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9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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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88 이 몸의 소망 무언가
본문 욥42:1-6
자비하신 아버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를 낙심케 만들고, 실망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다양한 시련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하게 만드는 다양한 세상의 부귀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임을 믿습니다.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상급이 있음과, 그 날 우리에게 주어질 지극한 영광과 아름다움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주 오래전 지구에는 메가케로스라는 학명이 붙은 거대한 사슴이 살았다. 이 사슴은 이름에 ‘메가' 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거대한 뿔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슴이 멸종하게 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만장일치로 이야기하기를, 그가 가진 뿔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 뿔의 무게에 눌려 번식하지 못하고 자연 도태되었다는 것이다. 감투에 눌려 자멸한 메가케로스의 비극이다.
이 사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전해준다. 내가 목을 곧게 하며 으스대며 교만히 살아가는 것은 결국 넘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경은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질 때 하나님을 더이상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질 때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진리 앞에서 더이상 겸손해하지 않는다.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는 4대째 신앙의 가문에서 자라왔고, 우리 집안에는 목사가 몇명, 장로가 몇명, 권사가 몇명이나 있고...” 이런 자들은 마치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진리에 대해, 복음에 대해 자신이 전문가인양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라. 고작해봐야 100년 남짓 살 뿐인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우리의 작디 작은 이성의 그릇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담아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마치 아주 작은 간장종지에 드넓은 바다물을 담아내려는 것 마냥,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진리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전부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심지어 죄로 부패한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만든다. 이러니 교회 역사 가운데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수많은 잘못된 해석들이 나오고,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수많은 이단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강조했다. “유한은 무한을 담아낼 수 없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대까지만 그분을 알 뿐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시는 부분 까지만 이해할 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복이다. 왜? 다 알려주셔봐야 우리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뿐더러, 많은 부분 하나님을 오해할 수 밖에 없으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욥기의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38장부터 42장까지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분명 욥은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실만한 의인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 4-5절 말씀처럼 그가 하나님과의 변론 가운데 자신의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유한한 인생이 어찌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생이 만왕의 왕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뭘 안단 말인가? 그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었다고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욥 조차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릴 정도였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해야 할까? 심지어 수많은 종교개혁자들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만들어졌던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들 역시 유한한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그 안에는 얼마든지 오류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겸손히 인정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유한한 인생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목이 뻣뻣할 수 있을까?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히 행할 수 있으랴.
오늘 이 부분을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은혜와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욥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죄의 몸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주님을 희미하게 알고 경험하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복락들을 이 땅에서 잠시 맛보며 살아가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신랑되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는 그 모든 것들을 완전히 깨닫게 되리라는 것이다. 지금 희미하게 보는 것들을 그 때는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고, 지금 잠시 맛보며 누리는 것들을 그 때는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아주 유명한 백화점 식품코너에 가면 다양한 시식코너들이 있다. 그곳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한두점씩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시식코너들의 음식들로 우리의 주린 배를 다 채울 수는 없다. 이쑤시개로 한 두개 꽂아놓은 것들로 우리는 만족을 누릴 수 없다. 오히려 그 맛보기 용으로 한두조각 짤라놓은 음식들로 인하여 완전한 그 음식을 먹고 싶게 된다. 온전한 1인분을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시식코너 제품들을 사람들이 많이 사가게 되지 않던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장차 우리에게 임하게 될 영원한 안식들을 잠시 맛보며 살아간다. 무엇을 통해서? 바로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배를 통해 안식을 누리고, 예배를 통하여 천상의 기쁨을 누리고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만, 이것은 장차 영원히 누리게 될 것들을 잠시 잠깐 맛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 땅에서 누리는 잠시 잠깐의 시식코너일 뿐이다. 시식코너의 그 맛있는 한 조각을 먹을 때 더욱 그 완제품을 먹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배를 통해 완전하고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고, 이 예배를 통하여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그 날을 더 갈망하게 되고, 이 예배를 통하여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갈망 속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만을 고대하며 그들의 신앙과 소망을 담아 이렇게 인사했다. “마라나 타!” 이 말은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이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땅의 부귀영화에 만족하지 않고, 이 땅의 것들로 주린 영혼을 채우지 않으며, 그들의 시선이 영원한 하늘나라에 고정된 채로, 이처럼 마라나타를 외쳤던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며 수많은 고난과 박해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 영원한 복락들을 맛을 보니까 더 찾게 되는 것이다. 완전하게 누릴 그 날, 그 순간을 고대할 수 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고 실패하게 만들려던 사탄마귀는 완전히 패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이 땅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초라하고 볼품없던 우리의 모습이 지극히 영광 가운데 맞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우리가 장차 누릴 완전한 복락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던 것들을 실제로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기독교 역사가운데 구원하시기로 택하신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 그토록 사모하는 우리 주님을 눈으로 뵈오며 그 영원하면서도 친밀한 사귐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평생에 듣고 부분적으로 알던 그 모든 복락들이 이제는 눈으로 직접 마주하고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니 그 날이 기다려지지 않는가?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을 간절히 바래왔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우리도 마라나타를 외칠 수 밖에 없게 되지 않는가.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질 이 땅의 것들은 우리 영혼의 갈함을 채워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으시고 위로하시며, 약속하신 영원한 복락들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실 그 날을 오늘도 사모하며 살아가시는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기도하자. 다시 오마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 날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락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주어질 위로와 영광과 상급들을 바라보며, 오늘도 주의 재림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 세상의 안개와 같은 것들을 붙잡기에 지나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영원한 상급을 붙잡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여정을 충성되이 감당하는 우리 되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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