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이야기-하나님의 뜻(섭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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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 135편 6절(구약 901쪽)
설교제목: 기독교교리 이야기-하나님의 뜻(섭리론)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는 좀 익숙해지려나 하는데요. 여전히 저한테는 어색한 느낌이 있네요. 기억하시죠. 저처럼 이렇게 활짝 미소 짓고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서로 인사 나누고
오늘은 준비한 영상이 하나 있어서요. 먼저 영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영상: 5분 20초(영화 ‘생일’ 클립)
오늘도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교리에 관한 얘기를 나눌 것입니다. 오늘 나눌 이야기는 이른바 ‘섭리론’인데요. 섭리라는 말은 한자어 다스릴 섭(攝)과 다스릴 이(理)가 합쳐져서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국어사전 의미로는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또는 신학에서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른데요.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쉽게 말하면 섭리론은 하나님의 뜻에 관한 교리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지난 시간에 나눈 삼위일체론과 오늘 나눌 섭리론을 보통 ‘신론’이라고 분류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오늘 나눌 이야기와 지난주에 나눈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는 것에 관한 교리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지식 안에 갇혀 계신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교리를 배움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아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한편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본 영상은 아마 짐작할 수 있을 텐데요. ‘2014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생일’이라는 영화를 소개하는 영상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게 일으킨 충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건 속에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봅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또한 생각해 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곤 합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고 반대로 나쁜 일이 있으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도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방금 얘기한 세월호 사건의 경우가 그렇기도 하거니와 이 세상과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서 선한 면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한 악한 면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 한 사회에서 정의와 불의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반드시 나쁜 일 또는 불행한 일을 하나님의 벌로써 이해하기는 참 힘듭니다.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지만 사실은 이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릅니다.
이와 관련된 18세기의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관련 그림을 준비했는데 화면에 띄워주세요.
# 그림:
João Glama Strobërle,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
이것은 18세기 포르투갈의 화가 ‘주앙 글라마 스트로베를레(João Glama Strobërle)’의 ‘1755년 지진의 알레고리’라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1755년 11월 1일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만성절(萬聖節) 곧 ‘모든 성인의 축일’이라고 하여서 여러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규모 8.5-9 정도의 큰 지진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는데요. 당시 리스본 인구를 2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요. 이 리스본 대지진으로 최소 1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의 사망자가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는 역사상 가장 사망자 수가 많은 지진으로 기록됩니다. 게다가 지진으로 5일간 화재가 계속되었고 여진과 쓰나미 등으로 당시 리스본의 건물 85%가 파괴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관한 당시 교회의 메시지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이것이 리스본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그림에도 하늘에 천사들이 칼을 들고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 비웃음을 사게 되죠. 왜냐하면, 대부분 피해를 본 것은 교회였고, 이른바 리스본 타락의 원인으로 지목받은 홍등가는 피해가 훨씬 적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이전과 같이 교회를 신뢰하지 않게 돼죠. 그 과정에서 교회를 떠나기도 했고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단순화시켜서 이해한 것에 따른 문제임을 볼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그것이 오늘날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세월호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코로나 상황 속에서 교회는 종종 엉뚱한 답이나 세상을 근심하고 염려하게 만들 메시지를 내놓곤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너무 간단한 도식으로 이해하고 억지로 꿰맞춘 것에서 비롯된 문제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성경적 이해의 부족이라고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시편 135편 6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방금 읽은 성경 구절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주목해 볼 표현이 있는데요.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말이 됩니다. 본래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단어가 없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는 그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10절 주기도문에 나오는 구절이 있죠.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 이뤄지이다’ 여기서 ‘뜻’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로 ‘텔레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본래 ‘원하다, 바라다, 기뻐하다’라는 뜻의 동사 ‘텔레오’에서 온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더 앞서 시편의 경우처럼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원하시는 것’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시편 135편 6절의 구절을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뜻이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이뤄졌도다’ 그리고 이것을 주의 깊게 보시면 앞서 말한 마태복음 6장 10절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좀 얘기가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을 텐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딱 정해진 어떤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언제 기쁨을 느낍니까? 일단 부모의 기대를 아이가 잘 따르고 있을 때가 되겠죠.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지낼 때겠죠. 그런데 꼭 부모의 기대를 이루지 않더라도 아이의 뜻밖의 행동이 부모를 웃게 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예가 적절할진 모르겠지만,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얘기해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아이가 없습니다. 물론 아내도 없습니다. 그래도 동생 덕분에 조카는 무려 셋이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내향적인 편이라, 조카들에게 그다지 살가운 삼촌은 아닙니다.
그래서 명절에 한 번씩 보는 조카들도 저를 낯설어합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은 편인지 종종 저에게 다가와 보곤 합니다. 그래도 이내 엄마인 동생에게 또 저보다 살갑게 대해주는 할머니인 저의 어머니에게 도망치듯 달아나곤 합니다.
제가 먼저 조카들을 더 환대해주면 좋겠지만, 저도 쑥스럽고 해서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러다가 동생인 엄마의 꿰임에 저와 조카들이 넘어가 제가 조카들과 손잡고 마트에서 간식을 사주곤 합니다. 그러면 갑작스레 부쩍 친해져서 이전보다 저에게 대한 경계심이 풀어집니다.
그런데 명절에 한 번 보는 삼촌이니 명절 때마다 이 일은 되풀이됩니다. 조카들과 거리두기를 하다가 간식을 사주고 친해지는 일 말입니다. 제가 조카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카들의 그런 행동들이 제 안에 기쁨이 되곤 합니다.
제가 부모가 아니라서 더 적절한 예를 들진 못했지만 대략 어떤 느낌인지는 아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정답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만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어떤 행동들이 하나님께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뜻은 무궁무진합니다. 딱 이렇다고 꼬집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신학적인 도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에 조금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영국의 레슬리 웨더헤드라는 20세기 신학자는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법에 관한 좋은 도구를 우리에게 소개해 줍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은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남을 얘기합니다.
우리 눈에는 빛 대략 흰색으로 보이는데, 그 빛을 프리즘이라는 빛을 굴절시키는 도구에 놓아보면 여러 색깔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가령 무지개색이 대표적인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의 하나님의 뜻이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여러 갈래로 나눠질 수 있다는 거예요. 레슬리 웨더헤드는 이것을 크게 셋으로 구분하여 얘기합니다. ‘의도적 뜻, 상황적 뜻, 궁극적 뜻’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칠 때, 훌륭한 인격체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것이 궁극적인 뜻이라면, 훌륭한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게 만드는 것이 의도적인 뜻이죠. 그런데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준다거나 하는 것이 상황적인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궁극적인 뜻이라면,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의도적인 뜻인데요. 우리가 어리석고 죄된 속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라 살지를 못하니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이킬 어떤 시련을 주시죠. 그것이 상황적인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있어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많이 내어주는 것, 또 하나님이 우리가 회개하도록 시련을 주시는 것이 누구의 잘못인지를 말이지요. 사실 이것은 하나님과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와 학생의 잘못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자주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때가 많아요. 아까 리스본 대지진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이 벌을 내린 것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세월호 사건과 코로나 등등을 말이지요.
하지만 그 문제의 원인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레슬리 웨더헤드의 이야기에요. 방금 말씀드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그의 신학적 도구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선생님이 숙제를 많이 내어주는 것은 학생들의 태만함에 따른 문제이고 하나님이 시련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죄에 따른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세상에서 일어난 악의 문제에 하나님은 책임이 없으시다는 것을 말이지요.
성경도 이를 증거하고 있는데요. 같이 성경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1장 13절입니다. 신약 371쪽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이 악이나 불행의 근원이 아님을 얘기합니다. 이를 통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고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행이나 악을 가져다주시는 분은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맨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세월호 사건과 같은 불행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사실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도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아까 레슬리 웨더헤더의 이야기처럼,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행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임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지, 결코 악한 길로 내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관련된 성경 본문 하나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7장 17절 말씀입니다. 신약 155쪽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노력하면 우리는 그 뜻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일보다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이 훨씬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주님의 뜻을 완전히 모르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때로 명시적으로 그 분의 뜻을 알리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살고자 할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조차 벅찬 일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끝내 이렇게 결단 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바라건데,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과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삶에서 믿음가지고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그 믿음 안에 살아가는 저와 우리 성도 분들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잠깐 같이 기도합시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향한 믿음 가지고 주님의 뜻 안에 살아가게 해달라고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을 이룰 수 있게 해달라고요. 이를 놓고 함께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