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09 금요기도회 : 시편 4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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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를 금요기도회 자리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저희와 함께하시니 해와 달도 저희를 해치지 못함을 믿습니다. 항상 저희와 함께하셔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으니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참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 저희의 죄를 버리는 저희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말씀을 듣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기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시편 43 편의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금요기도회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의 기도제목과 개인 기도제목으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얻고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경 읽기표에 따라 시편을 요즘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43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함께 듣고자합니다. 이 43편은 42편과 함께 하나의 시로 되어 있기 때문에 42편과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두 시편이 하나의 시편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내 영혼아 니가 어찌하여”라고 시작하는 동일한 후렴구가 있으며 43편의 표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42편과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42편과 43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려고 하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있는 시편입니다. 이 시인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는지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소망을 두었는지, 그리고 이 시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 가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인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42편 1-2절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라고 말합니다.
바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재로 인해 시인은 사슴이 갈급하여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에게 안 계시다는 느낌을 넘어서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끼는 사람의 아주 격앙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9절과 10절, 그리고 43편 2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인을 향해 42편 3절에서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절망감이 너무 커서 그의 음식이 자신의 눈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시냇물에게서 공급받기를 원하지만, 현재 그의 눈물이 그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그의 주변에 없는지 물음으로써 그의 고통을 가중시키기만 할 뿐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욥과 그의 세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세 친구는 욥을 향해 “니가 잘못했으니 하나님께서 너에게 벌을 내리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이 시편에도 적용해보면 이 시인을 향해 사람들이 “니가 죄를 지어 이런 고통 가운데 있고,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과 맺은 긍정적인 관계와, 그 관계로 누린 유익했던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대조적인 지금의 상황 때문에 고통이 더 심해짐을 경험합니다.
42편 4절을 보시면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과거에 어떻게 성전에 가곤했는지,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수한 기쁨을 누렸던 과거를 떠올리며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며 더욱 고통스러워합니다. 이 시인은 바벨론 포로 시기의 레위인 같습니다. 왜냐하면 42편 표제를 보시면 이 시가 ‘고라 자손’의 시임을 알 수 있는데, 레위인인 고라 자손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때는 나라가 멸망했을 때 말곤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포로로 잡혀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은 느낌, 사람들이 조롱하는 상황. 그리고 과거와 대조적인 현재 상황 속에서 시인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것일까요?
시인은 42편 5절과 11절, 그리고 43편 5절에서 자신을 향해 “내 영혼아 니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절망하고 있는 자아를 꾸짖습니다.
시인은 미래에 나타나 자신을 도우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때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현재 절망적인 상황에 있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이 참으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극심한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됩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구나”,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라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라며 시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 영혼아 니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며 절망 가운데서 자기 연민에 빠진 자아를 향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며 꾸짖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42편과 43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합니다. 43편 3,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 소망이 스룹바벨 성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넘어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시인과 마찬가지로 절망적인 상황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은 상황과 주변 사람들의 조롱, 그리고 하나님과의 뜨거운 교제로 인한 유익을 누렸던 과거와는 대조적인 현재.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걸까?”라며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이 시인처럼 자기 연민에 빠진 자아를 향해 “내 영혼아 니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렇게 꾸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자아를 향해 “왜 낙심하며 불안해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너를 도우신다.”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꾸짖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약속이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시냇물을 갈급해하는 사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냇물이신 하나님께 가면 갈급함이 해소된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은 요한복음 4:14 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7:37-38 도 생각나게 만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물이 갈급하다면 생수인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 영원히 갈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에게 오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 약속이 있기 떄문에 우리는 자아를 향해 “내 영혼아 어찌하여 니가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꾸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라.”, “괜찮다. 너의 모습은 지금 모습 그대로 괜찮은 모습이다.”라며 지금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쾌락으로 현실을 도피하려고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영적 침체’라는 책에서는 성경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가르치지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부인하라고 가르친다며 영적으로 침체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오늘 본문의 시인처럼 자신을 꾸짖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줄 수 있는 건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며 오로지 하나님만이 가능하십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하는 생수이신 그리스도만이 가능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절망 가운데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는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의 해결책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적인 상황 속에 계십니까? 아니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미래에 절망적인 상황에 계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때에 우리는 이 시편을 기억해봅시다. 그리고 시인처럼 외쳐봅시다. “내 영혼아 니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며 말입니다. 낙심하고 불안해 할 때 시편 기자처럼 자아를 꾸짖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우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우리에게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자아를 향해 “내 영혼아 니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꾸짖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이 시간 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