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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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위로를 소유한 그리스도인
I. 서론
A. 험난한 인생길,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 위로와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회사가 정리 해고를 하는 바람에 20년 동안 일해 온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부부 관계가 점점 더 소원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남편이 집을 나갔다. 갈수록 반항이 심해지는 자녀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을 송두리째 삼켜 버릴 듯한 우울증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지 의아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가 우리 인생의 깊은 불안을 덜어 주며, 묵직하게 욱신거리는 외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마르바 던 이라고 하는 미국의 영성신학자가 쓴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며’라는 책에 쓰여진 내용입니다.
험난한 인생길,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서 위로와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게서 나오는 동일한 질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B. 이사야 40:1 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서 후반부의 첫번째 장인 이사야 40장은 이스라엘의 위로와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시작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열강의 힘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 되기를 거부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심판 중에도 구원을 베푸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나에게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것이기 때문에 비록 깨지고 망가졌어도 버리지 않고 다시 회복하여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A.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위로라는 단어는 독일어 트로스트 Trost 를 번역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원래 독일어로 기록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위로는 고난이나 슬픔 또는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유럽은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위로라는 단어는 많은 변화와 도전 속에서도 삶에 안정감과 확신을 주는 어떠한 것을 기다리고 갈망하는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위로는 우울한 기분을 잠시 달래주는 정도의 위로가 아닌 삶을 지탱하게 하는 기둥과도 같은것,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위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질문은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이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여러분에게 확신을 주고 여러분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B. 그 답은 ‘나’ 라는 존재가 내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 라는 존재가 내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이 어떻게 위로가 됩니까? 그것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쓰였던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선행을 해도 자신의 죄가 사해졌다는것을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데 있었습니다. 로마카톨릭이 범한 오류는 구원의 대상과 구원의 주체를 혼동한 것이었습니다. 1문은 그것을 교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대상인 인간과 구원의 주체인 인간
1. 기독교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구원의 주체가 인간입니다. 인간의 선행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잘못된 행위를 할 수 있지만 선행을 통해 그것을 상쇄하고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불교에서 업은 생각이나 말, 행동으로 지은 원인을 말합니다. 업보는 그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결과를 뜻하는데 이것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그의 존재를 따라다닙니다. 그 사람이 지금껏 걸어오며 행한 행적들은 선한 업이든 악한 업이든 모두 업으로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윤회와 연결이 될 때,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인 업에 따라서 선의 세계인 선업 혹은 악의 세계인 악업에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3. 이슬람의 코란은 인간의 구원과 상벌이 심판날에 있게 될 저울질로 결정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울눈이 무거운 자, 이들은 번영하리라, 저울눈이 가벼운 자, 이들은 스스로 영혼을 황폐하게 하였으니 이들이 살 곳은 지옥이니라.”(23:102–103)
코란에 의하면 저울의 중심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인간의 선행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이슬람에서도 알라를 믿는 믿음은 중요하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선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일 알 파루키라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이슬람에서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이다”
4.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가 성도들에게 가르치던 것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인간이 구원의 대상임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지닌 죄의 비참함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런점에서는 불교나 이슬람에서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카톨릭 교회는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인간을 동시에 구원의 주체로 만들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위로를 빼앗았습니다.
로마카톨릭 교회가 신자가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할때 성도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그 두려움과 불안을 이용해서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라 불리는 중간 지역에 들어 간다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어 불안에 떠는 성도들을 달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성도들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B. 인간이 구원의 주체가 될 때 그것은 위로가 되지 않고 평생을 지고가야 하는 짐이 됩니다.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우리를 더욱 선하게 만들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우리를 더욱 종교적으로 만듭니다. 로마카톨릭은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싫지만 선행을 위한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서 비참해진 인간은 어제까지 선하게 살았어도 오늘 끔찍한 죄를 지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위를 통한 구원은 그 누구도 최후의 순간까지 구원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최종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는 그 누구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가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을 위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이용합니다.
A. 그러나 복음은 위로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가 행한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입니다.
제 1문에서 말하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2문에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를 알아야 합니다.
1문에서 우리의 위로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고 말한 다음에 2문에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비참해진 존재이며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B. 이것과 관련해서 40,41,42문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말합니다.
40. 그리스도는 왜 “죽으시기”까지 낮아져야 했습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1
우리의 죗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이외에는
달리 치를 길이 없습니다.2
41. 그리스도는 왜 “장사”되셨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가 진정으로 죽으셨음을 확증합니다.1
4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1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2
종교는 우리가 하는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확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와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3) 그로 인하여 신자에게 죽음은 더이상 죄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니라 영생에 들어가는 확실한 문이 되었습니다.
결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내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것이 되는것이 사나 죽으나 우리의 삶에 유일한 위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기꺼이 그리스도께 내어주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것도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험한 인생을 살아가며 위로가 필요한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로가 되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내 인생은 내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임을 믿고 고백하며 기쁨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