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결혼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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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out
고백 : 하나님이 계획하신 결혼의 목적을 위해 기도하자!
헌금 :
예배를 위하여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특별히 결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말씀 들을 때에 주의 성령께서 말씀을 이해하는 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봉헌을 위하여
이 시간 우리의 귀한 물질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우리의 감사헌금과 십일조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이 물질을 받으시고 주의 일에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찬양 : 그 사랑
본문 : 창 2:18-25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오늘 ‘결혼의 본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18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평가하십니다.
좋지 않다는 것은 선하지 않다, 아름답지 않다, 좋지 않다 라는 의미입니다.
말그대로 하나니미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의견을 물으십니다.
동의해야 진행하십니다.
강제로 결혼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게 19-20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오늘 본문에는 “이끌어 가다”라는 단어가 2번 등장합니다.
처음부터 여자를 이끌어 가시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결혼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의견을 물으시고,
사람이 필요로 하면 진행하십니다.
19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먼저,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그 가운데서 배우자를 찾지 못합니다.
20절을 다시 보세요.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0절을 원문으로 보면, 아담이 돕는 배필을 발견하지 못했다, 찾지 못했다, 만나지 못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담도 원했던 거에요.
결혼을요.
*요즘은 비혼주의자가 많습니다.
독신자도 많고,
1인 가구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결혼이 부담스럽고,
경제적 여유가 없고,
여러가지 불편한 것들,
그리고 자기 삶이 없어지고,
또 양육이나 육아 때문에 몸이 망가지고 하는 등의 이유 때문이죠.
존 파이퍼 목사님의 결혼신학이라는 책을 보니까,
현대 서구 사회의 우상은 자기 자신이고, 주된 가르침은 자율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
자신의 자유, 자율성을 해치는 것은 죄가 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내 자유를 제한하면 악이고 죄입니다.
이게 우상이고, 종교죠.
그래서 결혼도 나한테 이득이 될 때 하는 것이고,
도움이 될 때 하는 것이고,
좋아야 하게 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유가 없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요?
말씀이 없는 자유는 악이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결국 인간 사회를 망가뜨리는 악이기 때문이죠.
말씀이 없으면 진정한 자유가 올거라고 생각해서,
동성애를 옹호하고,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를 파괴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혐오와 원인과 해방의 전망”이라는 책을 쓴 노라 칼린은,
진정한 성의 혁명, 성의 자유를 위해서는,
기독교를 대적해야 한다.
파괴해야 한다.
없어져야 한다.
이런 주장을 직접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없는 자유는,
반드시 성적인 문란으로 이어지게 되고,
동성애의 확산으로 이어지게 되고,
가정이 파괴되고,
파괴된 가정에서는, 건강한 자녀가 양육될 수 없으므로,
어린아이들의 정서적 고통, 심리적, 신체적 고통이 뒤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모두 악이라고 정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시스템은 무너지고
질서가 파괴되고,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나,
약자들은 피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쨋든,
오늘날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자신의 자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혼,
혼인,
가정,
전통,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기가 막히고,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저런 결혼을 왜 해?
가정을 이루어서 뭐해? 나한테 득이 뭐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죠.
물론,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비혼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결혼을 기피하고,
결혼 없이,
자기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연애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십니다.
좋지 않다.
선하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 자신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의 공동체적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에,
그 피조물인 사람도, 가정을 이루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래서 결혼을 누가 만드셨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결혼이 좋다.
결혼 하는 것이 아름답다. 라고 하시면서 결혼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결혼이 좋은 것이 맞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나요?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성경이 독신을 죄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결혼하지 않았고,
바울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독신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으신 예수님이 죄를 지은 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각종 동물들을 이끌어 가시니
아담은 그들의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그 가운데서 배우자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운데,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서
거룩한 중매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21절이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시는 내용인데,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을 깊이 잠이 들게 만드셨는데,
깊이 잠이 들었다는 것은,
아담이 개입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이죠.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갈빗대로 번역단 단어, ‘첼라’는,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총 40번 사용되었는데,
창세기, 2장에서 갈빗대를 지칭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성막의 옆 측면, 또는 성전의 골방 등을 의미할 때 사용된, 건축용어입니다.
또,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시는데,
만들다, 창조하다.
이런 단어를 쓰지 않고,
세우다, 건축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베나’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건축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성전을 짓거나,
성막을 세울 때처럼,
여자를 건축하는 것처럼,
여자라는 존재를 건설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뭐, 여자는 건물이다.
건축 자재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자의 존재를 통해서 이루어갈 가정은,
하나님의 임재를 담지해야 할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드리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결혼시킨 것이 아니라,
먼저는 동물들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담도 돕는 배필, 그러니까 자신과 함께 할 배우자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시는데,
마치 성전 짓듯이
성막 건축하듯이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왜요?
바로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는 성전이라는 것이죠.
성막이라는 것이죠.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서 살고,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담지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바로, 가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불신자와의 결혼을 반대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의 선택이고, 본인이 지고 가야 할 부분이기 때문에, 제가 이러쿵저러쿵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죠.
이런 고민을 팀 켈러 목사님의 사모님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사모님이 쓴 글이 있는데,
제목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입니다.
이 사모님은, 이런 부분에 대해 상담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상대방을 서로 사랑하고 있는데,
이런 권면의 말들이 소용없을 뿐더러,
별로 변화에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모님은 이미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사람들과,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적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완벽한 남자와 결혼한 한 여자의 후회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인데, 그 후회가 뭐냐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결혼하기 ‘이전에’ 네가 많은 외로움을 느꼈겠지만, 네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이후에’ 경험할 외로움과는 비교도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느꼈던 많은 외로움이 있는데,
그 외로움의 크기보다,
결혼한 후에 느끼는 외로움이 더 크다는 것이죠.
그래서,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믿지 않는 자와 이미 결혼한 사람들을 만나보시기를 조심스럽게 권유드립니다.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미리 들여다보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이죠.
지혜로운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결국,
하나님은 아담과 여자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는, 성전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결혼신학 이라는 책을 쓴 존 파이퍼도,
결혼의 목적은 로맨스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목적은, 로맨스도 아니고, 성욕도 아니고, 동반자가 필요해서도 아니고, 문화적 편리함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함께 사역하는 사명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결혼의 목적이라는 것이죠.
*로맨스는 몇 년 가지 않고, 성욕도 몇 년 가지 않습니다.
로맨스 때문에 결혼했지만,
그 결혼 상대가 원수가 됩니다.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성적 매력을 느끼는 상대방과 결혼했지만,
어느새 상대방의 성적 매력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로맨스,
성욕,
문화적 편리함,
외로움을 잊기 위한 동반자가 필요해서
결혼했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혼이 주는
주변적 유익함이지,
결혼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고, 본질도 아닌 것이죠.
하나님이 여자를 왜 만드셨습니까?
그것은, 아담과 결혼해서,
성전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마치 성막을 세우듯이,
성전을 건축하듯이,
갈비뼈, 옆구리, 건축 용어를 사용하시고,
짓다, 건축하다 를 의미하는 단어를 통해서,
너 결혼해라.
결혼을 통해서 성전을 지어라.
성전을 이루어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결혼을 추구하는 이유는
내 성욕을 채우고,
내 상상의 로맨스를 채우고,
내 외로운 마음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잘 모시기 위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 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목적으로 하는 결혼이,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첫 여자를 본 아담이 반응은 어땠을까요?
23절인데요.
아담은 굉장히 놀라워하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데,
이건 나 자신이다.
나와 같은 존재이다.
나와 다를 바 없다.
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죠.
23절이 그 내용인데, 같이 읽겠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오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너무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남자는 ‘이쉬’인데,
지금 아담은 여자를 ‘이샤’라고 부르면서,
너무 비슷하다,
너무 똑같다.
이쉬와 이샤.
발음도 비슷하죠.
너무 똑같다.
내 뼈 중의 뼈이고, 내 살 중의 살이다.
이건 마치 나 자신이다.
라고 표현하는 게 내 뼈 중의 뼈이고, 내 살 중의 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담이 얼마나 좋았고 기뻤으면, 이렇게 표현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장 좋은 배우자를 아담에게 허락하신 것이고,
여자 입장에서도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이죠.
하나님은 이런 결혼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남자는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는 가정을 거룩한 성전,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을 이루기 위해,
남편을 돕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결혼의 본질이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결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것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적 존재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도 공동체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이 뭐냐?
바로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과 결혼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결혼과 가정 이루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결혼은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옆구리를 뜻하는 단어는,
측면,
그러니까, 성막이나 성전의 옆 부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여자는 성전을 건축하듯이 창조된
특별한 존재입니다.
로맨스, 성욕이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임재를 잘 모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신 목적이죠.
셋째,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도와서 거룩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을 주신 목적이죠.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자율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은 도전이 됩니다.
자기 자아를 꺾고,
나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는 남편,
자기 자신보다 거룩한 가정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아내,
이런 가정이 건강한 가정이고,
하나님이 설계하신 거룩한 가정이라는 것이죠.
(같이 찬양합시다.)
그 사랑이라는 찬양인데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거짓이 없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바로 결혼이 그런 사랑인데요.
변함없는 사랑을 하고
거짓 없는 사랑을 하고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이고,
이 결혼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찬양할 때,
이런 가정 이루게 하소서
이런 결혼 하게 하소서
이런 배우자 되게 하소서
하는 마음으로 찬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먼저, 들은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귀하게 모시는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해서도 가정을 성전 공동체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결혼을 하게 하옵소서. 거룩한 성전 공동체로 가정을 세우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두번째로, 교회의 병약한 자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교회 안에 연약하고 아픈 지체들을 위해서, 우리가 알게 모르고 고통받는 여러 지체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하나님, 질병으로 고통받는 지체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들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치료와 회복의 은총을 부어 주옵소서. 이 일을 통해 더욱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병약한 자들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를 위해서
앞서 세우신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저와 순장 리더들을 위해서, 또 8월에 준비하고 있는 청년부 여름 엠티를 위해서, 말씀이 준비되고, 기도가 준비되고, 찬양이 준비되고, 서로 교제하고 식사하는 모든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도록. 이 일을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역할 수 있도록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결혼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가 이런 결혼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성전을 이루는 결혼을 꿈꾸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청년들이 하나님의 꿈을 꾸게 하시고, 하나님의 비전으로 결혼과 자신의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 특별히 병약한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치료 과정 가운데 하나님 특별히 임재하여 주시고, 은혜내려주셔서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 가운데 회복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필요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관찰
18 여호와 하나님이 말하기를, 아니다, 좋지 않다, 사람이 바드(한 부분, 지체, 일원, 가지)로 있는 것이, 내가 만들 것이다(미완료), 그를 위하여, 에쩨르(도움, 도와주시고)하는 그 네게드(배반하다, 마주하다, 반대편)를.
좋지 않다.
사람이 지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들 것이다. 그를 위하여 돕는 반대편을.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고 서로에게 말씀하셨다(2:18상).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공동체적 존재를 사람에게도 반영시키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두 가지 차원의 공동체로 만드신다. 먼저 사람에게 돕는 배필을 주셔서 공동체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셨다(18절). “독처(바드, בַּד)”는 고립되어 자기 혼자서 스스로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를 돕는 배필을 지어 주셨다. “돕다”는 말의 에제르(עֵזֶר)는 자주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도룰 때에 사용되었고(신 33:7; 시 33:20; 115:9–11; 146:11; 호 13:9), 또 군사적인 도움에 사용되기도 했다(사 30:5; 겔 12:14; 호 13:9). 이것은 단순히 여자가 남자를 도와주거나 자식을 낳아준다는 의미보다 남자가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자가 조력한다는 의미이다.57) 남자가 땅을 경작하고 짐승들을 다스리는 일을 수행함에서 여자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19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셨다, 아다마(흙)으로부터, 들의 하야(동물, 들짐승)를, 그리고 모든 하늘의 새를, 그리고 그가 가져오셨다, 그 아담에게, 보시기 위하여, 그가 무엇이라고 카라(부르다)하는지, 그에게로 가까이. 아담이 모든 네페쉬(생물, 생명)을 부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었다.
18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다고 하셨고, 19절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
바로 여자를 만드시지 않았다.
먼저 동물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가지고 오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들에 대해 아담이 어떻게 부르는지를 보기 위해서 가지고 오신 것이다. 이들은 돕는 배필로 지어진 것은 아니다.
성경은 악마의 피와 신들의 침으로 창조되어 하급 신들이 파기를 거부한 관개 도랑을 파는 하찮은 일을 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동산을 돌보도록 창조된 인간에 대한 보다 존엄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20 아담이 불렀다, 이름을, 모든 가축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의 짐승에게. 그리고 아담이 마짜(찾다, 얻다, 발견하다, 만나다)하지 못한다, 에쩨르 하는 그의 반대편을.
아담이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담이 돕는 배필을 만나지 못했다.
아담은 만나지 못했다.
그를 돕는 배필을 만나지 못했다.
무엇을 돕는가?
하나님의 사명을 돕는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스릴 왕적 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쩨르 : 도움, 위로, 지원
2 Chronicles 26:7 NKRV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하나님이 아마샤를 도우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
시편에는 다양한 사람들(의인, 가난한 자, 고아)과 다양한 상황(질병, 개인적 고통, 억압)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있습니다.
명사. 에쩨르는 약 20회 발생하며 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며, 그 중 13번은 주님의 구원 및 구원 능력에 관한 선언과 관련이 있습니다.
"도우미"(에제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종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의 도우미이신 하나님에 대한 다른 곳에서 사용됩니다(신 33:29, 시 33:20, 89:18). 아담과 하와가 동산을 가꾸고 지키기 위해 함께 일했으므로 이 문맥에서는 "동역자"가 더 나은 번역일 수 있습니다.
21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떨어지게 하셨다, 타르데마(깊은 잠, 무기력)에, 아담 위로, 그리고 그가 잠들었다, 그리고 그가 취하였다, 에하드(하나)를, 첼라으(갈빗대, 옆)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시가르(닫다, 잠그다, 막다)하셨다, 바싸르(살)로, 그녀(후 / 대접3여단) 대신에.
타르데마 : 깊은 잠. 구약에서 7회 사용됨.
"깊은 잠"은 일반적으로 하룻밤의 수면을 의미하지만(욥 4:13, 33:15, 잠 19:15),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의미합니다(15:12).
잠든 상태에서 남자는 여자의 구조나 성격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아내를 얻기 위해 잠들고 옆구리가 열렸지만, 예수님은 신부인 교회를 얻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요한복음 19:33-37)."
첼라으 : 측면, 옆구리
성경에 묘사된 하와의 창조는 남녀 관계의 친밀하고 상호 의존적인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남자의 뼈와 살이 한 몸입니다.
대체로 ‘건축용어’이다.
1 Kings 6:5 NKRV
또 성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성전, 성막 건축에 대체로 사용된 단어이다.
명사형은 주로 방주(출 25:12), 성막(26:20), 제단(27:7), 성전의 옆방(왕상 6:5, 겔 41:5)에 대한 건축적 묘사와 관련하여 등장합니다.
에덴 동산 장면의 언어는 성막 설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갈비뼈"로 번역된 ṣēlāʿ라는 용어는 성막의 건축 배경에서 자주 등장하며, 거기서는 "측면"으로 번역됩니다. 여자는 남자의 옆구리에서 떼어내어 남자와 같은 실체임을 보여주고
남자와 여자는 ‘성전’을 이루는 한 몸이다.
바울은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서 남자와 여자의 가정적 평등이 아니라 사랑의 연합을 나타내기 위해 호소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비뼈"의 의미입니다.
조력자가 남자와 완전히 일치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동물을 창조 한 흙이 아닌 남자 옆구리의 일부로 그녀를 만드셨습니다.
갈비뼈를 뜻하는 수메르어는 티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티가 하와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3:20).
시가르 :
이 동사는 문과 성문을 닫는 일반적인 명칭입니다(91번 중 26번이 "문" 또는 "성문"을 직접 목적어로 사용합니다).
종종 동사는 보호를 위해 문이나 성문을 닫을 때 사용됩니다(창 7:1; 삿 9:51).
Genesis 7:1 NKRV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이 아담 위로 깊은 잠을 떨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갈빗대로부터 하나를 취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녀 대신에 살로 막으셨다.
취하다 : 결혼에 대한 일반적인 관용구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 결합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흙’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아담의 갈빗대로 지어졌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고대근동 :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이야기에는 여성의 창조에 대한 독립적인 설명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창조 기록 전체에서 여성과 남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으로 제시됩니다.
22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베나(짓다, 건축하다, 세우다)하셨다, 그 첼라으 로, 그가 아담으로부터 취한, 여자를, 그리고 그가 그녀(후)를 가지고 오셨다, 아담에게로.
하나님이 그 갈빗대로 여자를 건축하셨다.
건축이라는 용어를 썼다.
베나 : 건축하다
Genesis 8:20 NKRV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그리고 하나님이 그녀를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하나님이 아담의 만남의 욕구를 채우셨다.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담에게 있었다.
23 그 아담이 이르되, 이는(조트 / 지시대명사 여성단수) 나의 뼈로부터의 뼈이며, 나의 살로부터의 살이다. 이를(조트) 여자(이샤)라고 불리리라(카라 / 니팔 미완료). 이를(조트) 남자로부터 취하였으므로.
이 여자는 나의 뼈 중의 뼈요, 나의 살 중의 살이다.
이 여자는 이샤 라고 불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남자로부터 취하여졌기 때문이다.(푸알 완료)
(푸알은 강조 수동이다.)
여자를 처음 본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황홀하게 외쳤는데, 이는 그녀가 그가 유대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남자에게 필요한 조력자, 보완자, 동반자였습니다 (18 절).
이 두 히브리어 단어(이쉬, 이샤)의 소리의 유사성은 남자가 여자에게서 진정한 상대를 찾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남자는 그녀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차이 속에서 그들의 공통점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24 그러한 까닭에, 남자가 아자브(떠나다, 버려두다, 남기고 가다 / 미완료)하고,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그리고 그는 다바크(합하다, 붙다, 연합하다, 함께 있다 / 미완료)할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이샤와, 그리고 하나의(에하드) 살(바싸르)가 될 것이다(하야 / 미완료).
그러므로, 남자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남기고 떠나, 그의 여자와 함께 있을 것이고, 하나의 살이 될 것이다.
바싸르 : 살, 몸
몸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다.
Proverbs 14:30 NKRV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초점은 남성이 여성에게서 경험한 매력, 동반자 관계, 적합성에 있으며, 그 결과 남성이 부모의 가정에서 어느 정도 신체적, 사회적, 영적으로 분리되어 동반자와 함께 또 다른 가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관계나 자손이 아니라 결합 자체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따라서 FRCL은 "그리고 두 사람이 하나의 존재가 된다", SPCL은 "... 한 사람", GECL은 "... 몸과 영혼이 하나가 된다"로 번역합니다. TEV는 "그들은 하나가 된다"라는 표현이 더 일반적인데, 이는 새로운 가족 단위의 시작, 즉 "그들은 새로운 가족이 된다"라는 의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공유하는 언약 관계로 묘사됩니다. 일부일처제는 분명히 의도된 것입니다. "떠나다"(아자브)와 "집착하다"(다바크)는 언약의 맥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 언약 위반(예: 신 28:20, 호 4:10) 또는 충실을 나타냅니다.
"떠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결혼은 이전의 가족 간의 약속이 대체되는 배우자에 대한 새로운 서약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배우자에 대한 의무가 부모에 대한 충성심을 대체하는 결혼 파트너의 새로운 우선순위를 요구합니다. 이 서약의 예는 나오미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룻의 열망입니다: "룻이 그녀에게 [다바크] 매달렸고"(1:14), "당신을 떠나라고 [아잡] 재촉하지 말아라"(1:16).
‘아자브’와 ‘다바크’는 언약적 언어이다.
언약관계의 우선순위가, 부모 자식 관계에서 남편 아내 관계로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25 그리고 그 세냐임(둘, 한 쌍)이 아롬(벌거벗은, 벗은)하였으나, 아담 그리고 그의 이샤(여자)가, 보쉬(부끄러워하다, 수치스러워하다 / 미완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벌거벗었다는 말은 "옷을 전혀 입지 않고 완전히 벗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히브리어 동사 "부끄러워하다"의 재귀형이며, 이 형태는 "그들은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상호 작용을 암시합니다. FRCL은 "그러나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고, NEB는 "그들은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잘못되었거나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행동이나 생각을 했다는 고통스러운 의식으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가장 강렬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떠남"과 "결합"은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결혼은 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은 가족적, 사회적 환경에서 의사를 선언하고 의무와 관계를 재정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적 자유와 도덕적 일탈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결혼과 성행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재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2:24은 히브리인들이 사회의 생존을 위해 핵가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이해하는 토대 역할을 합니다. 일부일처제 이성애 결혼은 창조 초기부터 항상 신성한 규범으로 여겨졌습니다.
연구
상대방을 위해 지음받은 남자와 여자
가장 먼저 야훼 엘로힘께서 그 상황을 보시고, 당신과 흙사람이 동산에 함께 있는데도 ‘좋지 않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신다(2:18). 야훼 엘로힘께서는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해 주고자 하시지만, 단순히 여자를 만들어서 함께 있게 하는 식으로 하지는 않으신다. 남자를 지으셨듯이 흙으로 생물을 ‘빚으신다’(야차르). 하나님께서 각 생물을 흙사람에게 소개하셨지만, 남자는 자기에게 적합한 짝을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흙사람의 옆구리에서 여자를 ‘만들어 내신’(build, 바나) 후에야 우리는 해결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거나’(바라) ‘짓지’(야차르) 않으시고 남자에게서 ‘만들어 내신다’(바나). 흙사람이 흙에서 취함을 받았듯이 여자는 ‘남자에게서’ 취함을 받았다(2:23). 즉 남자와 여자는 모두 피조물과 다른 누군가와 관계되어 존재한다!
그러면 정확히 무엇이 좋지 않았는가? 이 이야기에서는 남자가 혼자였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너무 성급하게 결말로 건너뛰지 말자. 하나님이 흙사람이 혼자라고 처음으로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 알 수 없다. 코뿔소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바늘두더지나 새끼 고양이는 어떤가?
하나님과 그 흙사람이 같이 있었는데도 하나님이 흙사람을 혼자라고 여기셨다는 사실이 놀랍다. 잠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남자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도, 심지어 동물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도 혼자였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남자가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았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지, 그분과 개별적으로 연결되는 관계를 창조하지 않으신다. 둘째, 애완동물 애호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동물들은 우리의 짝이 될 수 없으며, 혹은 적어도 사람이 응당 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게라도 우리와 공동체를 구성할 수 없다. 남자가 모든 동물과 함께 있을 때에도,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남자의 ‘좋지 않은’ 상황을 무엇이 해결했는가? 이 흙사람의 홀로 있음의 문제를 해결한 존재는 남자에게서 취함을 받은 여자뿐이었다. 남자가 홀로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그 과정의 일부는 남자가 자신이 혼자이며 홀로 있음이 ‘좋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고 깨닫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은 왜 아이들이 인형을 갖고 놀듯이 그냥 여자를 만들어서 그 둘을 결혼시키지 않으셨을까? 왜 동물을 먼저 만드셨을까? 남자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시지만 왜 알맞은 짝을 찾게는 하지 않으셨을까? 그 이야기에 따르면 흙사람에게는 자신처럼 흙에서 취함을 받은 다른 ‘생물들’보다 더 알맞은 존재가 필요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짝이 필요했던 것이다. 야훼 엘로힘께서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취함을 받았기에 남자의 적합한 짝이라는 사실을 남자가 깨닫기를 바라신 듯하다. 이 이야기의 긴장은 남자가 “드디어! 이는 내 뼈 중의 뼈로다”(2:23)라며 유레카를 외칠 때 비로소 해소된다. 칼 바르트가 말하듯이 “전체 이야기의 목표가 이 감탄사에 들어 있다.”
남자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 공동체를 발견했다. 창세기에 따르면 사람이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낸 말은 그 발견을 시 형태로 표현한 말이었다(2:23).
인간의 일은 창조를 명령하는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포함합니다(창 1:26, 28). 하나님은 하늘, 땅, 바다, 어둠, 낮과 밤 등 천체에 이름을 부여하셨고, 이제 사람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지상 피조물에 명령을 내림으로써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이행합니다(창 1:28). 인간은 다른 어떤 지상 생물보다 높고 하늘의 질서에서 천사보다 조금 낮은 피조물의 왕관입니다.
하지만 조력자가 없습니다. 모든 동물은 짝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짝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배필인 여자를 남자 곁에서 돕는 배필로 창조하시고(창 2:20, 3:20), 남자는 여자의 이름을 차바(산 자의 어머니)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관계” 속에서 일하도록 창조하셨다.
혼자 일할 수 있지만, 혼자 일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관련 글들
“결혼은 행복하기 위해서 하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를 이뤄야 진짜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은 ‘내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갈아타는 환승 열차다.”
결혼하는 이들도, 결혼을 꿈꾸는 이들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가정 자체가 갈수록 줄어드는, 가정의 진정한 위기다. 이러한 시대에 “결혼은 행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 책이 등장했다. 해피가정사역연구소 서상복 목사(58)의 첫 저서 <결혼 플랫폼>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첫째는 자녀 양육에 대한 짐 때문입니다. 둘째는 부모와 교회 선배들의 가정이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하나님 나라로서 행복해지는 것을 잘 보지 못했는데, 본인들도 그 길을 가려니 엄두가 안 나는 것입니다. 말만 들어보면 가정 생활에도 복음이 있는 것 같지만, 철저히 교회와 가정이 이원화돼 있어요. 교회에선 거룩하게, 집에서는 성질대로.
세 번째는 근원적 문제인데, 교회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체가 개인화·자기중심화 되면서, 신앙도 개인화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하는 소명 의식이 약해졌습니다.
힘든 건 하기 싫고, 배우자에게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문화 명령이라는 인식도 없어요. 예수님 잘 믿는다는데, ‘생육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을 지키려면 결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결혼하면 힘든 일 있죠. 결혼하면 좋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주시면서, ‘할지 말지 선택하라’고 하셨나요? 편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관점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나님은 수단화돼 버립니다. 결혼을 똑바로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결혼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도 잘못 살았지만, 사실 ‘내가 잘 살았으니까 결혼해서 잘 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다. 내가 부족했을 뿐, 결혼이 잘못된 건 아니다’라고 설득하지 못했어요.
요즘은 권사님들도 ‘결혼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들 하십니다. 문화명령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편하고 풍요로운 걸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천국 아닌가요?
이런 쏠림 현상이 결혼 기피 제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연애’ 속 핵심이 배경 좋고 사람 괜찮으면 결혼하는 것이죠. 결혼 속에 있는 복음이나 창조 명령과는 관계가 없어요.
한국교회 결혼예비학교와 부부학교의 위험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화명령과 놀라운 신비를 전하지 않고, 프로그램화·인본주의화돼 있습니다. ‘결혼하면 잘 살 수 있고 행복하다, 대화법은 이러저러하다’ 하고 스킬 위주로 가면 결혼이 뭔지 모르니 싸우면서 기대만 커지고 생활은 팍팍해집니다. 인본주의가 너무 강해졌는데,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혼이 진짜 무엇인지 알면, 결혼하기 싫던 마음이 사라집니다. ‘진짜 결혼’을 가르쳐줄 시대가 됐습니다. 다 결혼을 잘하고 있다면,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예배를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적 기쁨은 2부 만찬이나 축하 순서에서 누리고, 1부 결혼예배에서는 ‘예수와 나의 결혼’이 부각돼야 합니다. 결혼식이 어느 순간 신랑과 신부 둘이 즐기는 것으로 전락하고 예배는 형식화되고 말았어요. 그 결과 예수님은 결혼식의 초라한 들러리가 되셨습니다. 그러면 결혼생활에도 예수님은 들러리가 되고, 싸울 때도 ‘예수님은 저리 가 계시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이혼할 때도 예수님은 고려 대상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이혼율이 신자나 비신자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에 대한 의미가 없어졌어요. 교회 다니는 청년들의 혼전 성관계가 비율이 60-80%에 달합니다. 평균 70%입니다. 열에 일곱은 이미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녀 차이도 없어요. 대신 남자는 횟수가 두 배입니다.
상담 비율이 불신자가 60% 정도로 불신자를 자주 만납니다. 불신자들의 혼전 성관계 비율도 70% 정도로 비슷합니다. 교회 청년들 속에 ‘예수’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예수님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복음이 초라해진 실상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구석에 처박혀 계십니다.”
결혼 전에 너무도 강한 성욕은 축복일까요? 아니면 음란한 죄악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훈련을 하기 위한 시험꺼리 일까요? 결론적인 답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결혼 전의 성욕은 결혼을 하라는 축복(창1:28)의 신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설계하신 그대로입니다.
성적으로 만족하고 싶은 욕망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잠언 5장 18~19절
“네 샘이 복된 줄 알고, 네가 젊어서 맞은 아내와 더불어 즐거워하여라. 아내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아름다운 암노루, 그의 품을 언제나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사랑을 언제나 사모하여라”
고린도전서 7장 5절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는 힘이 없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표준새번역)”
신명기 24장 5절
“아내를 맞은 새신랑을 군대에 내보내서는 안 되고, 어떤 의무도 그에게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 해 동안 자유롭게 집에 있으면서, 결혼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표준새번역)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성욕과 부부 성 관계의 기쁨에 대하여 인정하며,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이렇게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절제'를 외치게 되는 이유에는, '조심'해야 한다는 필요적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성의 기쁨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사탄의 유혹을 따르는 '음욕'의 쾌락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관점에서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조심'과 '절제'를 하나님의 뜻대로 '절제'하지 못해서 크리스천 부부들은 오히려 성 문제를 더 많이 겪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에 있는 첫 번째 큰 기쁨은 생명을 만드는 결정적 순간의 성취감(창1:28)입니다. 남성에게 성적 최고 기쁨의 순간은 생명을 만드는 '정자' 세포가 몸 밖으로 나갈 때입니다. 그 순간이 남성에게서 최고의 에너지가 발산되는 순간이기에, 여성도 그 순간에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순간은 단순한 성 행위의 쾌감이 아니라, 새 생명을 만드는 순간의 성취감인 것입니다.
그리고 큰 기쁨의 두 번째 의미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한 몸(창2:24)'이 되는 기쁨입니다. 남녀의 관계는 처음부터 성 관계를 목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을 알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자주 만나다보니, 함께 살고 싶어졌을 때, 가족과 공동체 앞에서 '한 몸'을 이루겠다고 '언약'을 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 마음을 따라가면 새 생명(창1:28)을 이루게 됩니다. 성(性)의 한자를 보면 "마음 心 + 날 生"이 모여서 性이 됩니다. 이 원리를 성경에서도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표준새번역).
독신에 관해서도 '성욕'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자기처럼 독신(고전7:1,:7)이 되는 것을 권장하기는 하지만, '받은 은사(고전7:7)'대로 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혼한 부부에게도 사탄의 시험을 받지 않도록 분방하지 말라(5절)고 말씀하셨고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정말로 성욕이 없다면 결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배우자가 확실하게 동의했을 경우에는 예외가 될 수 있겠죠.
꽃다운 17살 쯤, 생리, 몽정, 성욕을 주시고 이성에 대하여 뜨거운 관심이 끌리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음란 마귀가 쓰여서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떠나 이성만 밝히는 그릇된 길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설계하여서 만드신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性문화 연구회
팀 켈러 목사의 아내 캐시 켈러(Kathy Keller)가 TGC에 과거 게재했던 글 ‘나에게서 배우자를 빼앗지 마세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해서는 안 되는 이유(Don’t Take It from Me: Reasons You Should Not Marry an Unbeliever)’라는 글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본지는 서울 봉천동 한사람교회에서 목회중인 서창희 전도사가 번역한 해당 글을 소개한다. 전도서 설교를 토대로 <내 인생,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를 지난해 펴냈던 서 전도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중요한 내용이기에 부족하지만 번역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번역 전문.
많은 사역의 여정 속에, 남편 팀 켈러와 내가 일상적으로 마주했던 목회적 이슈는, 실제 결혼이든 약혼이든,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결혼 문제였다.
나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서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는 싱글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차라리 이미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후회하는 사람을 데려와서 나 대신 상담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면 나는 결혼은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고전 7:39)”라는 주님의 말씀과,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는 말씀,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구약의 명령을 가르치는 수고를 덜 수 있었을 것이다. (민수기 12장에 모세가 다른 민족 출신이지만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라.)
이런 구절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을 이미 믿지 않는 자들에게 빼앗겨버린 상황이라면, 그에게 성경은 타협할 수 없는 믿음과 실천의 기준이라는 사실에서 이미 멀어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뱀이 하와에게 했던 유혹이 자리잡는다. “참으로 …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나의 결혼만큼은’ 예외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얼마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지, 얼마나 내 예비 배우자가 믿지는 않아도 나의 신앙에 대해서 이해하고 존중해주는지,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음에도 얼마나 소울 메이트가 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나는 참을성 없고 예민하게 자라왔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말해버리고 싶다. “네가 하는 결혼, 절대 잘 되지 않을 거야. 장기적으로 말이야. 결혼은 영적으로 하나를 이룬 신자들에게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그냥 헤어져. 마음이 아픈 채로 좀 지내고 극복하는 게 나아.”
그러나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온화한 성품에도 맞지 않고, 확신을 주지도 못할 것 같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게 해야 한다
나는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 이후에(그들의 미련함 때문이었든, 아니면 결혼 후에 한 사람이 신앙을 갖게 되었든 간에), 믿는 사람과 결혼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과, 싱글들 중에서 그들의 열정과 헌신이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심지어 불순종이라는 말을 그들에게 적용시킬 필요도 없다. 단 10분만의 대화, 아니 대화의 핵심을 분명히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1분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믿지 않는 완벽한 남자와 결혼한 한 여자의 후회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 후회란 바로 이것이다. “결혼을 하기 ‘이전에’ 네가 많은 외로움을 느꼈겠지만, 네가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이후에’ 경험할 외로움과는 비교도 안 돼!”
이것이 목회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효과적인 접근이다.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찾아서, 믿지 않는 자와 결혼 하려는 자에게 자신이 겪는 고통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하고, 결혼을 계획하는 커플들이 목회자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전 세계를 돌며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하면서 괴로워하는 개인들의 영상을 편집하여 상영시키는 방법이 있겠다. 5분 안에 40-50개의 사례를 짜깁기하여 직접 설명하면 효과적일 것이다. 다양한 개인들의 실제 이야기는 다른 강의나 세미나 같은 효과로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한 설득 방식이 될 것이다.
세 가지 결과
일단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할 경우, 실제로 세 가지 종류의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이 결과는 겉으로만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배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결혼하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1. 믿지 않는 배우자와 함께 맞추어 나가기 위하여, 믿는 배우자는 예수님을 그의 삶의 주변부로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신앙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핑계 댈지 모른다. 그러나 묵상하는 삶,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환대하는 일(소그룹 모임, 긴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 선교의 참여, 십일조, 자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일, 다른 믿는 자들의 교제…)은 최소화 되거나, 거부되어야 한다. 가정의 평화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2. 첫 번째 방법의 대안으로, 믿는 자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밀어붙일 경우, 오히려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결혼 생활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만약 그 배우자가 성경공부나 기도, 선교, 구제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믿는 배우자와 함께하는 그 일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자 중 하나가 다른 배우자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헌신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결혼이라는 깊이 있는 연합과 하나됨은 만들어질 수 없다.
3. 그래서 결혼 생활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깨질 수밖에 없다. 아니면 스트레스 속에서 일정한 휴전상황이 펼쳐진다. 서로가 어떤 영역에서는 포기하고 항복하면서, 외롭고 불행한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원하던 결혼이었는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나의 신앙을 질식시키는 결혼? 아니면 부부로서의 성장을 목 조여오는 결혼? 아니면 둘 다? 바로 그것을 원한 것인가?
인용되었던 고린도후서 6장 14절의 “멍에를 함께 매지 말라”는 구절로 돌아가보자. 대부분은 농경 문화에 살고 있지 않지만, 농부가 소와 당나귀가 서로 멍에를 함께 매도록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한 번 상상해보라.
두 동물의 힘을 이용하도록 구성된 무거운 나무 멍에는, 분명 기울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두 동물의 키와 무게가 다르고, 걷는 속도가 다르고, 걸음걸이마저 다르기 때문이다. 멍에는 두 동물의 힘을 이용하기보다, 하중이 고루 분산되지 않아 오히려 두 동물의 살갗이 쓸리게 만들 것이다.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은 그리스도인에게 지혜롭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그 사람에게도 합당하지 않으며, 결국은 둘 모두에게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팀 켈러 부부의 개인 가족사
모두 솔직하게 공개하겠다. 우리 부부의 한 아들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자매와 몇 년 간 교제를 했다. 그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이 불순종이며,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몇 년간 들어왔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선택지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강력하게 상기시켜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우정은 자라났고,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게도 내 아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나는 결혼할 수 없어. 그리고 나랑 결혼한다 해서 네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너랑 함께 교회에 앉아있을 순 있겠지, 하지만 네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알아가는 것에 진지하다면, 그것은 네가 스스로 해내야 해. 너의 소모임을 찾고, 네가 직접 신앙 서적을 읽고, 내가 아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길 바래.”
다행스럽게도, 그 자매는 정직한 마음과 끈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성경의 진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구원하는 믿음에 가까워지면서, 나의 아들 또한 그녀의 믿음이 발맞추기 위하여 신앙이 성장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의 며느리는 어느 날 나에게 와서 말했다. “믿고 나서 하나님 말씀을 배워보니, 어머님의 아들은 믿지 않았던 저를 처음부터 만나서는 안 되었던 거였네요!” 그녀는 회심했고, 세례를 받을 때, 내 아들은 그녀를 세례 줄 물을 들고 서 있었다.
세례를 받은 다음 주에 내 아들은 그녀에게 청혼을 했고, 이제 그들은 결혼한지 2년 반이 지났다. 그들은 함께 성장하고, 함께 씨름하고, 함께 회개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두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정말 감사하다. 그녀가 우리 가족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가족사를 고백하는 이유는, 내가 아는 사역자들의 자녀가 믿음이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정말 깊이 깨달았던 것은, 심지어 목회자의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이야기되는 목회자의 가정에서도,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가 이혼한 가정을 상담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더라도, 부모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믿는 자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정에서도, 믿는 자들간의 행복한 결혼이라는 열매가 맺히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들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성도들은 어떠하겠는가? 독자들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슬픔을 들을 필요가 있다. 왜 믿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이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지혜롭지 못한 행동인지 깨달아야 한다.
원문: https://www.thegospelcoalition.org/article/dont-take-it-from-me-reasons-you-should-not-marry-an-unbeliever/

美 바이든, 결혼존중법 서명… 모든 주에서 동성혼 인정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의 효력을 인정하는 법안이 제정됐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각) 백악관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연방법인 ‘결혼존중법’에 서명했다.
지난 9월 하원을 통과하며 모든 의회 절차를 마친 ‘결혼존중법’은, 동성혼이 합법인 주에서 결혼했을 경우 이를 성, 인종, 민족을 이유로 금지하지 않고 미 전역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주정부가 동성결혼을 한 부부에게 결혼허가증을 발급하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한편 결혼존중법이 통과되면서 보수 교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 기독교 법률 단체인 자유수호연맹(ADF) 라이언 뱅거트는 “결혼존중법은 종교의 자유를 훼손하고 소송 위협으로 동성애를 둘러싼 토론을 묵살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리버티카운슬은 성명을 통해 “이 법안은 기독교적 결혼관을 가진 사업주들에게 파멸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기독교인 사진사는 동성 부부의 사진 촬영을, 기독교인 제빵사는 동성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케이크 제작을 강요당할 것”이라며 “법안이 통과될 경우 많은 기독교인들이 소송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서른통, 김남준 목사
결혼
결혼 또한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과업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 결혼은 평생의 삶을 결정하는 선택이기에, 많은 고민과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을 왜 하느냐가 중요하다. 결혼의 목적을 깨닫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결혼이라는 사건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갈망하는 배우자를 성취했다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없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빚으시고 다듬으시고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도구이다.
또한 결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께서 ‘인류 최초의 교회’인 가정을 이루는 방법이다. 결혼은 거룩하고 순결하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결혼을 통해 충만하게 드러내신다.
결혼은 그 사랑을 가정을 통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 적령기라는 이유로 세월에 떠밀려 준비도 목적도 없이 하게 된 결혼은 불행할 가능성이 더 크고, 더 힘든 과정과 고비를 넘겨야 할 일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들은 결혼의 목적과 함께, 결혼을 왜 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기도하고 발견해야 한다. 물론 결혼 그 자체가 신비하고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 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때, 서로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해 가는 삶에 은혜와 감동이 있다.
결혼이 나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대, 성도는 결혼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사회의 흐름과 분위기 때문에 결혼이 늦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때문에 조급해져서 일부러 결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물리적인 결혼 적령기는 있겠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결혼 적령기는 하나님과 각 개인이 결정해야 한다. 그러니 더디더라도, 부끄러워하거나 불행한 느낌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당당함을 가지고, 오히려 이 시기를 행복한 결혼생활을 준비하고 성숙해가는 은혜의 시기로 여겨야 할 것이다.
독신
결혼을 늦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자신에게 독신의 은사가 있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는 지체들이 많아진다. 그러나 독신 자체가 은혜롭고 하나님이 더 귀하게 보시는 것도 아니다.
독신으로 살아도 괴로움과 슬픈 일이 있고, 결혼하고 살아도 괴롭고 슬픈 일이 있다. 문제는 독신 자체가 귀한 것이 아니라 이 또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싱글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행복을 박탈당하거나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갖고 하듯, 독신 또한 더 주님과 연합하고 주님의 일에 시간을 들일 수 있고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해야 한다.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하는 독신은 오히려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결혼과 독신 그 자체가 행복과 아름다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결혼이든 독신이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최근 척 로리스 목사의 블로그에 게스트 블로거인 안나 쉐퍼의 '독신이 중요한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
내 인생이 내 어린 시절의 꿈에 의해 계획된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수송 할만큼 큰 차와 대출 받아 갖게 된 귀엽고 작은 집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대신, 나는 독신이다. 나는 몇개의 식물을 가지고 있고, 현대차를 운전하며 두 친구와 아파트를 나눠 쓰고 있다.
나는 내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충실하고 친절하기 때문에 그 분의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 나의 독신 생활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안다.
독신 생활을 통해 나에게 가르치시는 것 5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1. 거룩한 갈망
동반자에 대한 열망은 저의 기쁨과 만족 을 가져 오는 유일한 분인 예수님의 품안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나는 그 분의 사랑을 더 알기를 갈망한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나를 분리할 수 없다.
2. 의도적인 관계성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이 없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와 책임감을 추구하는 데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인간 관계에 참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때문에 풍부하고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랑을 잘 배우길 원한다.
3. 찬양의 삶
나는 남편을 가질 수는 없지만 나는 주님의 인도하에 살고 있다. 내 인생을 위한 그분의 좋은 계획에 복종하고 그분을 더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싱글로서의 나의 삶을 찬양의 제물로 드리는 법을 배운다.
4. 기쁨
기쁨은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 내가 가진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내 행복을 둔다면 나는 실패할 것이다. 독신은 나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친다.
5. 열망있는 기대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편을 제 삶에 데려 오시는 날이 아니라, 미래의 외로움과 궁금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날을 위해서다. 내 영혼의 연인과 얼굴을 맞대고 영원히 그분을 경배하는 날을 고대한다.
정직한 마음으로 지내기 위해서, 저는 주님께서 자주 이것들을 상기시켜 주실 것을 구한다. 이것을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했고, 언젠가는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독신의 삶을 안수하셨다면 그것이 그 분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 믿는다. 우리 중 일부는 독신일지 모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적용 / 서론
결혼의 목적을 이해하라
결혼의 본질을 이해하라
왜 결혼하는가?
왜 독신주의자가 되었는가?
가정은 성전이다.
가정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옆구리
측면
성전 건축 때에 사용된 단어이다.
여자는 창조하다 라는 단어가 아니라, ‘건축하다’라는 단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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