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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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 2장 2-3절(구약 2쪽)
설교제목: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사실 야행성이라, 새벽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사실은 좀 버겁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새벽형 인간으로 탈바꿈해가고 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요사이 저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주의 말씀이 저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보통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서 한 두어 시간 잠을 자고 출근하였는데요. 요사이는 새벽기도회 후에 다시 사무실로 내려와서 설교 준비하다가 아침 해를 맞이 하는 일상을 되풀이 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하면,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나 봅니다. 절대로 못버틸까 했는데, 또 어떻게 어떻게 그 새벽의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해 봅니다. 아마 새벽기도회 나오시는 분들은 아실 텐데요. 담임목사님도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곧장 목양실로 가십니다. 그 이후의 행보를 잘은 몰라도 아마도 아침까지 주어진 사역들을 하시는 듯 보입니다. 뭐 제가 요 며칠 비슷한 상황을 맞이해 보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주어진 사역을 다 소화하지 못할 수도 있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나름 저는열심으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 저보다 이른 아침부터 땀 흘리며 수고하시는 분들이 더 많으실 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그의 저서 “피로사회”를 통해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세계화의 분위기 속에서 성과중심주의에 내몰려 있고 끝임없이 자기 개발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자기를 착취하고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태에 내 몰리게 됩니다. 그 제목이 주는 공감대가 있어서 그런지 이 책은 한때 베스트셀러로 세간의 관심을 모으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책의 내용은 몰라도 ‘피로사회’라는 제목정도는 익숙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오늘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요사이는 모두들 그렇게 열심히 일합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느라 분주한 날들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일터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어린 아이들은 학교의 수업을 따라가느라 늦은 시간까지 학원을 전전해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교육전도사였던 시절에 어린이부서를 담당했는데요. 그 부서에 속한 아이 중 부모님이 맞벌이 하는 아이는 저녁 10시까지 학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부모입장에서 아이를 맡아줄 마땅한 곳이 없기도 했겠지만, 그와 같이 교육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쳐질 것 같다는 생각이 또 한 몫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나마 다행인지 여기 황등에서는 종종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고, 아동센터를 통해 다양한 체험 학습을 경험하기도 하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 사회는 무한경쟁에 돌입하였기에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분주하고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좀 생각해 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전에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 나눈 적이 있습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선한 사마리인의 실험’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실험을 설계하고 인간은 어느 때 다른 사람을 돕는지를 관찰하는 연구였습니다.
실험방법은 이러했습니다. 우선 3가지의 조건이 필요했는데요. 첫째는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이는 전문 연기자를 섭외해서 연기하도록 했습니다. 둘째는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이는 당시 프린스턴 대학의 신학생을 선정하였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 그들에게는 다른 과제를 줬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선정된 신학생은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눠서 각각 다른 주제로 발표하게 했습니다. 하나는 목회자의 소명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여리고로 가는 길입니다. 이는 프린스턴 대학의 뒷골목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실험은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선정된 프린스턴 대학의 신학생이 자신이 맡은 주제를 발표하기 위해서 여리고로 가는 길인 프린스턴 대학의 뒷골목을 지납니다. 이때 강도 만난 자의 역할을 맡은 연기자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것을 연기합니다. 이때 누가 이 강도 만난자를 돕는지를 살펴보는 실험입니다.
이 실험을 설계한 두 명의 심리학자는 아마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발표하는 신학생이 더 곤란에 처한 연기자를 잘 도울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신학생의 발표 주제와 관계없이 시간이 없다고 재촉받은 신학생은 곤란에 처한 연기자를 돕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시간을 재촉받지 않은 신학생은 모두 그 곤란에 처한 연기자를 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실험의 결론은 그렇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선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여유라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로부터 생각합니다. 우리가 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현대사회를 피로사회로 진단하고 있으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험 속에서 바쁜 삶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지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주일을 지키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될 수 있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만 의미를 가지는 이야기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에는 보다 깊은 차원의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관련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노동을 잘하기 위함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엿세 동안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안식이라거나 안식함을 통해 다음 노동을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온 생각입니다. 그는 ‘우리가 계속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쉼이 필요하고 쉼은 우리 삶에 목적이 될 수 없음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안식이 먼저임을 얘기하는데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흥미롭게 얘기합니다. ‘영어로 휴식을 rest인데 이는 휴식이라는 뜻도 있지만 나머지라는 말도 뜻도 있습니다. 인간은 휴식을 함으로 나머지를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은 노동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노동보다 앞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노동이 안식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노동에 또 일상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에 이르는 시간을 말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이야기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깐 본래 유대인들에게는 아침이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뭐 저녁이라고 해도 깜깜한 밤이라기 보다는 대략 오후 5시 무렵을 말합니다.
그렇기 유대인들의 기준에서 보면, 안식일은 금요일부터 시작이고 날짜상으로 일곱번째 날은 토요일이 됩니다. 주일부터 날짜를 세는데요. 일,월,화,수,목,금토하면 일곱번째 날이 토요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독교 이단 가운데 하나인 제칠일안식교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에 따라 예배를 꼭 ‘제칠일에 해당되는 토요일’에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일 곧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바로 일요일 곧 여덟번째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해서 주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날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에 따르면, 주일은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를 따로 떼어 놓은 것이지 특별히 다른 날에 비해 그 날이 더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실 안식일을 토요일로 하든 주일로 하든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이것에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서 주일을 일요일로 지키는 것을 뿐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주일을 잘 지키라는 말 곧 주일에 예배 잘 드리고 교회에 매여 있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안식 곧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동을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노동이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노동은 하나님이 창조의 과정을 통해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찍이 아담과 하와에게 ‘다스리라’라는 명령을 주셨는데, 이 다스리라는 말의 히브리어적 의미가 ‘밭을 갈다’, ‘경작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노동은 사실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것과 더불어서 안식 또한 신성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이 사실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구약성경 창세기 2장 2-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우리는 보통 창조의 완성을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창조는 6일째에 끝났고 7일째에는 하나님이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창조의 과정은 마지막에 가장 특별한 것이 위치하게 배치되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창조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고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요. 사실 창조의 완성은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 근거해서 안식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날과 다르게 일곱째 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서 “일곱째 날”이라는 표현을 세 번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강조를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참고로 여섯째 날까지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른 날에서 ‘보시기에 좋아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독 일곱째 날에서만 ‘이 날을 복되게 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날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보이는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오히려 다른 날에 비해 이 날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노동을 하는 것도 안식을 하는 것도 모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안식을 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우리는 안식을 통해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만드셨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엄청난 질적인 차이가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처럼 세상을 창조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안식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안식한다는 것은 또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고귀한 존재로 거듭나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경쟁 속에서 살아감으로 늘 피로에 물들고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그 경쟁 안에서는 모두가 상처받는 존재로 살게 됩니다. 경쟁에 이렇게 저렇게 치이고 경쟁에서 패배한 쪽뿐만 아니라 승리한 쪽에게도 적잖은 상처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끝임없는 경쟁 속에서 늘 자신이 처한 자리는 위협받습니다. 당장에 우위를 잡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패배를 경험한 이들은 존재의 가치를 점차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삶에서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의 가치는 축소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안식이 필요하고 안식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과 같이 고귀한 존재로써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그저 쉼을 취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안식의 방법일 것입니다. 또 노동 자체가 안식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노동과 안식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기에 신성한 것입니다.
만약 안식이 그저 쉬는 것이라면, 우리는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기 보다 각자 산과 들로 흩어져 이른바 휴식과 여가를 보내야할 것입니다. 게다가 노동을 피해야하니 우리는 직업을 갖지 않아야 할지도 모르죠. 그리고 안식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니 과장해서 말하자면, ‘백수건달’이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구약성경 이사야 61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낭독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의 사역을 예고하시고 안식일의 의미를 얘기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묵였졌던 것이 풀어지는 날입니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날입니다. 우리는 무한경쟁 속에서 우리를 옥죄는 세상의 가치들에 묶이고 매여서 살아갑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그러한 세상을 이뤄가는 일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냥 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 가치와 그것에 따른 활동을 정지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저 나의 휴식을 도모하는 일로 그쳐서는 안 되고 내 이웃 혹은 사회적 약자들이 같이 안식을 누리는 일에 관심가지고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만을 위한 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모든 사람들이 온전한 삶을 누리고 회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날인 것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저와 우리 성도 분들께서 이 안식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날을 거룩히 지킴으로 세상 가운데 여전히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안식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위해서 관심가지며 위해서 기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뤄가는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치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