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곳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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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views1. 돌아오는 탕자 2. 기다리는 아버지 3. 집 안에서 길을 잃은 또 다른 탕자 4. 각자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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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탕자
돌아오는 탕자
여러분 우리 수련회 얼마 안남았다는 것 알고 있어요? 진짜 발등에 불떨어진 느낌이에요.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떨리기도 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매일 수백번씩 들더라구요. 여러분들과 함께 하면서 은혜를 나누고 싶은데.. 여러분들이 고민하다가 안가는 사람들이 많을까봐 걱정도 되고..
여러분을 위한 수련회라는 것 알죠? 교제하고 먹고 은혜를 집중적으로 받고 나눌 수 있는 여러분 나 자신을 위한 수련회에요.
올해 등록한 청년들과 기존에 있었던 청년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인 수련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래요.
(쉬고)
탕자의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알거라 생각해요. 탕자가 어떻게 집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려고 해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어느 날 탕자가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가 죽으면 받게 될 유산을 나에게 달라"라고 협박을 하죠.
고대 근동에서 그리고 지금도 그 지역에서 재산을 나누어주는 시기는 아버지가 죽기 직전이에요. 아버지가 건강할 때 재산을 나워주는 법과 풍습은 없어요.
만약 아버지가 아직 건강한데 아들이 가서 재산 상속을 요구한다면 ‘후레자식'이라고 불리었어요.
왜냐하면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 왜 아직도 살아있어요? 나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에요.
탕자가 아버지에게 “내 몫을 달라"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아버지 제 앞에서 빨리 사라지세요. 죽으세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탕자는 통제와 잔소리를 벗어나고 싶었어요.
자신을 긍정해주는 또래 집단이 훨씬 좋았던 것이죠. 그래서 기회만 되면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있었던 거에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탕자와 가족이 살고 있던 도시는 우리 소망이가 살고 있는 시흥 인구가 48만 정도 하던데 딱 그 정도 규모의 지역에서 살고 있었어요.
탕자의 마음 속에 이 작은 도시를 벗어나서 인천과 같은 큰 도시로 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인천 인구가 약 300만인데, 탕자가 살고 있던 곳 옆 도시인구가 최소 300만이나 되었거든요.
이런 작은 동네는 자신을 품을 수 없는 없다 생각한거에요.
그래서 더 큰 도시에 가서 나의 큰 꿈을 펼치겠노라! 라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욕망이 점점 더 커져가면서, 해서는 안되는 행동 “아버지 빨리 나가 죽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있는거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참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그의 뜻대로 재산을 분할해서 나누어 주어요.
아버지의 명예가 실추되고, 동네에서 조롱거리가 될만한 행동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꺼이 기회를 주기로 해요.
그 몫을 받은 탕자가 바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혹시 알고 있어요?
맞아요. 다 가져다 팔았어요.
왜냐하면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들 대부분이 논, 밭과 같은 땅이었거든요.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땅에서 나는 모든 소득은 아버지의 것이었어요.
탕자도 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 팔아넘겨요. 원래 시세가 예를 들어 1억이라고 하면, 7-8천에 아주 싸게 넘기는거죠.
빨리 처분해서 현금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훨씬 싼 값에 넘기는거에요.
탕자가 땅을 파는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은 “아 저 집안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탕자는 그 이상으로 제 정신이 아니다.”라고 했을거에요.
유산 분배를 요구하는 것 자체도 굉장히 무례한 것인데, 아버지가 당연히 가져가야 하는 땅의 소득과 처분해야 하는 권한을 무시하고 탕자가 판 것은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아버지는 없다.” “내 부모는 죽었다.” “나는 그들과 아무 상관없다.”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죠.
(쉬고)
땅을 팔기 전까진 아버지 개인에게만 “빨리 죽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지만, 땅을 팔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는 죽었습니다.”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과 같은거에요.
(쉬고)
그렇게 길을 떠난 탕자는 모든 돈을 다 잃어버리고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죠. 탕자가 선택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나요?
돼지치는 일이죠.
탕자가 돼지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제가 어려워졌고 자국민들조차 일 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자국민들에게도 일을 시킬 수 없는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죠.
어떻게 어떻게 일자리를 찾았는데 그게 돼지치는 것이었어요.
유대문헌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어요.
“돼지를 치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라"
“돼지치기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두려워해야 함"
유대인들에게 돼지는 굉장히 불결한 동물이에요. 그런 불결한 동물을 돌보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인데, 돼지를 친다는 것은 안식일조차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를 가져요.
유대인으로써 굉장한 수치를 느끼며, 세상 저 밑바닥 인생이라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 뿐 아니라, 예배조차 드리지 못하게 되면서 유대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말해요.
그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었다고 하잖아요? 여러분 돼지 먹이를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열매조차 없었어요.
돼지가 먹는 열매가 깨끗하냐 더럽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의 자존심과 존엄성이 완전히 뭉개져버린 상황, 스스로 목숨을 연명해 나갈 길이 없는 상황이 지금 탕자의 삶인거죠.
(쉬고)
그 밑바닥 인생을 살던 탕자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집이 떠올라요. 그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이라도 넉넉히 먹는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이죠.
그런데 집에 돌아갈 수가 없어요.
스스로 “아버지 죽어라! 아버지는 죽었다!”라고 말하고 나왔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절교하고 나왔잖아요. 더 이상 아들이라는 위치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겼기에 생각만 하고 마는거에요.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게 되어요.
18-19절 함께 읽어볼까요? 시작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여러분 탕자는 정말로 회개했을까요? 정말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을까요?
아니에요.
그는 용서와 용납과 같은 회복을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저 재산탕진과 기근으로 인해 당하게 된 상태를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에요.
지금 이 힘든 상황만 일단 모면하자. 그 이후는 그 때가서 생각하자. 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지금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머리속으로 엄청나게 많은 대화를 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면 나도 이렇게 말해야지’
‘아버지가 화를 내시면 무릎을 꿇어야지’
‘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서 화를 좀 덜 내게 만들어야지'
‘조금만 참자'
기다리는 아버지
기다리는 아버지
탕자가 어떤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왔을까요?
깔끔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아니면 해어진 신발과 누더기 옷과 냄새나는 모습으로 돌아왔을까요?
거지꼴을 하고 돌아왔을거에요. 누가봐도 탕자인지 아닌지 전혀 알아 차릴 수 없는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쭈삣쭈삣 거리면서 걷고 있는데 저기서 누군가 막 뛰어와요.
20절 하반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멀고 거지 행색을 하고 있어도 아버지는 알아 봤어요. 어떻게 저 멀리 있는데 한번에 알아봤을까요? 시력이 8.0이라도 되었을까요?
아버지는 탕자가 실패하고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죠.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그 순간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사람들이 엄청 조롱했을거에요.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해. 아들하나 제대로 못 키웠는데"
“바보같이 다 빼앗겨놓고 왜 저러고 서있는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좀 저 사람 미친 것 같아" 등 아버지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동네 모든 사람들의 가십의 중심이었을거에요.
그런데 지금 또 다른 조롱과 가십거리를 사람들에게 제공해주고 있어요.
건강하게 살아있을 때 재산을 나누어준 것도 큰 문제가 있는데, 이번에 또 사회적 관습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거든요.
중동지역의 남자 어른들은 뛰어다니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옷차림과 웃는 모습 그리고 걸음걸이가 곧 인품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거든요.
긴 옷을 입고 뛰는 행위는 발목을 노출하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라 여겼어요. 남자 어른이 발목을 보인다는 것은 자기를 자제하지 못하는 행위로 여겼거든요.
하지만 지금 아버지에게는 그런 사회적 관습, 인품 다 필요 없어요.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돌아왔거든요.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달려 나갈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유대 사회에서 탕자와 같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을 케차차 의식이라고 불러요.
질그릇 항아리에 태운 콩과 태운 옥수수를 가득 채워요. 그리고 탕자와 같은 사람 앞에 집어던져서 깨뜨리고
“너는 백성으로부터 끊어졌다!!”라고 외치면서 뱅글뱅글 돌았어요.
만약 탕자가 이러한 행위를 당한다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어요.
완전히 추방당하는 거에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는 완벽한 단절의 상황이 오는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뛸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사람이 탕자를 발견하면 아버지로써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때문에 입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
달려가서 안고 입을 맞출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집 안에서 길을 잃은 또 다른 탕자
집 안에서 길을 잃은 또 다른 탕자
마을과 문화 등 모든 관습을 깨고 달린 아버지가 아들에게 새 옷과 신발을 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어준 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이기 시작해요.
잔치가 무르익어갈 때, 자신의 것이 될 아버지의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큰 아들이 하나 있었어요.
고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평소와 다른 부산한 움직임과 소리가 들리는거에요. 아버지가 아침에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무슨 소리이지? 하는 궁금증으로 한 종을 불러 물어봐요.
그리고 이 잔치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생을 위한 것임을 듣고 큰 아들이 분노하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아요.
여기에서 말하는 분노는, 망나니 같은 동생에게 어떤 벌도 내리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일시적인 화가 아니라, 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진짜 분노에요.
그는 지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잘못했으면, 아버지와 우리 가문에 수치를 주고 떠났으면 그 만큼의 벌을 받는 것이 맞는데 잔치를 열어주고 있다는 이 사실에 뚜껑이 열린거에요.
큰 아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밖을 나가서 함께 들어가자고 요청을 해요.
그런데 큰 아들은? 들어가지 않아요. 거절해요.
여러분 여기에서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어요.
일단 아버지가 잔치 중 집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작은 아들을 위해 달려간 것과 같은 사회적 관습을 깨뜨리는 행동이에요.
그리고 큰 아들이 잔치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에요. 그 동생이 자신의 분깃을 요구하고 다 현금화 시켜서 떠난 것처럼 아버지의 명예를 짓밟는 것과 같고,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뺨을 후려치는 것과 같아요.
큰 아들에게 아버지의 명예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거에요. 그냥 내 지금의 감정이 중요해요.
잔치에 들어가지 않겠다! 라는 것은 큰 아들도 작은 아들 탕자와 다르지 않다. 똑같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에요.
그러면서 큰 아들은 한 마디 더하죠.
“아버지가 지금까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어요!”
“나한테 준 것 하나도 없으면서, 왜 저런 놈을 위해 잔치를 열어줘요?”
“저 놈이 잘 한 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이래요?”
큰 아들은 더 이상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것은 “나는 동생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저 놈과 같은 집 안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저런 녀석과 형제라는 것이 정말 수치스럽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에요.
(쉬고)
여러분 정말로 아버지가 준 것이 하나도 없을까요?
동생이 가져간 아버지의 재산은 1/3이었어요. 그 이야기는 나머지 2/3는 큰 아들의 것이라는 거겠죠.
그리고 동생이 재산을 요구하는 그 패륜적인 모습을 보일 때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어요. 동생을 나무라면서 아버지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자신은 받지 않겠다라고 거부하지도 않았어요.
동생이 못된 행동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켜보았고, 결국 자신에게도 먼저 2/3라는 재산이 돌아왔어요.
그런데 큰 아들은 그 것을 생각하지 않는거에요. 이미 자신의 것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것을 누리지 못한 것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작은 아들이 집을 떠난 그 사이, 아니 그 전부터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교제를 거부해왔다는 것을 말하는거에요.
29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없이"라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부자끼리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이 것은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은 표현이에요.
인격적인 부자 관계가 아니라, 친밀한 아니 일반적인 부자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큰 아들이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없이"
“나는 아버지 당신과 사는 삶이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몇 년간 아버지 집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이 죽을만큼 괴로웠습니다.”
“난 당신이 죽도록 밉습니다!!”
큰 아들의 고백이 참 안타깝지 않나요? 이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쉬고)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아니 여러분이 오늘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봐요.
“나는 아버지 당신과 사는 삶이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몇 년간 아버지 집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이 죽을만큼 괴로웠습니다.”
“난 당신이 죽도록 밉습니다!!”
부모님이 어떻게 반응을 하실까요? 난리나겠죠.
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에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아들의 말 앞에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것은 아주 정당해요.
잔치가 벌어지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것 자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행동인데, 문 밖에서 큰 아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잔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갑분싸 아니었을까요?
모두가 아버지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바라보고 있는 그 때, 아버지가 입을 열어요.
큰 아들은 종과 주인의 관계로 자신을 설정하고 함부로 말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고 있어요. 분노하지 않고 부드럽게 타이르면서 권면하기 시작해요.
30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얘.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사랑하는 OO아
아버지는 늘 언제나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큰 아들을 그 것을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큰 아들이 자신 스스로를 노예, 종으로 설정하고 생활 했기 때문이에요. 겉으로는 아버지를 따랐지만 속으로는 탕자와 똑같았던 거에요.
아버지가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스스로 거절하고 받지 않았어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정말 다정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사랑을 듬뿍 담아 부르고 있는거에요.
“너는 날마다 나의 사랑을 받아왔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 만큼 작은 아들도 사랑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는데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이런 것도 해주지 못하는거니?”
“내가 잔치를 하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어도, 너의 재산은 변함이 없어"
“내 것이 다 너의 것이고, 내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너야"
“나는 내가 가진 것에서 살진 송아지를 잡은거야.”
“그러니 이제 그만 화를 내고 들어와서 함께 동생을 맞이하지 않을래?”
(쉬고)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온 세 명의 사람은 각자 다른 상황과 위치에 처해 있던 사람들이에요.
작은 아들은 자유를 원했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아버지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었어요.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체, 지금 그 상황만 모면하려고 집에 돌아왔어요.
큰 아들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인척 했지만, 사실 아버지와 어떤 인격적 관계도 맺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그의 마음 속에도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자유가 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두 아들의 모든 상황을 아셨고, 그 모습 그대로를 다 받아주셨어요. 갖은 조롱과 무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품으셨고, 사랑하는 마음을 단 한번도 잊지 않았어요.
각자의 자리
각자의 자리
여러분은 어느 부분에 속한 사람인가요?
작은 아들처럼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잊은체 살아가다가, 주일이 될때 쯤 정신을 차리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고 있지는 않았나요?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기만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지는 않았나요?
큰 아들처럼 자유롭게 마음 껏 살고 싶지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좀 걸려서 그 마음을 숨기고 살아오진 않았나요?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시는데, 여러분은 적당한 관계만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나요?
혹시 여러분도 지금 있는 그 자리가 죽을만큼 괴롭고 힘이 든가요?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힘들고, 상황과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나요?
상황, 고민, 미래에 대한 불확실 그리고 관계 여러가지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죠.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러한 자리에 놓으셨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실까요?
(쉬고)
여러분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 중 어느 부분에 속해있나요?
미안하지만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는 두 아들의 모습을 다 갖고 있어요.
(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두신 것은, 단순히 우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괴롭게 하려고 두신 것이 아니에요.
만약 그런 마음이 있다면 큰 아들처럼 여러분은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두고 있다는 뜻이에요.
상황만 보아서는 안돼요.
이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이 시기, 이 때에 이 자리에 있도록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해요.
지난 주에 이동훈 선교사님께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나는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준비해야 해요.
우리의 인생이 지금 이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괴로움 너머에 있는 그 무언가를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매달리는 것
그 것이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나를 왜 자리에 세우셨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우리 수련회 얼마 남지 않았어요.
주제와 부제는 LINK 하나님과 나 그리고 동역자를 잇다 에요.
무엇을 링크하고 이어야 할까요?
하나님과 나 개인의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서로를 마주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것
그리고 지난 믿음의 조상들과 우리의 삶을 잇는 것.
그 것이 이번 수련회의 목표에요.
(쉬고)
사랑하는 여러분
나라는 사람의 마음에, 상황에만 빠지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래요.
그 상황 앞에 괴로워하는 여러분을 보며 함께 괴로워하고 외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듣는 이번 한주가 되기를 바래요.
이번 주 미션이에요.
수련회 신청하세요.
우리가 얼마나 더 함께 수련회를 하고 은혜를 나눌 수 있을지 아무도 몰라요.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삶이잖아요.
저는 더 많은 청년들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고 싶어요.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 삶에 정말 잊을 수 없는 진한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해요.
순 모임 때, 수련회 신청하세요.
믿음과 은혜는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더 이상 큰 아들, 작은 아들과 같은 포지션에 서지 말고 진짜 우리가 서야 할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우리의 인생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