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 2] 오래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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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6월 4일 주일 청년부
시리즈 : 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
제목 : 목사님,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본문 : 야고보서 1장 2-4절
결단 : 주가 일하시네
[인내 : 괴로움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다]
‘인내’라는 단어가 주는 분위기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어둡고 다운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뜻을 찾아 보아도,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 이라 말하니, 기쁠만한 요소가 하나 없는 단어입니다.
우리 삶으로 들어와 봅시다. 언제 주로 참으십니까? 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참으려 합니다. ‘당신이 내게 이렇게 해서, 당신의 기분이 조금 풀릴 수 있다면야.’, ‘당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더 유복해질 수 있다면야.’ 등 생각을 하며 넘어가려 합니다. 또 제 스스로에서 문제점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물론 이렇게 모든 상황 속에서 참고 또 참아 넘기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말을 해야 할 때, 하고 넘어가는게 지혜일 수도 있고, 때론 묵언할 때가 지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향이든 기질이든 ‘모든 원인을 제게서 찾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단어의 뜻대로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단어의 뜻이니, 저는 뜻대로 잘 살아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오래참음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에 저는 ‘저는 꽤나 잘 지키는 것 같습니다.’ 라고 스스로 대답하며 여지껏 살아왔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인내]
그렇담 성경이 말하는 인내 또한 괴로움과 어려움을 잘 참고 견뎌내는 것인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동일한 의미라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달라야 앞으로의 스토리가 진행될 것 같아 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를 나누기 전에, 먼저 세상에서 말하는 인내는 무엇인가를 보고자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에서, 이들은 인내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사실 더 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앞서 나눈 내용이 전부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인내, 별거 있습니까? 화 잘 참고, 분노 잘 억제하고, 힘들어도 잘 견디는게 세상이 말하는 인내고 오래참음 아니겠습니까?
[인내, 진짜 쉬운가? 할만한가?]
까짓꺼 잘 참으면, 그게 인내입니다. 근데 여러분. 인내, 정말 쉬울까요? 오래참음, 정말 할만한 내용입니까? 옆에 앉은 사람들의 눈을 보십시오. 눈동자가 얼마나 맑은지, 손은 또 얼마나 고운지, 선하디 선한 사람 아닙니까?
근데,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실체가 화 많고, 이기적이고, 무례하기까지 하다면, 지금처럼 옆 자리를 늘 지킬 자신 있으십니까? 그 친구 옆에 있으려 인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친구였다면, 옆 자리를 지킬 이유도, 오래참아볼 여지가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오래참음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막상 우리가 적용하려면 아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일상에서 내 친구가, 내 직장 동료가 불의한 모습으로 주변 사람을 대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실수였겠거니, 그런데 반복되는 모습에 혼돈이 올 때, 그 피해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졌다 봅시다. 참으시겠습니까?
세상이 말하는 기준으로 인내를 보았을 때, 자주 접하는 단어고, 말로는 참 쉬운 단어지만 실천과 적용에 있어서는 참 어려운 단어가 바로 인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인내가 있어야 맺힌다 근데..?]
그럼 이제 성경이 말하는 인내를 알아봅시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에도 물론, 세상이 말하는 인내의 의미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세상이 말하는 인내에 더 큰 비중을 두거나, 동일한 의미로 기준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애석하게도 더 광범위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인내도 이미 충분히 어려운데,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얼마나 더 어려운건가 싶기도 합니다.
우선 성경의 인내가 적용됨은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는 ‘성령의 열매’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루 이틀의 시간으로 충분합니까? 아닙니다.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모두 그냥 맺히는 열매가 아닙니다. 다 열매입니다. 다 인내가 필요한 열매입니다. 하루 아침에 맺히지 않고, 결실을 맺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래참음인가? : 1. 하나님을 떠난 탕자, 언젠간 돌아오겠지. 기다릴게 친구야!]
그래요. 열매 맺기 위해 인내 필요하겠죠. 근데, 이게 세상의 인내와 무슨 차이가 있죠? 똑같이 기다리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의 예시를 들어봅시다. 내 옆의 지체가 이상해요. 교회를 욕합니다. 갑자기 ‘야, 예수는 구라야. 부처가 찐이야. 너도 정신차리고 나랑 같이 나가자. 절에 갈 마음이 생기거든 언제든 연락해. 나 간다. 나미아무타불’ 이라 말하고 다시는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세상에서 흥청망청 유흥에 빠져, 타락도 이런 타락이 없지 싶은 삶을 살고 있단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지체를 생각하며, ‘그래, 모든 것을 잃고 곧 돌아오겠지, 마치 탕자처럼.’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 친구가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기다려봅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인내가 맞습니까?
[그래서 오래참음인가? : 2. 아니, 저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또 다른 예시를 봅시다. 한 청년이 교회를 너무 열심히 출석합니다. 근데 출석의 정도가 상당합니다. 매일 새벽기도와 수요예배를 참여합니다. 주일만 되면 마치 사역자마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순종하고 섬김의 자리를 지킵니다.
그러던 이 친구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몸이 아파 갑작스런 월차와 연차를 쓰게 되고, 몸이 쉽게 회복되지 않아 회사측에서 권고사직을 제시합니다. 몸이 아프니 예배와도 멀어집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점점 사역도 내려놓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연약해진 몸과 겨우 겨우 아픈 몸을 이끌고 주일의 예배 한 번 드리는게 전부인 삶이 되었습니다.
처음 이 친구는, ‘그래,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야. 욥의 고난처럼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야.’ 라 생각하며 기다려왔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에 지쳐,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저 오래 참았어요. 목사님도 보셨자나요. 저 참을만큼 참았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결국 성경이 말하는 오래참음은]
첫 번째 이야기, ‘돌아오겠지, 탕자’ 어떻습니까? 하염없이 기다리는 친구, 성경이 말하는대로 인내하는 중입니까?
두 번째 이야기, ‘참을만큼 참았다 호소하는 청년’. 이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성경이 말한 기준대로, 정말 기다릴만큼 기다렸다 하소연하는 이 모습이, 성경이 말하는 인내를 실천 중이었던 겁니까?
두 사례 모두 세상의 기준으로 기다리긴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내로 기다리진 못했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어떤 기준이고, 어떤 인내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인내의 기준은 ‘예수’고,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오히려 좋아’ 입니다. ‘오히려 기뻐’ 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기준되신 예수를 떠난 자들을 향해 ‘정신차려 친구야. 돌아가야지!’ 라고 소리칠 수 있음이 인내라는 겁니다.
너무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인내는 아무 말 하나 없이 잠잠히 잘 견디는게 인내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소리칠 용기가 있음이 인내라니.
물론 무작정 화내라는게 아닙니다. 무작정 소리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기준입니다. 기준이 어디에 있냐는 겁니다. ‘목사님, 저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참을만큼 참았자나요!’ 네 맞습니다. 인내했죠. 견뎠죠. 자신의 힘으로요.
성경이 말하는 기준으로 인내했다면, ‘저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가 아니라 ‘기뻐해야’ 한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 2절 어떻게 기록합니까?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오히려 기뻐하랍니다. 말이 됩니까?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하죠. 우리의 힘으로는 당연히 불가능하죠. 그래서 성령의 열매인 겁니다. 성령님이 도우셔야 하기에, 성령의 열매인거죠.
[오래참음의 열매를 보여준 한 청년의 용기]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들. 전부 그냥 생각나는대로 만들어 본 이야기지만,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왠지 우리 주변에 본 것만 같고, 또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들 아닙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만큼 교회가 잘못된 오래참음의 의미를 가지고 지금껏 지내온 것입니다.
사전에 동의를 구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 청년이 울며 하소연 하듯 예배와 모임에 대한 아쉬움을 나눴습니다. 근데,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기뻤습니다. 제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그렇게 잡아주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상심하지도 않았고, 상처도 없었습니다.
전 그 친구의 모습이 오래참음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기준이 하나님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친구가 말할 때, 하나님이 ‘정신차려 조광원. 힘들다 찡찡거리지마. 너 내가 못견딜 어려움 준거 아니다. 고개 들어. 날 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 가운데 강하게 들었습니다.
전 여기있는 모든 분들이 제가 어긋나거든, 또 정신 못차리고 있거든 용기내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도 여러분들을 향해 ‘정신차리라’ 말할 수 있는 동역자가 되려 노력할 것입니다.
[작은 열매도 열매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기준을 예수께 두고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습니까? 24시간 예수를 바라보는 겁니다. 24시간 예수를 바라보면 틀림없이 오래참음의 열매를, 뿐만 아니라 성령의 모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게 모든 순간을, 1분 1초의 모든 순간을 이유있는 순간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기보다, 내 힘으로 참아내려고 하지 말고, 주를 바라보십시오. 주를 생각하십시오. 주 안에 거하며 주께서 일하심을 바라 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주께 맡기고 주께서 이루실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는 삶의 아주 작은 열매부터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열매를 미처 보지 못해 놓치지 마십시오. 작은 열매를 볼 수 있음이 오래참음의 시작이자, 성령의 열매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결단찬양 후 기도]
- 우리의 기준이 내가 아닌 예수께 있는 삶 되게 하소서,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게 하소서
- 인내를 통해 기쁨을 누리는 자 되게 하소서, 작은 열매에도 감사하는 자 되게 하소서
- 함께 열매 맺어가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 주 안에 거하는 청년 공동체, 그렇게 복음을 흘려 보내는 청년 공동체 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삶의 기준이 이제는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써 삶의 놀라운 변화를 이루고자 다짐한 자들과
함께 열매 맺어가기로 결단하고 작은 열매에도 기뻐 감사하고자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무궁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