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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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저는 오늘 본문으로 두 번의 설교를 진행하려고 하는데요. 제가 같은 본문을 두 번 하려는 이유는 원래는 본문을 충실히 다루는 방식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지난 주일 사역을 다 마치고 집에 가자마자, 오늘 말씀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주시는 거예요. 그것은 룻기의 전반부를 마치면서 주신 영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고 있던 3장 1~5절까지의 설교는 다음 시간에 함께 나누도록 하고요. 오늘은 룻기 2장을 마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성도님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전에 룻기의 흐름을 다시 한번 살펴보길 원하는데요. 1장에서는 10년 만에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되돌아오는 나오미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녀는 말 그대로 텅 빈 인생이었으며, 실패하고 쓰디 쓴맛을 본 인생의 표본 아니었습니까? 당장 먹을 것도 없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오죽하면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1:21)이라고 한탄을 했겠습니까? 이런 초라한 고백을 하던 1장의 나오미와 며느리 룻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기 2장 14절과 18절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하나님께서 이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셨고, 그분의 헤세드로 풍족하게 채우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17절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지난 주일에 ‘한 에바’는 22ℓ(약 17kg) 정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한 에바’면 두 여인이 한 달은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양식이었던 셈이죠.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완전히 빈털터리였는데, 이제는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의 양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거 엄청난 발전 아닙니까?
그런데 지난 주일에 말씀을 전하고 난 후에 다시 본문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마음을 주시는 거예요. ‘오히려 그것이 나오미와 룻에게는 위험한 상황이다’
아니, 지금 나오미와 룻은 2장에서 보아스로 인해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1장에 비할 때 2장은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인데, 거기에 오히려 함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룻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거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죠.
아시다시피 룻기 말씀이 2장으로 끝나질 않잖아요? “배불리 먹었더라”하고 끝나는 성경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3장과 4장에도 나옵니다. 2장의 풍성함은 장차 다가올 3장과 4장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로 보여주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룻기 2장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1장에서 배고프던 시절을 생각하니 2장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진 것 아닙니까? 그러고는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2장에 둥지를 틀고 머물러 있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전도사 시절을 반포에 있는 한신교회에서 보냈습니다. 제가 그 당시 고등부를 사역하면서요. 그 철없는 전도사 시절에도 제 밑에 총무가 있었고, 서울대 교수님이 부장 선생님이고 약국과 건물도 몇 채씩 가지고 있는 분들이 교사 선생님들이셨습니다. 그분들이 저같이 지방대 출신에 별 볼 일 없는 전도사를 얼마나 존중해 주시는지요. 과분한 대접에 처음에는 적응을 잘 못 하겠더라고요.
제가 그 당시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선생님들이 저를 애슐리 이런데 데리고 가서 점심을 사주시는 거예요. 어떤 선생님은 전도사님 피곤하면 안 된다고 마사지권을 끊어서 주시질 않나, 또 어떤 선생님은 본인 소유의 차가 2대라고 한 대를 아예 저에게 빌려주시면서 편하게 타고 다니라고까지 했습니다.
또 고등부 애들은 왜 말을 잘 듣고 사역에 열매가 있는지, 고등부 학생들만 데리고 특별새벽기도회를 할 정도로 부흥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지금은 이렇게 어리바리하지만 제가 그때만 하더라도 엄하게 애들 막 통성기도 시키고 성경 암송시키고 막 이랬거든요.
그 당시에 저희 부부가 떨어져 살았거든요. 제 아내는 지방에서 혼자 일하면서 아기 키우고 있는데, 저는 주말에는 사역해야 하니까 주말부부도 아니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집에 갔던 것 같아요. 저 혼자 이태원 5평이나 되는 그 좁은 집에서 살면서도요. 사역지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니까 제가 외롭지가 않더라고요. 그야말로 ‘여기가 좋사오니’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과 공능교회 청년부 담당 교역자 시절이 딱 제 인생의 룻기 2장이었습니다. 삼십 대 중반에 너무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데 제가 지금도 잊지 못해요. 목사수련생 과정 중에 일주일 동안 새벽설교를 해야 하는 실습항목이 있거든요. 그래서 또 멋 부리면서 (그 심오한 다윗의 신앙을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시편 23편을 6일간 강해를 하려고 준비를 했잖아요? 그런데 1장을 시작하던 월요일 새벽부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엄청난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괜찮아지겠지’하고 월요일이 그럭저럭 지났는데, 아예 화요일부터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설교를 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하루를 또 어떻게 보냈는데, 그때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음성이 ‘너 제자훈련 한다고 하지 않았니? 제자훈련 하는 교회로 가겠다고 했잖아’
너무도 당황스러운 주님의 음성에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 시편 23편 설교하는 내내 주님과 엎치락뒤치락하며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제가 제자훈련하는 교회 그것도 부교역자가 많이 없는 대전 이남 쪽으로 내려가겠다’라고 결심한 것 아닙니까? 너무 기도를 세게 했는지 제주도 서귀포까지 내려가긴 했지만, 저는 그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로 제 목회 인생의 즐거움을 그 시절에 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룻기에 담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정리하다 보니, 이런 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습니다. 청소년 사역을 하며 룻기 2장과 같은 풍요로움을 누릴 때는 제 인생에 룻기 3장과 4장이 펼쳐질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때는 좁은 시야를 가지고 그저 편하고 대우 잘해주는 교회에서 영광을 누릴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 룻기 2장의 자리를 벗어나서 제주로 내려갔을 때부터가 제 인생의 룻기 3장, 4장을 펼쳐지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한신교회 때보다 공능교회와 새밭교회 때가 더 좋았고 지금은 이렇게 우리 하름교회에 와서 제가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걸 누가 알았겠냐고요.
그래서 저는 다른 것 없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이 하름교회에서 룻기 4장의 멋진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 이것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표정들이신데요. 믿어주세요. 여러분)
그런 차원에서 혹시 지금 괴롭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2장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또 2장에서 상황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셨다면 진짜 본론인 3장과 4장에서의 하나님의 일하심을 맛보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편 81:10 합독
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이 어떤지 아십니까? 바로 이어지는 81:11
11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배부르게 먹고도 양식이 남을 만큼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입을 더 벌려 구할 것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2장에 안주하는 인생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이런 분이 계신다면, 이제 더 놀라운 룻기 3장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포만감’입니다. 저 역시 가장 경계하는 것이 오랜 부목사 생활을 끝내고 담임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영적인 포만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저같이 미숙한 사람이 담임목사 되었다고 ‘겉멋’이 들어서 대접받을 생각부터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가끔 부목사 시절에 함께 했던 분들을 만나면 ‘담임목사 되니까 행복하지 않냐?’라고 하시는데, 저는 진심으로 제 행복을 위해 담임목사 하지 않기를 원해요. 제가 편하고 제가 행복하려고 여러분들의 담임목사로 부름을 받은 게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목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룻기 3장으로 들어가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난 주일 설교 끝나자마자 알려주신 것 아니겠어요?
우리가 2장에 만족하고 ‘한 에바’의 포만감에 빠지게 된다면 위험 신호가 온 것입니다. 룻기 2장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십시오. 룻2:23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추수가 끝나면 이삭줍기도 끝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2장에 만족하고 그곳에 둥지를 틀고 있으면, 그 인생의 마지막은 궁핍함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2장의 포만감을 아직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서둘러서 3장과 4장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룻기 2장에 만족하지 말고 룻기 3장으로 진입하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영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나오미가 얼마나 지혜로운 여인인지를 알게 되는데요. 그녀는 한 에바의 이삭을 가져온 며느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룻2:19-20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드디어 룻의 입에서 보아스라는 이름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20절에 나오는 ‘기업을 무를 자’는 룻기 전체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인데요.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누군가를 대신해서 값을 지불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엘 제도에 대해서는 레위기 25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레25:23-25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이 고엘제도에 대해서 몇 가지 정리를 해보길 원하는데요. 먼저 레위기 25장에서처럼 친족 중에서 어떤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유산으로 받은 땅을 팔아버렸을 때 고엘, 즉 가까운 친족 중의 한 사람이 그 땅을 자기가 다시 사서 원래의 주인에게로 소유권을 되돌려줄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로는, 가난 때문에 종으로 팔려 간 사람이 있다면, 친족 중의 한 사람이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그를 다시 자유롭게 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또 친족의 형제가 자기 아내를 홀로 남긴 채 사망하게 되면 가까운 친족 중의 한 사람이 그를 아내로 맞아 모든 신분을 회복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고엘 제도는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심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나오미는 룻을 향한 보아스의 호의를 보면서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는데요. 나오미는 한 에바의 식량에 만족하지 않고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에바의 보리를 보면서 그것을 그저 식량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과 며느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고엘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주실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현실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는 것입니다.
3장에서, 나오미는 그 꿈으로 인해 능동적으로 됩니다. 1장에서 그녀는 자신을 환영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라”고 할 정도로 절망적인 인생이었는데, 하나님의 꿈이 그 안에 들어가자 얼마나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잃어버린 꿈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저 역시도 제 인생의 3장과 4장을 들어가는 요즘, 예전에는 나이 들어가는 게 아쉬움이 컸는데 이제는 기대가 돼요. 라고 말씀을 드리면 약간 거짓말일 것 같고 아쉬운 마음 30%, 기대가 70%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우리 하름교회에 와서 이렇게 은혜를 누리고 있는데, 이게 시작이라면 제 50대와 60대는 얼마나 풍성할까? 기대가 되는 거예요. 나오미와 룻처럼 제 인생에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죠. 저는 이런 기대가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에게도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저는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꼭 기억해야 할 교훈 두 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우리 하름의 성도님들이 기억해야 할 첫 번째는, 꿈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고엘이 되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이심을 기억하기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고엘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고전6:19,20 합독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가난 때문에 자신을 종으로 팔아버려서 평생 종의 신분으로 살 수밖에 없을 때 친족 중 한 사람이 대신 돈을 지불하고 그를 종의 신분에서 구해주는 것처럼,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원수 마귀의 종노릇 하면서 살아가던 우리를 위해 주님은 자기 자신을 지불하심으로써 고엘이 되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십자가의 피 값으로, 대속의 사랑으로, 죽음의 절망적인 고통에 스스로를 내던지심으로써 우리를 다시 사주셨고 우리를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룻을 묘사할 때 꼭 그녀가 이방 여인임을 밝혀주고 있는데요. ‘이방 여인 룻’, 이것이 강조하는 게 뭘까요? 그녀는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남편을 잃고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표현이 바로 ‘이방 여인 룻’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회복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방 남자였고,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이 가능해졌을까요? 고엘이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내 안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해주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피 흘리심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받은 이방인들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사 44:21 합독
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이 꿈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않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두 번째 교훈은, 우리의 궁극적인 꿈은 하나님나라임을 기억하기입니다.
여러분, 룻기를 묵상하다 보면 알게 되지만, 룻은 한 끼 배부르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룻을 통해 정말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시는데요. 왕이 없어 자기 소견대로 행하던 타락한 사사 시대에 비천한 룻을 통하여 다윗이 태어나고, 그 계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게 되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룻은 이때만 하더라도 몰랐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2절에서 5절까지 이 땅에서 누리게 된 풍족한 은혜에 대해 나옵니다. 나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해 주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며,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질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 23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6절입니다. 시23:6 합독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러분, 우리의 삶은 6절을 지향해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어려움 속에서 내 눈에 흘리는 눈물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이제 한 에바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영원히 거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봐야 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인생길에서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만났다면 “장차 그 나라에서 나를 풍족히 인도하실 하나님이 맛보기로 이것을 보여주고 계시는구나”하고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그 밖의 일들은 맛보기로 보여주신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거기에만 더 많은 것 아닙니까?
‘내 병도 고쳐졌으면 좋겠다. 나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면 좋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시야가 넓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경험하는 주님의 은혜 뒤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 문을 통과하여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우리가 이런 꿈을 갖기를 원합니다. “내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자, 저를 함께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내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할렐루야!
이런 기대감과 꿈으로 우리 모두의 인생에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가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은혜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은혜’라는 찬양, 룻기 2장에서 누렸던 풍성한 은혜를 앞으로 펼쳐질 3장과 4장의 기대감을 갖고 가사를 생각하면서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합심기도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주님, 내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한목소리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살아계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나오미와 룻과 같이 한때 룻기 1장과 같이 어렵고 고된 시절을 보내다가 2장과 같은 풍성함과 맛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룻기 2장에서만 머무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부족한 종을 통해 주신 깨달음으로 이제 우리의 영원한 고엘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룻기 3장과 4장, 시편 23편 6절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인생의 후반전을 맞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하름교회 온 성도들이 내게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알고 더욱 도전하는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인생에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