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작은 열매가 맺히다(엡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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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6월 7일 수요일
제목 : 사랑의 작은 열매가 맺히다
본문 : 에베소서 5장 1-14절 *신314
결단찬양 : 주만 바라볼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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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년부 지체들의 기도제목이 적힌 간지가 로비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2. 오늘부터 청년부와 다음세대를 위한 특별 수요예배가 시작됩니다. 함께 자리하시어 기도로 만들어가는 수요예배와 여름수련회 되길 소망합니다.
[도입 :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
저를 따라 이렇게 인사해봅시다.
사랑합니다 / 주님이 날 사랑하시듯 / 나 또한 당신을 /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내 원수여
성경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라 말합니다. 어쩌면 사랑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영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청년 수련회는 이 ‘사랑’이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가지고 2박 3일간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또 오늘 이 사랑을 주제로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은 심히 놀랍습니다. 낯부끄럽기도 하지만, 막상 들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감정적으로도 기분이 업되는 마성의 표현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인생을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자녀의 인생을. 가정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그 가정의 방향성을 바꿔버리는,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어느 한 배우가 어릴 적 가정의 어려움과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장이 되어 책임을 다하다보니 너무 힘에 부쳤고, 끝내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했다고 합니다. 그럴 찰나에 본인이 출석하던 교회의 전도사님이 ‘너는 끼도 많고, 재능이 많아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거야. 넌 할 수 있어.’ 라는 따뜻하고 정성어린 격려와 위로가,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표 인생에서 ‘나는 할 수 있어!’ 라는 느낌표 인생으로 완전 바꾸어 버렸다는 겁니다.
이 배우의 결단과 의지와 다시 재도약함도 참 멋지지만, 한 젊은 청년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가간 전도사님과 그리고 그 전도사님과 함께 역사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참으로 멋있었습니다.
[도입 : 그런데, 사랑.. 삭막한 사막에 놓이다]
여하튼, 사랑은 여러방면으로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이런 사랑이 담긴 스토리들은 전설 속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오늘 날의 분위기는 차갑고 삭막합니다. 성경을 떠나 이제 사랑 자체가 참 어렵습니다.
도대체, 엄청난 힘과 능력을 지닌 이 사랑은, 어쩌다 삭막한 사막 한 가운데 놓여, 포근함과 따뜻함은 온대간데 없고 이리 차가워졌습니까?
다들 잘 아시다시피,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입니다. 그리고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학업 스트레스’이며, 이미 3명 중 1명은 상시로 자살을 생각한다는 결과도 나왔죠. 이런 사회 구조 속에 있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행복지수 최하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학벌이 학생들간의 계급화 되어 서로 경쟁하고 피터지게 싸우도록 만드는 현 사회 구조가 바로 우리가 살아내는 시대입니다.
이런 곳에 이태리의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한국에 몇 년간 거주한 뒤, 한국을 다음과 같은 4가지로 평가했습니다. 첫 번째, 한국은 끝없는 경쟁 속에 산다. 끝이 없다. 경쟁 끝 연합은 없고, 또 다른 이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생존한다. 두 번째, 극단적 이기주의. 이기주의는 근대사회의 한 현상이라 말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극단적이라는 겁니다. ‘나 혼자’를 너무 강조한다고 합니다. 세 번째, 일상의 사막화. 일상이 너무 뻔합니다. 감정 없고 내 밥그릇 챙기며, 무미건조한 삶을 산다는 겁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불필요한 에너지고, 나 혼자 사는게 최고다. 마지막 네 번째, 생활리듬의 초고속화. 그냥 고속화도 아닙니다. 초고속화 라는 겁니다. 돌아가는 리듬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는 겁니다.
그렇게 베라르디는 네 가지를 언급한 후 청년 자살률을 언급하며 많은 청년들이 제대로 살아보기도 전에 날개를 저버리는 아쉬운 현실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한국은 강력한 현대 허무주의에 순응해버린 나라다.’
베라르디의 분석은 날카로웠고 매서웠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팩트였습니다. 협력보단 경쟁하는게 삶을 살아낼 무기고, 사랑보단 질투하고 비난이 스팩이 되는 시대가 오늘 날이고, 이는 단순 남남의 관계를 넘어, 부부 관계에 있어서도 퍼져나갔습니다.
‘너의 삶, 내가 존중해줄게. 너도 나의 삶을 존중해줘. 우린 잠만 같이 자는 거야.’ 부부관계 속으로 들어온 극단적 이기주의의 현상. 요즘은 침대도 싱글로 두개 사는 추세임을 알고 계십니까? 퇴근 후 같이 밥먹으며 잘 놀다가도, 개인 시간 존중을 위해 같은 방 안에 침대를 두개 사 공간 분리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시대 속,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들 안녕하십니까? 평안하시나요?
분명 교회는 사랑이 있는 곳이라 했는데, 그래서 따뜻하고 포근할 줄 알았는데, 하라는 것도 너무 많고, 안되는 것도 너무 많다는 겁니다. ‘술 마시지 마’, ‘식탐도 죄니까, 절제 해야해’, 정욕, 조심해라’, ‘베풀며 살아야지’, 저 성도의 일을 ‘내 일 처럼’ 도와라 등 더 바쁩니다.
[본론 : 세상은 이웃만, 교회는 원수도 사랑하라 말한다]
물론 맞죠. 교회에 사랑 있죠. 성경, 한 단어로 어찌 말합니까? ‘사랑’이라 말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은 어떻게 기록합니까? 요한일서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라 표현합니다. 교회는 사랑이 있고, 성경도 사랑이고, 하나님도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니, 이런 기록이 있네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뭡니까?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답니다. ‘에이~ 너 사랑 안하네~’ 정도가 아닙니다. ‘너 하나님 모르네!’ 인겁니다.
그래서, ‘그래, 그럼 내가 하나님을 사랑 좀 해볼까?’ 했더만, 뭐랍니까? 요한일서 4장 1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니, 사랑 좀 해볼려 했더만, 뭐? 또 내가 할 수도 없네?’ 아닙니까?
그런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해라’ 그럴싸 합니다. 맞는 말 같아 보이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세상이 이리 말했는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웃은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는 미워하라는 겁니다. 이웃은 품어야 하지만, 원수는 배척하라는 겁니다.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그 영역.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이해해야 합니까?
저는 이 사랑을 성경 참 많은 곳에서 설명하곤 있지만,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기록된 말씀과 요한복음 13장 34절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열매가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근데, 이 사랑이 성령의 모든 열매의 기초됨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이 어떤 열매냐는 겁니다. 성경의 사랑은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사과열매나 포도열매 같은게 아닙니다. 성경의 사랑은 성령의 열매, 즉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라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또 요한복음 13장 34절, 어찌 기록되어 있습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랑의 기준’을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또 우린 예수님과 어떤 관계였습니까?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죄로 인해 원수 관계였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은 ‘내가 그리한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라’는 겁니다.
이 사랑은 그냥 ‘사랑합니다’ 인사 정도가 아닙니다. ‘형제님, 사랑합니다.’, ‘자매님, 사랑합니다.’ 같은 흔히 하는 인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단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본문 :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 1. 정체성의 잘못된 인식]
사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볼 법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걸 하나님은 왜 우리게 주셨을까?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우리게 주셨으나, 우리가 알면서도 못하는 이유 첫 번째는, ‘우리의 정체성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에베소서 5장 1절이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은 잊고 살아갑니다.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기보다, 내 힘으로 내 사랑을 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점점 조건부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지요. ‘너가 이렇게 해주면, 내가 사랑해줄게’ 단 한 번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한 적도 없는데, 우리의 본성이 너무나 악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건부 사랑을 보이는 것이지요.
물론 내 힘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원수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주변에 원수 사랑하는 것으로 어려워 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죠. ‘야, 나도 다 겪어봤어. 너 그 사람 사랑하지 못하는거 너가 악해서야.’ 결국 ‘나’를 높여버리는 삶의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 2.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런 삶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보다, 내 능력이 부족한가를 생각하게 되고, 내 마음이 너그럽지 못한가를 보게 되고, 내 속이 좁나를 보게 됩니다.
남미에서 사역하시는 한 선교사님이 쓰신 일기에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루는 선교센터에 현지 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합니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 모아둔 목재 창고가 불법이라며 경찰서장부터 말단까지 모두가 찾아와 협박을 했다는 겁니다. 물론 선교사님이 모아둔 목재는 합법적으로 구매한 것이고, 또 구매한 이유에 대해서, 그 나라의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는 선한 이유까지 설명했지만, 그들은 선교사님을 무조건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막무가내 태도를 보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랜 실랑이 끝에 그들이 본심을 드러냈습니다. 관행상 목재 값의 반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한화로 수천만 원에 달하는 돈을 요구하자, 선교사님은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겠다 답했고, 현지 사역자들은 경찰서장을 가까스로 설득해 미화 만 불로 조정했지만, 선교사님은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끝내 3천 불을 지급하고 없던 일로 하기로 마무리 짓고, 수소문한 끝에 어렵게 돈을 마련해 경찰서장에 전화를 했는데, 경찰서장의 통화연결음이 복음성가였다는 겁니다.
그때 선교사님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계시던 나라의 사람들이 어지간한 믿음 아니면 복음성가를 쓰지 않는 문화였는데, 전화 통화 연결음을 복음성가로 해놓았다면 경찰서장의 교회 내 위치가 꽤나 높았을 것이란 겁니다.
선교사님은 무거운 나무를 짊어지고 나르느라 생긴 통증이 너무 심해져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이러려고, 이 대접 받으려고 온 몸이 망가지고 부서져라 사역을 했던가.’ 그런데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선교사님은 일기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을, 인간이기 때문인지 도저히 내 힘으로는 내 안에 채울 수가 없어서 주님의 이름을 눈물로 부릅니다.
[본문 :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실 그 사랑]
우리의 정체성은 내가 우선시 되는 삶이 아닙니다. 내가 기준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준이고,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너 사랑하는거 알지?’ 고백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그리고 절대적입니다. 부모가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깨닳는 요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느끼는 사랑보다 훨씬 크고 경의로울 것인데, 그 사랑을 우리게 먼저 친히 행하고 계시다니,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또 우리 힘으로 사랑할 것 하나 없습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우리 힘으로 어떻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품어주냐는 겁니다. 못합니다. 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만 하는 겁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하게 해주세요.’ 가 아니라, ‘성령님, 내가 성령님을 의지하게 해주세요. 내가 성령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주세요.’를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옳은 말 같기는 하지만, 그 명령을 우리는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철저히 이기적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조차 우리는 우리의 의를 높임과 우리의 만족을 위함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성령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할 일은 다른거 없습니다. ‘나는 죽고 주님만 봅니다.’ 고백하고 간구할 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심을 정말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면, 우리 삶에 사랑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사랑해야 한다’가 아니라 ‘사랑하게 된다’ 입니다. ‘나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려 노력하는데, 참으로 힘듭니다. 너무 어려워요. 안심하십시오. 사랑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성령께서 온전히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 삶에 사랑의 작은 열매가 맺히면, 그 열매에 감사하십시오. 용서하라는 마음이, 사랑하라는 마음이 아주 작고 희미하기는 해도 마음 속에 분명히 역사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주 작고 희미하더라도 이는 분명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만 바라볼 뿐입니다.
[결단찬양]
주만 바라볼찌라
[기도제목]
1) 주만 바라보는 교회요, 우리가 되어 차가워진 세상 속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되게 하소서
2) 나는 죽고 주로 사는, 사랑하게 되는 우리 되게 하소서
3)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나누는 청년부 수련회가 되게 하소서
4) 준비하는 과정과 섬기는 손길, 참여하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움받는 시간 되게 하소서
5) 청년 지체들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 예수를 믿음이 진로에, 직업에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되는 이 시대에 오직 주를 바라보며 나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의 기도제목은 각자에게 가장 간절하고 귀함을 주님 앞에 간구한 것이기에, 우리 또한 그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옵소서’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아직 부르짖지 못한 청년 지체들의 기도제목과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더 나아가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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