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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교회는 사회적 인종적 분열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으나 이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의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율법의 전통관습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도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전적으로 기쁘시게 하려면,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갈등은 복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복음 이외에 다른 것들이 더해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불변의 진리인 복음으로 대응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뭔가를 더해야만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으로 다른 복음과 맞서 싸웠습니다. 왜냐하면 참 복음을 놓치면 그리스도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종노릇하라
사랑의 종노릇하라
보통의 종교생활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에서는 선한 일을 하는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사랑을 통해 우리의 성품이 어떻게 자라가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자라감에 있어서 타협이 아닌 싸우며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사랑으로 종노릇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태어난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자신이 경쟁에서 남들보다 앞서나가기 원합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인데 어떻게 사랑으로 변화가 될 수 있을까요?
성령을 따르는 삶
성령을 따르는 삶
바울은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삶은 바로 성령으로 사는 삶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령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순간에 우리 안에서 내주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은 우리가 믿을 때 한번 사용되고 끝나느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 속에 성령이 임재하시면 우리는 육신의 욕심 앞에 굴복하지 않고, 육신의 소욕이 이끄는대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서 사랑으로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고 함께하십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고 말씀을 듣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령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성도,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삶과 신앙의 고백이 일치되는 영광과 복을 누리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기도 하지만, 이름 거대로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죄가 얼마나 악하고 추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 16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르는 삶은 육체 중심의 삶과 다르다는 것을 전재하는 것 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육신의 욕망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계속해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죄성을 대적합니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 지는 싸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전까지는 죄성이 홀로 지배했기에 이를 거스르는 세력이 없었으나 이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우리안에 성령께서 이 죄성을 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삷을 원하지만 우리 안에 죄성이 계속해서 다른 욕심을 만들어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하면 육체가 불편해하고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못하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술을 마시거나 일탈을 한다는 행위 모든 것으로 우리는 힘든 상황에서 하나의 탈출구로 생각해 합리화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불편하게 하십니다. 우리안에 무뎌진 양심을 날카롭게 만들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 동안 들었던 말씀을 기억나게하셔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자책과 같은 생채기를 내기도 하십니다.
읽는 설교 갈라디아서 영과 육의 치열한 싸움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와 성령이 끝없이 맞부닥뜨리는 것이 우리 삶의 실존입니다. 그런 갈등 없는 편안한 삶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마음껏 우리 욕구대로 살다가 교회에 오면 면죄부를 찍어 주는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일정한 정도의 싸움이 늘 있고 그 치열한 싸움의 아픔과 수고가 성도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저 편안한 인생을 기대하면서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3–14 (NKRV)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육체가 원하는대로 세상이 이끄는대로 가면 좋겠지만 그 끝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육체에 속한 삶의 결과
육체에 속한 삶의 결과
성적타락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육체의 일은 분명한데 바로 음행입니다. 성령에 따라 사는지 육체에 따라 사는지 구분하는 것은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19절에는 육체의 일이 가득한 사람은 음행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음행이라는 말은 ‘포르노’의 어근에 해당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한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음행이라는 것이죠.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성관계이고, 더러운 것은 순리에 어긋난 성적 행위와 관계이며, 호색은 무절제한 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으로 말하면서 포장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판단하십니다. 음행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이 이 세상과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자기 중심성
갈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두번째, 육체에 속한 삶은 우상숭배와 주술, 술취함과 방탕입니다. 이것들은 다르게 보이지만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을 높이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이 제일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자신만을 위해 살다가 어려움에 닥치면 자신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죠. 이런 삶의 방식은 종교적, 도덕적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종교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그런데 우상은 어떤가요? 말을 할 줄 모르고 간섭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은 삶이지만 우상을 세워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 이것이 자기 중심성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자기 중심성을 종교적으로 변질시켜놓은 대표적인 모습니다.
술취함과 방탕도 마찬가지입니다. 쾌감을 얻고자 약물이나 행위에 중독되는 것도 육체의 일에 속합니다. 이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계속되는 회개와 실패하는 경우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안일함에 대한 경고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관계의 깨어짐
육체의 결과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육체를 따라 산다고 하면 강도나 살인이나 허랑방탕함이나 술취함과 성적인 문란을 생각하지만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관계의 깨어짐입니다. 어떤 관계가 깨지나요? 부부관계, 가족관계가 깨어지고, 이웃들과의 관계까지도 깨어는 것입니다. 육체를 따르는 삶은 결국 원수를 맺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해결되지 않는 갈등들을 강한 적대심으로 바꾸는 것이죠.
어떤 관계가 깨어집니까?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깨어집니다. 이런 갈등들을 해결하지 않고 마음에 쌓아두고 싸우면 분을 터뜨립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찾아 당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깨져 분열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등이 어떻게 표출됩니까? 시기와 투기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시기이고, 투기는 다른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을 내가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죠.
그렇다면 성령으로 살게 되면 어떤일이 일어날까요?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는 열매가 맺힌다고 말합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육체는’일들’ 이라고 나오는 반면에 성령을 따라 살때는 ‘열매’로 나옵니다.
육체의 일들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었는데, 이 일들은 조화롭지 못합니다. 오히려 파괴적입니다. 자신이 깨어지고, 관계도 깨어지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서 자신마저 포기하고 술취함과 방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하나입니다. 일관성과 통일성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한테는 9가지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하나로 일관되게 흐른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단면으로 잘랐을 때, 일관적인 흐름이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가정생활, 친구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나 자신의 관계까지 일관성있는 통일된 모습이 있다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령으로부터 나는 열매입니다. 열매는 우리에게 풍성함을 줍니다. 풍성함은 우리가 노력해서 무엇을 얻으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풍성함은 성령을 따라 살때 가능한 것입니다. 열매가 맺히고 그 열매로 부요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성령의 열매는 9가지입니다. 이것도 세가지로 나누어 보면, 하나님을 알때 생기는 열매로 세가지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랑을 알게 됩니다.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애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의 공로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신의 성품과 은혜를 통한 사랑이 우리를 참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이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희생하시고, 하나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기에 삶에 ‘희락’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겁고 기쁨을 느끼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것들은 내용없는 기쁨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참된 기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뒤집지 못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가지고 오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져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면 우리에게 화평이 생깁니다. 세상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학교, 사회, 직장 어디를 가도 전쟁터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내 안에 평안이 생깁니다. 내 자신이 업그레이드 되지 않아도 되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아는데서 오는 평화와 자유와 안식이 생기게 됩니다.
사랑을 알면 우리에게 화평이 생깁니다. 세상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학교, 사회, 직장 어디를 가도 전쟁터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내 안에 평안이 생깁니다. 내 자신이 업그레이드 되지 않아도 되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아는데서 오는 평화와 자유와 안식이 생기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의 열매는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아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다르게 대합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오래참습니다’ 사람을 절대 쉽게 포기 하지 않습니다. 내 잣대와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래참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때와 방법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오래참아주시고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것을 알기에 나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계가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관계이면 이웃과의 관계도 바른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오래 참고 포기하지 않는 것을 배우면, 긍휼이 가득한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허물과 약함이 있습니다. 한계가 드러납니다. 그런 약함과 한계와 허물을 따뜻한 눈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 입니다.
자비가 있으면 무엇이 따라올까요?
양선이 따라옵니다. 양선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선행입니다. 사람의 한계와 약함을 이해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긍휼히 여기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자기의 힘과 돈과 시간을 들여서 이웃들에게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양선, 곧 선행입니다.
자신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화평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오래참고 자비와 양선으로 대하는 다른 눈을 갖기 시작하면서 자신 속에도 귀한 열매가 만들어집니다.
성령을 따라살며 이웃에게도 잘베푸는 성령의 사람에게 인격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바로 ‘충성’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은 많아도 충성된 사람은 찾기 힘든게 요즘 입니다. 충성은 하나님 앞에서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온유’는 무엇일까요? 부드러움과 강함이 모두 있는 성품입니다. 겸손하여 언제나 남을 먼저 헤아립니다. 절대로 말로 사람을 베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강합니다. 부드럽지만 강하다는 것은 진리에 서서 타협해야 할 순간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 입니다.
‘절제’는 치우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다스려서 무엇이든지 지나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9가지 성령의 열매는 성령을 따라 살면 누구나 다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진실한 사람들은 재능과 능력에 상관 없이 전부 맺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거기에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해 복음에 무엇인가를 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순수한 복음 자체를 전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처럼 예수님께서 보내는 성령을 따라 살 것을 권면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이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수와 함께 죽은 자로 틀림없이 여겨 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대로 우리도 믿음으로 우리를 못 박으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거듭나게 하는 순간에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우리도 우리 자신을 못 박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믿음으로 못 박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어떤 한 영역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밖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우리를 설득하여서 우리가 스스로 원하고, 결단하고, 결심하고 선택하여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땅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더라도 죄된 육신은 계속해서 그렇게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는 갈등과 싸움으로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알기에 성령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며 신앙과 삶이 일치되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