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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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요약
* 16~18page.
C.S 루이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기쁨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고통을 통해 소리치신다.”
팀 켈러 목사님은 아내 분과 함께 삶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지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강하게 확신하거나 의심하는 기준선에 고난이 있음을 깨달으셨다. 이 난해하고 심오한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살피다 보니, 하나님은 ‘고난과 상관없이’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온전한 기쁨을 주셨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는 고통과 상관없이’가 아니라 ‘그 아픔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해 주셨다.
성경이 말하는 풀무는 요즘의 ‘용광로’와 비슷한 의미다. 뜨겁게 달아오른 물질은 무엇이 됐든 대단히 위험하고 강렬하다. 하지만 적절히 쓴다면 파괴적이지만은 않다. 용광로에 적절히 녹인 물질은 모양을 빚고, 정제하고, 순도를 높여서 근사한 물건을 만들 수 있다. 고난을 설명하는 데 이만큼 훌륭한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23~24page.
‘인생의 목적’에 따라 고통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고통에 무심한 세속적 현대문화
지독한 악이나 곤경에 적절히 대처하도록 돕는 기능이야말로 문화가 그 구성원들에게 기여하는 주요한 방법이다. 막스 셸려Max Scheler는 “세계 어디서나 위대한 신앙가나 사상가들의 가르침에는 고통과 고난의 의미가 그 핵심을 이룬다”면서, 어떤 사회든 이러한 사상들 가운데 특정한 입장을 선별해서 구성원들에게 “고난과 적절히 마주하는(또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 필요한 지침들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세속적인 현대의 서구 문화가 역사상 그 어느 문화보다 고난에 대응하는 데 미숙하고 취약하다는 점이 자주 드러난다.
인간은 누구나 “세계를 의미 있는 우주로 인식하고 거기에 대해 적절한 입장을 취하려는 내면의 욕구”를 좇아 움직인다. 고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류학자 리처드 슈웨더는 “인간이라면 분명히 참담한 현실에서도 깨달음을 얻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논지도 비슷하다. 모든 문화는 “고난과 악에 의미를 부여하는 식으로 인간사를 해석해” 왔다는 것이다.
24~27page.
인간에게는 뿌리 깊은 “내면의 욕구”가 있으므로, 어떤 문화든 구성원들이 고난에 맞서게 돕든가, 아니면 신뢰를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든가 양단간에 선택을 해야 한다. 고난이 그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경험인 데다가 피할 길마저 없다고 생각하는 희생자에게 아무런 설명도 주어지지 않으면, 프리드리히 니체와 막스 베버를 비롯해 수많은 사상가들이 “르상티망ressentiment”(원한 또는 복수심)이라고 불렀던 깊이 고착된 분노가 심한 증오를 키울 수 있다. 또 르상티망은 심각한 사회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사회학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구성원들이 상황을 납득하는 데 필요한 ‘담론’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는 고통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방식뿐 아니라 그 원인에 대한 이해도 포함된다.
하지만 모든 사회가 똑같이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서구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고난에 관해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으며 어떻게 고통을 처리해야 하는지 안내하는 법도 없다.
세속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현대 서구 문화는 물질세계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행복을 안겨 주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를 거머쥐는 걸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고난은 인생의 불필요한 부분이 된다. 인간사의 중추인데, 순탄한 인생길에 가로놓인 장애물일 뿐이라고 여긴다.
결국 세속적인 세계관을 가진 이은 피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시련과 마주할 때마다 우주의 본질에 관한 스스로의 신념과 상관없이 다른 인생관, 가령 윤회사상이나 불교, 그리스 스토아 철학,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자원에 도움을 구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