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향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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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감사 - 데살로니가 교회, 그들의 믿음: 복음의 받아들임과 박해 가운데서도 지키는

혹시 선교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고 외국에서 우리가 믿는 것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설레는 일입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지요.
선교지에 가보면 체질에 맞는 사람들은 금새 티가 납니다. 어딜 가더라도 잘 먹고 잘 잡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을 잘하고 낯선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요. 스무살에 캄보디아로 선교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시장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노상에 좌판을 펴고 밥과 반찬을 구매해서 그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솥을 열고 밥을 양껏 푸고 나니, 알알이 까만 깨 같은 것들이 잔뜩 있습니다. 뭔가, 싶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개미인 것이지요. 그 날 많은 사람들이 더운 한 낮인데도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근데 저는 맛있더라구요.
기후도 환경도, 사람들의 문화도 관습도, 말도 다르다 보니 선교는 쉽지가 않습니다. 오래 머물면 향수병도 찾아오지요. 그런데 성경에 평생을 다 하여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럽에까지 선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이지요.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세 차례 나누어 진행한 전도여행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두 번째 여행 때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게 되었지요. 바울이 그곳을 떠난 후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교회를 향해 쓴 편지 두 통이 우리가 가진 성경에 남아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번째, 그리고 두번째 편지라는 뜻으로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이지요.
바울의 다른 편지에 비해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가 잘 주목되지 않지만, 사실 상당히 중요한 편지입니다. 성경에 수록된 바울의 이름으로 작성된 열세편의 편지들 가운데서도,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전서가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이기 때문이지요. 이 편지는 초기의 교회와 교회의 문제, 그리고 초기의 바울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편지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일은 어땠을까요? 요즘엔 전도하기가 참 어렵지요. 우리 교회에서도 권사님, 집사님들께서 전도대를 만들어 애써 전도하고 계시지만 사실 교회에 대한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새로 예수를 믿는 일은 정말 드문일이 되었습니다. 특히 30-40년 전과 비교하면 전도는 시간을 따라서 어려워진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럼 옛날엔 좀 더 전도하기가 쉬웠을까요? 몇해 전에 아주 큰 인기를 끌었던 [프로듀스 101]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요. 수많은 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 101명이 모여서 매 회마다 자기 실력을 겨루어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지요. 노래를 잘하는 사람, 춤 잘 추는 사람, 랩 잘하는 사람, 퍼포먼스가 화려한 사람, 저마다 다른 매력과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것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선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대사회의 종교도 비슷한 인상을 줍니다. 대구에 가면 몇몇 유명한 음식이 있는데 그 중에 '북성로 불고기 우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북성로에 가면 길 양쪽으로 포장마차가 쭉 늘어서 있습니다. 여기도 원조, 저기도 원조입니다. 원조 북성로 우동, 30년 북성로 우동, 저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얼마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 자랑합니다. 그런데 고대사회 종교가 그랬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신들이 저마다 자기 특기를 가지고서 얼마나 오래되고 정통성 있는지,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최신의 유행에 알맞은 종교인지, 저마다 자기 매력을 어필하면서 신전들이 쭉 늘어서 있었던 것이지요. 고대사회의 신들은 아이돌 연습생 만큼이나, 북성로 포장마차 주인들 만큼이나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커다란 신전, 화려한 종교 의례, 그 신을 주신으로 섬기는 도시의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사람들의 여유, 이런 것들로 ‘내가 얼마나 당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지’ 어필해야 했습니다.
그런 시대였으니 고대사회 전도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도들의 전도가 그랬지요. 왜일까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인데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동시에 '구원자'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황제,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들은 '구주'라는 뜻의 그리스어 '소테르'라고 불렀지요.
그러니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다’하는 사도들의 선포를 들으면 코웃음 치는 것이지요. 그 그리스도는 로마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재판정에서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썼던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사람들은 비웃었던 것입니다. '너희의 구세주를 우리가 섬기는 구세주 로마 황제께서 십자가에 매달지 않으셨느냐'하고 말이지요.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초기 교회 전도자들, 사도들이 뿌린 씨앗이 뿌리내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일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에게는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사도행전을 보면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을 보내다가 급하게 성에서 쫓겨납니다. 사역을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탈출하게 된 것이지요. 아쉽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데살로니가는 풍요롭고 부요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잘 모르는 도시였지요. 바닷길과 육지길이 있어서 오랫동안 상업도시로 기능했고, 특히 로마 황제의 사랑을 받는 도시였습니다. 심정적으로 로마 제국과 가깝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 로마 황제 편에서 자기 살길을 찾아왔습니다. 진심으로 황제를 존경해서라기 보다도, 유명한 상업도시인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자기 생명과 부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이지요. 그들은 살아남는 방법, 살아남기 위해 어느 편에 서야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도시였습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싶기도 하지만, 달리 말하면 처세에 능하고, 내 이익 되는 것이 무엇인줄 아는, 상인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발달한 도시인 것이지요.
놀랍게도 그런 도시에, 바울이 채 한달도 머물지 못한 도시에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다. 그는 첫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의 택하심을 아노라.”
우리가 바울의 마음, 다 짐작할 수는 없지만 우리도 해마다 비슷한 감사 인사를 듣곤 하지요. 올해도 창립기념주일에 원로목사님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게 하시고, 교회가 은혜가운데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감사하다, 하고 말입니다. 원로목사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께서는 그 감사의 인사의 질감을 함께 공감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울의 마음이 그런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의 편지 - 다가오는 종말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 위로를 위하여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우들은 너무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어려움이 가슴에 사무쳤겠지요. 두 편의 편지가 그 아픔 가운데 작성되었습니다. 첫번째 편지는 교회 안에 ‘종말’을 오해한 사람들 때문에 어수선한 교회를 진정시키기 위해 작성했습니다. 오늘 읽은 두번째 편지도 교우들의 어려움을 수습하기 위해 작성되었는데,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박해와 환난을 겪고 있었다고 말이지요.
편지만으로는 이 박해와 환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데살로니가 도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유추해볼 수는 있습니다. 첫번째는 법적인 다툼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는 유대인들의 고발을 당해 어려움을 겪고 그 도시를 빠져나옵니다. 사도를 적대했던 유대인들은 교회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데살로니가의 교회 역시 사도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그리스도시다,하는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을 가감없이 선포했을테니 말이지요.
두번째 문제는 사회적인 단절과 고립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수를 믿지 않다가 믿어서 이전의 관계가 조금씩 단절되는 경험 말입니다. 우리 말에도 그런 표현 있지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라.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그랬다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갑자기 죽은 유대인을 그리스도로 믿더니, 정신이 나갔나보다, 갑자기 죽을 것처럼 딴 사람이 되었다,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전에 맺던 관계들이 끊어지고, 사회적 관계들이 단절됩니다.
세번째 문제는 두번째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이지요. 앞서 말씀 드렸다 시피 로마 사회는 황제 숭배를 장려했는데 데살로니가는 그 중에서도 유별났지요. 실제로 그들 도시의 풍요와 부요함, 그리고 안전함은 황제가 준 특권의 은혜였습니다. 고대사회에 도시의 종교라는 것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예전에 우리 나라에서 하던 '국민의례' 같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학생들도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해야 했습니다. 거기서 안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황제 숭배 하지 않으면서 이상한 사람들, 정치적으로 불순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이들이 당한 박해, 이들의 환난이 굉장히 복합적인 것이지요. 황제숭배라는 시민종교에 참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보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의심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거래처가 끊어지고, 신용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교회가 된다는 것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경험한 박해, 너무나 현실적인 환난이었던 것이지요.
예전에 나이 지긋하신 권사님들께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종갓집에서 혼자 예수 믿어서 쫓겨나실 뻔 한 적이 있다고. 그런 분들도 계시지요. 어쩌면 데살로니가 교회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경찰에 잡혀가고,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법정에 재판을 받고,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들어야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첫번째 편지에서의 감사는 애끓는 마음으로 뒤바뀝니다. 바울이 그 마음 잘 알기 때문이지요. 바울도 한때는 주류에 속한 다수자였습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지요. 그런데 예수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그는 비주류, 소수자가 됩니다. 믿어 박해받는 사람이지요. 그 이후에 그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됩니다. ‘믿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는 사람이지요. 고난의 크기만 따지면 예수때문에 그 사람만큼 아파본 사람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나도 안다. 나도 다 겪어 본 것이다.'하고 남의 고통, 대수롭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항상 유모처럼, 아버지처럼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이 고난을 지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부모된 우리는 이런 마음 알지요. 아이들이 아픔을 겪을 때 어떤 아픔은 금새 지나가고, 또 그것 지나가면 약이 될 것 알지만 아파하는 그 순간엔 내가 대신 아파했으면 할 정도로 안타까운 마음, 그 마음이 바울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위로’하기 위해 편지를 쓰지요. 박해와 환난당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붓을 듭니다. 그런 바울의 편지를 보면 어딘가 바울답지 않은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6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 한마디로 요약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원수, 여러분 박해하는 그 나쁜 사람들, 혼내주실 것입니다.’
속이 시원하고 통쾌합니다. 우리가 다들 복수극을 재밌게 보는 것처럼, 답답한 마음 시원하게 긁어줍니다. 그런데 이 말이 바울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종말의 심판을 믿긴 했지만 그에겐 근본적으로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 “하나님은 (악인이라 하여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바울은 자신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악인이라도 구원받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의 가장 큰 적대자, 그리스도의 핍박자, 괴수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예수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원수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바울에게 종말은 악인들의 영원한 형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때처럼 완전해지는 순간,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온전한 친밀함이, 화해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지요.
그래서 저는 바울의 믿음과 어울리지 않는 이 말이 진지한 신학적인 성찰이 담긴 것이라기 보단, 농담섞인 너스레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그럴때 있지요. 힘들고 어려운 일, 감당하기 무거운 일이 닥쳤을 때 누군가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처럼 너스레 떨면 정말로 그만큼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환난 중에, 박해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려고 바울은 너스레를 떱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잘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괴롭히는 사람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러분도 잘 아시죠? 여러분도 예수의 가장 큰 박해자가, 지금 가장 큰 고난 가운데서 복음 전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박해하는 사람, 그 사람들은 박해한 만큼 저처럼 예수를 위해 고난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저는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바울의 이 너스레 떠는 말 듣고서, 너털 웃음을 터뜨렸을 것 같습니다. 그 웃음 만큼 그들의 아픔이 조금 가벼워졌겠지요. 데살로니가 교우들이라고 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 몰랐을까요. 우리도 그렇지요. 아는데 그렇게 살아지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말씀을 진지하게 여기면 여길 수록 우리가 그 사이에 끼여 괴로운 날들 많지요. 데살로니가 교우들도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모진 마음 들면서도, 한편 떠오르는 주님의 말씀이 더 큰 괴로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너스레가 그들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위로를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귀한 편지를 통해 농담만 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진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밝혀줍니다. 4-5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이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교회들에게 여러분을 두고 자랑합니다. 여러분이 인내와 믿음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박해와 환난을 견디는 그 인내와 믿음,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식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위로합니다. 그 환난과 박해가 드러내는 믿음과 인내가 우리를 주 안에서 발견되게 할 것이라고, 미래의 소망을 주는 것이지요. 그저 고통스럽고 괴롭기만한 고난 아니라, 이 고난이 믿음 나무에 양분이라는 것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내일을 향한 시작이 되는 위로

하나님은 그렇게 바울을 통해 교회를 위로하십니다. 저는 바울의 이 과장된 어투의 편지글 속에서 큰 어려움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부르심 따라 인내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야, 너희들 참 잘 살고 있구나. 그렇게 어려운데도 너희가 신실함을 지키는 모습을 보니, 참 보기가 좋구나.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을텐데, 손해보는 것을 생각하면 타협하고 싶기도 할텐데, 사는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을텐데, 그런데도 너희의 믿음이 날이 갈 수록 커져가고, 서로 사랑하는 일이 날마다 더해가다니, 너희들 참 잘 살고 있구나.”
우리가 하나님께 이런 말 들을 수 있으면, 힘이 날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실패하고, 인정받지 못하여도, 우리가 믿음에 떳떳하고 11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하고 인정받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잘 살고 있구나, 하고 이야기해주시면 큰 위로가 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너무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로, 경제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관계의 문제, 직장에서의 문제, 혹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신체적인 문제, 내일을 바라보면서 경험하는 불안과 두려움의 문제, 그 문제에 어려움 겪는 분 계십니까? 그런 가운데서도 힘들지만, 믿음 지키려 애쓰시는 분 계십니까? 혹은 믿음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뒤따르기 때문에 환난을 겪는 분 계십니까? 그런 분 계시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야, 너 참 잘 살고 있구나," 그 가운데서도 믿음의 길을 따라 지키며 걸어가는 삶을 향해 보기 좋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참으로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위로의 하나님이시지요.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종종 봅니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을 위로하시지요. 엘리야에게도 그러셨습니다. 호렙산에서 850명의 우상 숭배자들에게 홀로 맞서 이긴 엘리야가 그 이후에 탈진합니다. 완전히 소진해버린 그를 왕비 이세벨이 허풍 섞인 말로 협박하자 그는 두려움에 눈 앞에 캄캄해져 주저앉습니다.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그 숨 거두어 달라고 청원합니다.
그 때 하나님 어떻게 하시냐면, 그를 재우십니다. 천사를 보내어서 잠든 그를 깨워 배불리 먹이시지요. 그리곤 다시 깊은 잠에 들게 하십니다.
예수께서도 참으로 위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도 보지 못하고 두려움에 도망친 제자들 대부분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갈릴리로 돌아간 베드로는 예전에 놓은 그물 다시 집어 들지요.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고 빈손으로 뭍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주님이시다’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뭍에 채 이르지도 않은 배에서 뛰어내려 한달음에 달려가지만, 더 이상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고 뭍에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지요. 그 때 숯불에 떡 굽고 계시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그리고 다시 '와서 먹으라'말씀하십니다. 아무런 책망 하지 않으시고 말이지요.
하나님은 참으로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 하고 못하고, 그런 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때로 우리의 불경건한 기도마저도 들으십니다. 너무 힘들고 괴로우면, 남들에게 다 말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우면 맘에 없는 말하는 것이 사람인줄 주님도 아시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쉽고 가벼운 자신의 멍에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엘리야와 베드로의 그 헛헛한 속을 채우시듯, 우리를 주님의 따뜻한 위로로 채우십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그저 어루만지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엘리야를 먹이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엘리야를 먹이신 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산에 이르라.” 엘리야에겐 그래도 가야할 길이 남아 있었습니다.
구운 떡과 물고기가 뱃속을 따뜻하게 채웠을 때즈음,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하면 나의 양을 먹이라. 나의 양을 치라." 베드로에게도 여전히 가야할 길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모든 짐 훌훌 내던져 버리고 그저 편안히 쉬게만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그 길이 사역이든, 사명이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생에 이루어가야할 성화의 삶이든, 우리에겐 저마다 주어진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순례자'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걸어가야 할 길을 앞에 두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위로는 우리가 다시 일어서 걸어갈 힘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합니다.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되기를" 가야할 길을 알고 주님의 위로를 힘입어 가야할 길을 가는 사도와 교회가 주 안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재회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것이지요.
성도님들께서 가야할 길은 어느 길이십니까? 우리가 주 안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는 자들로 발견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위로로 힘을 얻고, 내일을 향하여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 복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셔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삶 역시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되시는 복된 은혜가 함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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