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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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2:4-7(신약 277쪽)
설교제목 : 성령의 은사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좀 어색하더라도 우리 서로를 향하여, 미소띤 얼굴로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서로 인사후
감사합니다.
어떤 시간을 통과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더욱 감사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알았는데 요사이에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사역하는 교직원들의 존재가 제게 너무 고맙고, 우리 성도 분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세세히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난 주간에도 많은 도움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고, 애정어린 마음으로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분들로 요사이 저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하루하루입니다. 그에 비해 저의 발전은 더디지만, 오늘도 저의 모자라는 역량을 주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일전에 예고한데로 성령에 관한 연속 설교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에는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얘기를 했다면요. 오늘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 이른바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보통 성령의 은사 이야기를 할 경우에는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 아래에 나오는 은사의 목록을 주로 성경본문으로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주로 소개합니다. 물론 여러 은사의 종류에 관해 이해하는 것도 좋을 수 있겠지만, 실상은 은사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더 필요하고 중요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된 성령의 은사 목록은 은사의 정확한 내용과 숫자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사의 다양성을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오늘 보는 고린도전서 12장 외에도 고린도전서 7장과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 베드로전서 4장에 또 다른 은사의 목록이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성령의 은사의 종류를 기록하고 말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양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에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할 때,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주로 강조되고 주로 목격되는 성령의 은사는 ’방언‘일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예언, 치유와 같은 은사가 목격되기도 합니다. 또 놀라운 것은 믿음과 독신도 성령의 은사의 영역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혹시 궁금해 하실까봐 말씀드리지만 저는 독신의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가장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또 정말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은 방언이 아닐까 합니다.
방언과 관련하여 오래 전에 들었던 이야기인데, 실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약간은 우스게 소리 같기도 한데요. 외국에서 열린 어떤 집회에 한국 분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예배인도자가 방언으로 기도하자고 했는데, 여러 종류의 외국어와 특이한 방언의 소리를 뚫고 익숙한 한국어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더랍니다. 그래서 혹시 자기처럼 한국에서 온 분인지 눈을 살짝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깜짝 놀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덩치 큰 흑인 아저씨가 한국어로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러한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있을 법한 얘기이기도 합니다. 방언이라는 현상이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방언의 신비한 현상으로 우리는 방언을 주목하는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지난 시간에 보았던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에 성령강림사건을 떠올려보면, 방언이 성령강림직후 신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임을 볼 수 있는데요. 제가 알기로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요. 한 때 어떤 교단에서는 이 방언이 구원의 징표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성령세례라는 것의 한 징표로써 방언이 나타나야하고 또 그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의 표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성도 분들이 기도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잘하는 것에 관해 사모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기도와 관련된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특별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한편 이것이 일종의 신앙의 탁월함을 또는 우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의 표지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이 방언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신앙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런지 모르지만, 듣기로 이러한 방언을 가르친다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들었던 황당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코카콜라 방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코카콜라를 빨리 여러번 반복하면 방언이 된다는 해괴한 이야기가 였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은사를 원하는대로 받는다는 것이 사실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지만요. 달리 보면 사람들이 방언에 관해 정말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고, 그것을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성령의 은사의 의미와 목적을 오해한 것에 따름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이 사실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인데요. 다시 한번 같이 오늘 성경본문인 고린도전서 12장 4절에서 7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앞서 얘기한데로, ‘방언을 배운다’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를 나의 임의대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자유롭게 성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다만, 관련된 자료를 찾으며 공부를 하다보니까요. 성령의 은사를 우리가 임의대로 받을 수는 없지만, 분명 성경은 또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고 가르치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구하고 사모하는 일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한다고 해서, 성령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은사를 주시거나 우리가 무조건 은사를 받게 될 것이라 말하진 않습니다. 단지 은사에 관하여 무지하거나 무신경하지 말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글 새번역 성경을 보면, 7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공동 이익 곧 교회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써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도구써의 목적을 가집니다.
그러니 성령의 은사에 관심한다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께 관심하는 일이고 또한 교회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와 같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안다면, 사실은 쉽게 성령의 은사를 구하지 않거나 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신앙을 자랑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신앙 공동체 곧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성령의 은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익과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유명한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같이 성경을 찾아 보면 좋겠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신약 278쪽에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도 그 목적과 뜻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쓸모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성령의 은사를 받는 일에 관심하는 것보다 그것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제가 성령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입니다. 20세기 스코틀랜드의 작가 A. J. 크로닌(Archibald Joseph Cronin, 1896-1981)의 대표작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 이야기의 일부분입니다. 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좀더 뒤에 밝히기로 하고요. 얘기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때는 1938년, 20년간의 중국 선교사 생활을 끝내고 고국에 돌아온 치셤Francis Chisholm 신부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오랜 타지 생활을 정리한 치셤 신부는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에 정착하여 사목 활동을 계속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이는 많고, 일은 서툴고, 몸은 불편한 치셤 신부를 은퇴시키려고 주교는 비열한 계략을 세웠습니다. 주교는 비서인 슬리스 신부를 보내어 노신부를 관찰하고 조사하여 현직에서 내려오게 할 빌미를 찾아서 보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나름 마음의 준비는 했겠지만, 젊은 신부의 눈에 비친 치셤 신부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랜 타지 생활 끝에 젊음을 다 소진해 형편없이 늙었고, 선교지에서 입은 상처로 얼굴은 일그러지고 다리도 절었습니다.
신부의 품격에 맞지 않게 언제 세탁했는지도 모를 더럽고 낡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신부는 고아 한 명을 거두어 함께 살고 있었는데, 본인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늙은이 아니랄까 봐 제대로 된 교육이나 돌봄을 제공하지 않고 소년을 방치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교가 슬리스 신부를 자기에게 보낸 의도를 눈치챌 만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는지 노신부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여전히 어설프게 이야기하고 행동했습니다.
닮고 싶지도 가까이하고 싶지도 않던 치셤 신부를 곁에서 한동안 묵묵히 지켜보고는, 슬리스 신부는 고난과 실패로 얼룩진 한 노인의 삶에 숨겨진 위대함을 알아보는 눈을 얻었습니다.
결국 그는 노신부를 파멸로 이끌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을 신임했던 주교를 실망시켰고, 권력과 성공의 길에서 엇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치셤 신부와 보냈던 짧은 시간은 슬리스 신부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도 치셤 신부처럼 양심과 진실의 렌즈를 통해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생각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참으로 다양하고 그 각각의 가치는 차별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방언과 같은 은사는 신비롭고 특별하다고 느끼면서도 믿음과 같은 은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은사는 상대적으로 더 크고 중요해 보이고 어떤 은사는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생각할 때, 그 각각의 차등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온전히 사용되어질 때, 공동체 곧 교회에 놀라운 유익을 제공합니다.
저는 방금 소개해 드린 이야기 속에서 두 대조되는 인물을 봅니다. 한명은 이제는 다 타버린 재와 같은 치셤 신부이고, 다른 한명은 곧 타오를 불꽃같은 슬리스 신부입니다. 어쩌면, 슬리스 신부의 불꽃에 치셤 신부는 삼켜질지도 몰랐습니다. 그의 불꽃은 강력했고 치명적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끝내 치셤 신부는 삼켜지지 않았고, 도리어 슬리스 신부의 거친 불꽃을 온화하게 다듬어 버립니다. 이는 마치 성령의 은사가 서로 다르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는 모양새로 느껴집니다.
저는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피조물들이 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가령, 흑백 영화처럼 색이 지워지고 하나의 색상이 세상을 뒤엎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둡고 우울한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색깔을 지닌 존재가 하나 둘 모두의 빛을 발함으로 이 세계는 이렇게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한편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이유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는 작은 점이나 작은 빛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게중에는 비교적으로 좀더 크거나 밝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각각의 것들이 모두 모여져 빛을 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멋진 풍경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퍼즐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 다른 조각의 퍼즐이 모두가 모여야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작은 조각 하나라도 빠지만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것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하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요.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번 더 찾아보겠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20절까지 말씀입니다. 신약 277쪽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우리의 몸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우리의 몸이 여러 지체들로 되어 있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도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삶이 또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다르지 않고 다르지 않아야 함을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를 놓고봐도 그렇습니다. 아마도 제가 목사여서 저를 아껴주시고 귀하게 여겨주시며 존중해 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저는 특별대우를 받는 셈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은 그분들의 기대와 바람에 미치지 못할만큼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다른 사람은 부인할지라도 저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참 잘 압니다.
과거에 저는 나는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나는 군생활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지금 그것은 거쳐온 시간들로 할 수 있음이 증명되어 버렸지만, 저는 그 과정들을 과연 충분히 성실하게 또는 온전히 보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마치 운전면허는 땄으나, 운전은 못할 것 같은 상태라고 할까요. 내가 목사가 되었으나, 참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오롯이 감당하고 있지 못하는 마음이 들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렇게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일인데, 자주 이 일이 제 안에 두려움으로 찾아올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스스로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나로 말미암아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 받으시기에 흡족한 예배가 못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등의 두려움이 엄습하곤 합니다. 그래서 자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공부하고 책을 읽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참 좋은 신앙의 선배들이 있어서, 나의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을 많은 지식이 세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이 소화하고 흡수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 자주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종종 제가 덕을 끼치는 찰라가 있었음을 말씀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꼭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누군가의 신앙생활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제가 그 일에 사용되어져서 감사합니다.’ 저는 저의 작음을 알기 때문에 또한 그 작음을 들어쓰시는 하나님의 놀라움을 크게 생각합니다. 또 이로 말미암아 저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차별과 소외를 경험합니다. 크게 보면, 남여의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이고, 나이에 따른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입니다. 그외에도 문화와 종교 등의 여러 차별과 소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차별과 소외 속에서 우리는 나의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어느 순간 나는 퇴물의 쓸모 없는 존재로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는 그렇게 우리를 어느 순간 밑바닥으로 끌어 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과 달리 우리를 차별하시거나 소외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는 그것을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각각이 모두 한 몸을 이루고 그 각각이 모두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충분히 들어 쓰십니다.
그러니 성령의 은사에 관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이 주시는 가치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됨을 경험하며 나의 존재를 결코 부정당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귀하다 귀하다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저와 우리 성도 분들께서 이와 같이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성령의 은사에 관심하고 그 일을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섬겨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오늘 말씀을 놓고 잠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유익이 되고 덕이 되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세워나가는 일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이를 놓고 같이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