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2. 새벽예배. 이신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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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419장 - 사도신경 - 성경봉독

로마서

4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ㄱ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ㄴ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바른 지식은 성경 전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광스러운 빛이며, 이 지식이 없다면 성경은 봉인된 책에 불과할 것이다." 19세기 루터교 목사 C. F. W. 월터의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깨달았다는 것은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양자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월터의 말이 맞다면,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때로는 눈물도 흘릴 만큼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예요. 누구다 다 이렇게 해야합니다! 또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꺼려하시는 것들을 적절하게 피하는 삶을 나름 의지적으로 잘 감당하며 살아갑니다. 이것 또한 바람직한 것이며 결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단한 노력과 열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사실 많은 성도들이 나의 의지와 열심으로 결단한 바를 지켜가는 생활이 잘 유지되는 한 이전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의롭다고 여기실 거라는, 나를 더 사랑하실 거라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이런 생활에서 미끄러지고 실패하기라도 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나를 의롭다고 여기시지 않으며, 나는 더 이상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구요. 혹시 제가 방금 언급한 두 가지 태도가 나의 신앙생활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모습 중 하나, 여전히 버려내고 극복해야 할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율법적인 신앙생활이라 함은 내 구원과 신앙이 자신의 열심이나 경험 혹은 느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모든 것이 나 하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신앙생활은 아무리 큰 열심을 쏟는다 하더라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과 같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과 건강하지 않은 신앙생활, 아니 조금 더 세게 말해서 건강한 신앙생활과 위험한 신앙생활의 차이는 무엇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아까 언급하였듯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알고 구분할 수 있는것에서부터 나옵니다. 율법은 무엇이며, 복음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우리의 구원과 신앙에 있어서 율법이 무엇인지, 또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계속해서 6월 한 달 간 새벽설교를 통해 담임목사님께서 아주 자세하고 명쾌하게 짚어주실 것이니 저는 오늘 간단하게 정리만 하고 설교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율법을 요약하자면 이런 문장이 됩니다. “이렇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반면, 복음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되지요. “내가 너를 위해서 다 했다. 그러므로 너는 살 것이다” 율법의 특징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라면, 복음의 특징은 “내가 다 했고 다 이룰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어라”라고 하는 ‘약속’과 ‘격려’입니다. ‘모든 것이 내게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 율법이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행해야 할 내용이고, 복음은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입니다.
율법은 명령이며, 복음은 약속입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건강한 신앙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이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 위에 서서 신앙을 세워 가는 것과 복음의 반석 위에 신앙을 세워 나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차이를 살펴볼까요? 율법은 조건적 성격을 가집니다. ‘네가 만일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식이지요. 내가 무엇을 행하면 내가 무엇을 받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과 양심에 잘 부합합니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율법에 나타나 있는 행동과 결과에 대한 조건 논리, 원인과 결과를 관련짓는 인과론을 선호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관습과 체계는 이런 율법적인 윤리 원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할 때 자연스럽게 상벌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고, 기업체에서도 성과에 따른 보수, 즉 성과급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복음은 내 안에 아무런 원인이 없는데 내 안에 일어난 어떤 일입니다. 행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얻는 주체는 나라는 점에서 복음은 우리 본성인 인과율에 맞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양심을 거스르는 내용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이같은 내용을 언급합니다. 5절을 한 번 볼까요? 바울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어떻게 의롭게 여겨질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의롭다고 하실 수가 있을까요? 전혀 선한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선하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까? 7절도 한 번 봅시다. 바울이 선포하는 복은 어떠한 복입니까? 롬 4: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어떻게 내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법적인 행동이 용서를 받고 죄가 가려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울이 전하며 성경이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알려질 수 있고,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 3장까지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로워진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맞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단언했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증인으로 신청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1절). “다윗이 말한 바”(6절).이것은 아주 절묘한 한 수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큰 민족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시작되었다(창 12:1–3). 또한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그가 통치할 당시 이스라엘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그렇다면 바울과 유대인 중에 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의견에 일치할 것인가? 이것이 로마서 4장이 던지는 질문이다.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늘 본문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4장 전체에서 여겨진다는 말이 10번이 반복되는데요, 이는 헬라어로 로기조마이(logizdomai)라고 합니다. 당시에 회계 업무를 볼 때 쓰던 전문 용어로 “~로 치다, 어떤 사람의 정산에 포함시키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불의한 종의 비유 장부에 기입. 이재철 목사가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로기조마이λογίζομαι’는 ‘자기 계정으로 처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미국에서 여행 중에 있다고 하십시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 돈이 다 떨어졌는데 어쩌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미국에 있는 자신의 지인에게 가서 돈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러고서 바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아들이 오면 돈을 주되, 그 돈은 자신의 계정에서 제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이름으로 달아 놓으라는 것이며,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순종과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시다는 것을 믿는 데서 의로운 삶이 나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단지 믿음이 의를 낳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 자체로 의로운 것이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기에 합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이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 있다. 믿음이 의로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은 마치 아브라함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하나님이 대하신다는 의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롭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가 마치 의로운 것처럼 여기신다. 아브라함 자신은 의롭지도 완벽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마치 그런 것처럼 그를 대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죄로 물들고 불완전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받아 주신다.
바울이 4절에서 설명하듯이 우리의 의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든지 행위와는 무관하게 인정받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다. 누군가 돈을 받는다면 그것은 일한 대가로 받는 임금이거나 일과 무관한 선물일 것이다. 임금이 공짜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의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 선물이 아니라면 당신의 고용주가 당신에게 임금을 지불하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은 창세기 15장 6절을 포함한 성경 전체의 대의에 어긋난다. 구원받는 믿음이란“믿음은 순종과 같다”는 주장과 대조적으로 바울은 믿음이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베푸신 것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로마서 4장 5절은 구원받는 믿음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한 종류의 믿음이 끝나고• 다른 종류의 믿음이 시작되는 것첫째, 구원받은 사람은 일하지 않는다(5절).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율법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3:31). 다만 순종을 구원의 방편으로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순종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한 순종을 그만두는 사람이다!둘째, 구원받은 사람은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5절).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구원받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은 ‘신뢰하는 대상의 전환’을 의미한다.
구원받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저기 계신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하시는 길을 약속하실 때 그분을 믿는 것이다.당신은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사랑이시며 거룩하시다는 것을 매우 굳세게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을 몹시 경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자신의 종교적인 성취와 도덕적인 인격, 직업, 부모에 대한 공경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의롭게 하려고 할 수 있다.구원받는 믿음을 ‘신뢰하는 대상의 전환’이라고 하는 이유는 당신이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지 확인하고서, 당신이 바라고 신뢰하는 대상을 (일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것에서 구원자이신 하나님께로 옮겨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D. 제임스 케네디(D.James Kenndy)는 다른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보라고 제안한다.오늘 밤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선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하나님이 “왜 너를 천국에 들여보내야 하지?”라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요?2질문을 이렇게 바꾸어도 된다. “천국이 바로 앞에 있다고 잠깐 가정해 보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요구 사항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누구는 들어가고, 누구는 못 들어가는가?”이런 질문을 받은 교회 출석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다음 중 한 가지로 대답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a) 왜냐하면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b)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c) 왜냐하면 나는 내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이것은 교묘한 질문이 아니다. 이 대답들은 믿는다는 것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보여 준다. (a)는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고 대답한다. (b)는 ‘믿음 위에 행위를 더한 구원’이라고 대답한다. (c)는 ‘믿음이 행위가 된 구원’이라고 대답한다. 이들 모두 종교적이긴 하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다(5절). 모두가 참된 신뢰의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 (c)의 경우는 심지어 자신의 신뢰를 신뢰하고 있다! 이들 모두 복음으로 인한 영광스러운 해방을 놓치고 있다.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이러한 오해로 말미암아 불안과 근심, 자신감의 결여, 영적인 교만, 비판에 대한 과민 반응, 그리고 도덕적인 일탈로 망연자실하게 된다.따라서 믿음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종교적인 사람들과 비종교적인 사람들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다. 겉보기에 종교적인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것 같고 비종교적인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종교적인 사람들도 자신이 스스로 만든 의를 신뢰한다는 사실과 한 번도 직면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길을 잃고 말았다.구원받는 믿음은 완전한 변화를 일으킨다. 만약 믿음이 순종과 같다면,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성공하면 교만에 빠지거나 자랑하고, 실패하면 자신을 혐오하거나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믿음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발견했던’ 겸손과 확신을 가지게 된다.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인정받다바울은 “다윗도 같은 것을 말하였다”고 한다(6절). 다윗은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그는 왕이었고, 영토를 확장해서 평화를 가져 왔고, 하나님의 임재인 언약 괘를 중심으로 예루살렘을 자신의 수도로 건설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성에 짓눌렸다. 그는 간음을 했고, 음모를 꾸며 살인을 저질렀다(삼하 11장). 강력한 권력을 누렸지만 또한 죄로 물들었던 다윗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발견했다. 로마서 4장 7–8절에서 바울은 다윗이 쓴 시편 32편을 인용한다. 다윗이 ‘범죄하지 않는 사람들,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자. 다윗은 자신이 범죄자이며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복 받은 사람이라고 고백했다(롬 4:8). 의롭다고 인정받는 상태란 당신의 죄가 당신에게 불리하게 여겨지지(logizdomai)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죄를 짓지만 죄가 당신을 정죄하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신분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의롭다고 인정받는 복을 안다는 것은 진실하게 자기 자신을 보고, 또한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의로운 사람만 용납하신다는 진리에 무지하거나 바로 그 진리 때문에 짓눌리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범죄에 눈을 감고, 변명을 늘어놓거나 체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자신의 흠결과 실패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죄가 죄인에게 불리하게 인정되지 않는 죄인, 곧 의로운 죄인이 되는 복을 알기 때문에 실패할지라도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 의로 향하기 쉬운 사람들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율법적이고 인과율에 의해 작동됩니다. 우리의 본성과 양심은 우리를 늘 율법의 윤리적 조건 아래로 끌고 가서 우리를 속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의에 대한 값싼 만족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기만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 안에서 어떤 원인이나 선함도 찾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선함이나 의지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원인 없는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늘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 복음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요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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