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4. 주일3부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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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 개역개정판 4장
4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지난 주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들을 생각해보면 사랑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것들이 참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십계명만 해도 열가지의 덕목들을 지켜야 하며, 구약에 나타난 율법을 모두 포함하면 무려 613개의 덕목들을 지켜야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율법과 계명들 하나하나를 글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새롭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실 필요가 없었겠지요.
예수님이 서기관과 나누셨던 대화를 기억해봅시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결코 하나하나의 계명을 글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듯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율법과 계명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지난 주 소개했던 사막의 교부 압바 아가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어느 날 압바 아가톤이 압바 알로니우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제가 혀를 억제하여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압바 알로니우스가 말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죄를 많이 지을 것입니다.” 이에 압바 아가톤이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압바 알로니우스가 답했다. “두 사람이 당신의 눈앞에서 살인을 저질렀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당신의 집에 숨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를 찾는 형리가 당신에게 ‘살인자를 보았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지켜보고자 사막을 향했던 자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수도생활을 지키던 자들이 결국에 깨달았던 것이 이 이야기 속에 가득 녹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결국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진리를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해두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모든 계명은 사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가 중요하긴 하지만 정의도 결국 사랑을 향하게 하는 미덕에 불과합니다. 정의는 사랑을 섬겨야 비로소 참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관계는 금덩어리를 감싸고 있는 모래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정의조차 금덩어리 앞의 모래알에 불과한 것이지요.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것보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또한 지난 주에 우리는 사랑이 결코 감정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로서의 사랑은 반드시 행동을 낳지만 결코 우리의 삶에서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 중의 누구도 완전한 사랑을 행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져서 하루하루 우리는 그 사랑을 닮아가고 있음을요.
하지만 이러한 닮아감은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계속해서 훈련해가야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 중에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요? 시험을 통과하거나 자격증 취득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고, 친구나 연인,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아무런 노력 없이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국가의 부름을 받아 대표로 소집됩니다. 그리고 부름받은 자답게 최상의 기량을 보일 수 있도록 훈련에 매진하지요. 등수와 성적을 넘어서서 자신이 가진 최고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부름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름지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함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한다고 수없이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삶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쉬이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랑”으로 반짝반짝 빛나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까 말했듯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결코 쉬이 이루어지거나 한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표선수들이 자신의 부르심을 위해 끝없이 훈련해야 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부르심을 위해서는 끝없이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훈련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봅시다.
엡 4:1-2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개역개정에서는 1절과 2절이 한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나뉘어져 있습니다. 새번역성경이 이를 잘 살려 번역을 했는데요, 제가 이 부분을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성경전서 새번역 4장
4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1절에서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부터 3절까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을 쭈욱 나열하고 있지요. 우리의 부르심 즉,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겸손이라는 말의 의미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했던 겸손이라는 말의 의미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로 “우리가 앞으로 서로 사랑하기 위해 겸손합시다”하며 오늘 설교의 결론을 내면 상당한 오해가 발생하게 되지요. 오늘날 우리는 겸손이 ‘죄책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겸손이 단순히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부족함과 연약함을 계속해서 직시하다보면 끝없이 실패하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로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계속된 악순환을 거듭하며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그러나 이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겸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상당히 마음 아픈 사실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우리는 흔히 성도로서 내가 저지른 일, 하지 못한 일에 대해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바른 신앙의 모습인 양 여기고, 그러한 상태를 이어가는 것이 회개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파괴적이며, 자존감만 깎아내릴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계속 빠져들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결과를 낳기도 하구요. 회개가 무엇입까? 회개에 분명히 나의 죄에 대해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이 담겨있긴 하지만, 회개의 본질은 돌이켜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휩싸여 마음아파 하는 것에서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니예요.
참된 회개가 우리를 기존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지 않듯이, 참된 겸손도 우리를 기존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참된 겸손은 우리를 움직입니다. 겸손은 우리의 연약함,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해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겸손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겸손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며, 나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고 계시다는 것을 신뢰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방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한 참된 겸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참된 겸손은 단순히 나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에 더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사랑받는 자녀이며, 도우시는 손길에 힘입어 나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신뢰하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반드시 이 두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참된 겸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참된 겸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전하듯 참된 겸손은 우리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끼워야 할 첫 단추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웃을 정죄하려는 유혹입니다.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유혹이라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말하곤 하였는데요, 사막의 교부 중 한 명인 도로테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자신의 선행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한 일은 잘한 일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파 사람을 탓하신 것은 그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한 순간, 그는 다른 이들을 자신의 어줍잖은 잣대로 판단하고 그들의 영혼과 성품, 삶 전체를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세리가 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존재 자체를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겸손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내가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 눈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 사람과 나 자신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겸손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웃을 쉬이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웃이 죄를 저질러 몰락했을 때 이를 은밀히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기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 주님, 오늘은 그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일은 제가 죄를 지을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겸손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부터 죄인을 보호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참된 겸손이란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힘입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 눈 앞의 이웃도 나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완악한 마음을 바꾸어내었듯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할 때 죄인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예화를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압바 암모나스가 평판이 나쁜 어떤 수도사가 있는 곳에 밥을 먹으러 왔다. 그때 한 여인이 와서 그 수도사의 처소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던 수도사들은 이 사실을 알고 난처해했고, 함께 모여 그 수도사를 공동체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암모나스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 기들을 지지해달라고 부탁했다. 문제의 그 수도사는 이 사 실을 알고서 여자를 큰 통 속에 숨겼다. 곧 수도사들이 그의 처소에 들이닥쳤다. 사실 압바 암모나스는 그가 여자를 어 디 숨겼는지 확실히 보았지만, 하느님을 위해 비밀을 지켰 다. 그는 들어가서 그 통 위에 앉아 그의 처소를 뒤져보라고 말했다. 수도사들이 그녀를 찾지 못하자 압바 암모나스가 말했다."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하느님이 여 러분을 용서하시기를! 그는 그렇게 말한 후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런 다음 문제의 수도사의 손을 잡고 말 했다. "형제여, 스스로를 경계하십시오." 이 말을 하고 그는 떠나갔다. 한 수도사가 압바 포이멘에게 물었다. "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면 그것을 감추는 것이 옳은지요? 압바가 답했다.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감추는 바로 그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감추어 주시고, 우리가 우리 형제의 잘 못을 드러내는 순간에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나눈 내용을 요약해봅시다. 참된 겸손이 무엇입니까? 참된 겸손은 우리 모두 인간이기에 죄를 짓기 쉬움을 깨닫게 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는 겸손이 가진 현실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유혹에 약하다는 것에 큰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참된 겸손은 우리 모두 연약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또한 깨닫게 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에 힘입어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는 겸손이 가진 소망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의 이 두가지 측면을 모두 붙들 수 있어야 참된 겸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된 겸손이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참된 겸손을 가진 자는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남을 쉬이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실패와 연약함을 비웃거나 은밀히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겸손은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나와 같은 죄인이지만 동시에 나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깨닫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기에,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이루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죄와 허물이 감추어졌듯이, 나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의 죄와 허물을 감추어 주게 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연약함을 극복해냈듯이, 나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이 연약함을 극복해내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을 가진 자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