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1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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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19-39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힘든 것은 물론 내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이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소망에 있는 것이다. 바라보는 것이 다른 것이다. 소망이 있으면 지금 눈 앞에있는 어려움이 어려움이 안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해내면 내가 조금만 견뎌서 고생하면 더큰 보상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고난과 고통을 능히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후에 내게 주어질 보상에 소망을 두기 때문이다.
운동선수가 그 힘든 훈련을 자기 스스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훈련이 얼마나 힘든가? 고통이고 스트레스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렇게 열심히 훈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시선은 지금 당장의 어려운 훈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자신이 훌륭한 선수가 될 것을 소망하며 그것을 바라보며 지금의 어려운 훈련에 임하는 것이다.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당장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상황과 환경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이어트를 성공 한 후 이쁘고 멋이어 질 자신을 보며 하는 것이다.
몸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공부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들은 대부분 고3의 힘든 시기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것을 견디고 버틸 수 있는 힘은 지금 내게 처한 상황과 환경에 내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모든 것들 감당 했을 때 내게 주어질 멋진 캠퍼스에 대해 소망이 있기에 여러분들이 버티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다. 소위말해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늘 비전이 있다. 그들의 소망은 지금 내게 처한 현실에 있지 않고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려움운 상황에 처해있을 때 우리는 지금 당장 놓여진 그 문제에 집중 할 것이 아니라, 이 넘어의 것에 소망을 두고 이 어려움 넘어의 것을 바라보며 소망을 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오늘 예레미야는 지금 자신들에게 처해진 상황을 절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에 이렇게 고백한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유다의 시련을 쑥과 담즙에 비유한다. 쑥은 매우 쓴 기름을 생산하는 재료이고 담즙은 독초나 독약을 생산하는 식물이다. 그러기에 지금 유다가 경험하는 고난을 상상할 수 있는 것들 중에 최고로 쓰고, 독 한 것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낙심이 된다고 고백한다. 지금 자신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지금 자신의 나라가 망해서 많은 이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황폐화되었으니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가?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며 예레미야는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지금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과 환경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예레미야가 고백하길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보며 낙심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낙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 소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죽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거기서 소망을 보았다. 왜 예레미야는 자신들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 소망을 가졌는가?
그 크신 하나님께서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멸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우리를 죽이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신들 편에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은 예레미야는 이 다음부터 그의 고백이 바뀌기 시작한다.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고백한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24. 내 심령이 말하는 구나. ‘여호와는 나의 전체이시므로 내 희망을 그에게 두리라.’ 지금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더니 뭐라고 고백하는가? 내 희망을 여호와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상황과 환경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변한 것은 무엇인가? 상황과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 시야가 바뀐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당면한 상황만을 보면 절망밖에 없지만, 예레미야는 이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니 소망이 생기는 것이다. 왜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인가?
그 다음절인 25절을 보면 예레미야애가 3:25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것을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희망을 걸고 자기를 찾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여호와 하나님께 희망을 걸고 주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처한 상황에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고난을 겪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고생하게 하시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뜨여진다면, 지금의 고난을 통해 죄를 고백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만 있다면....
하나니은 그러한 심정으로 지금 유다를 벌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레미야가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벌 줄때, 그 목적이 자녀의 고통이 아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자녀의 좋지 않은 습관과 태도, 행동이 고쳐지는 것이 목적이다.
사랑하는 청년교회 청년들 우리의 죄로인해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가 처한 상황 넘어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께 소망을 둘 수 있길 원한다. 우리 다시한번 시선을 소망되신 주님께 두길 바란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이해 할 수 없을지라도 변함없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그 신실하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