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2_주일예배_창1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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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소식

Genesis 18:1–15 NCTB
야훼께서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문 어귀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어 웬 사람 셋이 자기를 향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천막 문에서 뛰어나가 맞으며 땅에 엎드려 청을 드렸다.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 떡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피곤을 푸신 뒤에 길을 떠나십시오. 모처럼 소인한테 오셨는데, 어찌 그냥 가시겠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아! 그렇게 하여주시겠소?”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고운 밀가루 서 말을 내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이르고 소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살이 연하고 맛있어 보이는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종에게 맡겨 빨리 잡아서 요리하게 하고는 그 송아지 요리에다가 엉긴 젖과 우유를 곁들여서 손님들 앞에 차려놓고, 손님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그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부인 사라는 어디 계시오?”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사라가 천막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천막 문 어귀에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늙은이였고 사라는 달거리가 끊긴 지도 오래였다.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랴 하며 웃으니, 될 말이냐?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자 사라는 겁이 나서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으나, 야훼께서는 “아니다. 너는 분명히 웃었다.” 하시며 꾸짖으셨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대접했는데, 뜻밖에도 그들이 하나님이었고, 또 그들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기 장막 문 어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웬 사람 셋이 자기 쪽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 사람이 곧 야훼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은 곧바로, "주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현현한 존재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덕분에 이 분들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이들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들은 그저 지나가는 과객이요 나그네들에 불과했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어째서 세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했을까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옛날 주석가들은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해석한다든지 혹은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이고 두 사람은 그 수행원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에서 사실 그것은 별달리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복수로 표현된 것 말고) 구약성서에서는 이 본문이 유일하지만, 고대인들의 세계에서 한 신이나 신적 존재가 여러 사람의 모습을 취하여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신의 현현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을 특별한 존재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취할 경우 그 사람이 하나님이 현현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감히 우리의 언어로 상상하기 쉽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다면 어느 인간이 그 하나님을 외면하겠습니까? 아무리 무딘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드러낸다면 모두 다 그 앞에 엎드려 경외할 수밖에 없겠지요.
성경, 특히 예언서 같은 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예언자들의 극적인 체험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님 자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 주는 어떤 현상이거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경우 그냥 지나쳐 버리면 전혀 하나님의 현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그렇고, 모세에게 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러하며, 마침내는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난 그 사람의 마음이요 자세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으면, 아니 지금 나와 같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을 텐데, 어째서 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특별한 소명을 받고 축복을 누리게 되었을까 하는 점에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이야기의 전형적인 주인공입니다. 사막과 다를 바 없는 지역의 나그네들이었으니, 게다가 보니까 그 흔한 낙타 한 마리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으니 이 나그네들의 모습이 변변한 의관을 갖추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본 아브라함은 이들을 상전 모시듯 맞아들이고 극진하게 대접을 합니다. 하기는 옛날에는 나그네들을 박대하지 않고 대접하는 풍습이 동서를 막론하고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전통적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민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냥 기본적인 대접을 하는게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 아브라함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낯선 나그네들을 흔쾌히 맞아들일 뿐 아니라 아주 융숭하게 대접합니다. 밀가루 세 말을 퍼다가 빵을 한 것까지는 통상적인 대접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어린 송아지를 잡고 게다가 버터인지/요구르트인지 엉긴 젖과 우유를 내놓으며 아주 융숭하게 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이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까지 듭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비범한 사람들로 보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이들이 하나님이 현현한 분들로 알아차렸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들이 하나님이라거나 하나님의 사자라고 여겼다면 오히려 이와 같은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어쩔 줄 몰라 두려워하였을 것입니다. 어찌 나같은 사람 앞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느냐는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알았을 때 그랬고 예언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태연하게, 하지만 극진하게 손님들을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저 남루한 과객들에 불과하지만 그들을 최고로 대우하는 자세를 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제가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바로 그와 같은 행동이 아브라함에게는 평범한 일상적인 모습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어떤 태도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변하지 않는 항심(恒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며, 기회를 누리는 아브라함의 평상시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다른 행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은 항상 예기치 않은 상황에 열린 자세로 임합니다. 항상 뜻밖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자세로 임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 출발부터 그러합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1)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에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길을 떠납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기회를 맞이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항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엘리야 예언자 시대에 먹을 것이 없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했던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마저 예언자에게 대접하여 기적을 경험한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남은 것마저 내놓은 과부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기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태도가 그런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와 같은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라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평상시의 그 마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뜻밖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아브라함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들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접합니다. 다 늙은, 아흔이 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내년 봄에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고 한 소식입니다. 50이 넘어서 아이를 본다고 해도 쑥스럽고 아니면 어이없어 웃을 지경인데, 아브라함 나이 100살이 넘고 사라 나이 90이 넘은 지경에 아이를 본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웃을 수밖에 없었고(17:17), 오늘 본문에서 사라도 웃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지만, 이 나그네들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나중에 사실이 되었고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의 약속은 빈말이 아니라 진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 나그네들로 현현한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뜻밖의 소식이 전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소식입니다.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소식은 축복을 전하는 뜻밖의 소식이었지만, 이 소식은 심판을 전하는 뜻밖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비록 심판의 소식이기는 하지만, 이 뜻밖의 소식 역시 아브라함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늘 열린 마음을 갖고 선업을 쌓으며, 하나님을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 특권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평소의 그 마음과 그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항상 열려 있는 그 마음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합니다. 특별한 계기,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사의 평범한 계기 가운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겪을 수 있는 '뜻밖의 기회'(특별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뜻밖의 기회가 아니라, 있을 수 있으나 우연히 주어진 기회라는 뜻에서)를 통해 '뜻밖의 소식' '뜻밖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과 같이, 일상을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일상을 늘 비범하게, 늘 특별하게 살아가는 자세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평상시의 그의 태도였듯, 늘 열린 마음으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감당하고, 또한 늘 열린 마음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바를 감당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 뜻밖의 소식이 주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이 교회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우리는 예측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흔들림 없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기회 앞에 열린 마음으로 임함으로써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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