되고, 또한 ‘믿음 소망 사랑의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감사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