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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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오늘 예배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 받았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은 세상적인 노래와 춤으로 은혜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서 자신의 답답했던 마음을 말씀을 통해서 말할 때 눈물이 나기도 하고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의 영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은 자신들의 신에게 드리는 제사 행위를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종교적인 감정, 욕망을 표출하는 것 일뿐이었습니다.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며, 더욱더 자극적인 행위를 위해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서 신비한 엑스터시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모세오경을 통해서 끊임없이 밝히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태양, 소, 등 신비한 모습을 갖고 있는 인격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셨기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예배는 종교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예배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 속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순종의 삶 없이 예배할 때에 한 시간의 예배 속에 종교적인 갈증만을 채우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맞추어서 일부 잘못된 목회자들은 예배 시에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을 채워주어서 은혜를 받도록 하려합니다.
가끔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쉬면서 기독교방송채널을 돌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S 목사님이 계십니다. 예배 시간이 거의 버라이어티 쇼 수준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고 빛바랜 연예인들을 등장시켜서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게 하여 지난날의 옛 향수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예배의 행위를 보면서 저것이 과연 예배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과연 예배란 무엇입니까? 오늘 2016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 한 번 성경적으로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영적 삶의 최우선순위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문제는 열심과 열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우선순위를 예배라고 가르칩니다. 인생의 문제의 실마리를 풀려면 예배로부터 풀어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할 것이요, 예배에 실패하면 나머지 모든 것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성도가 시험을 이기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2016년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예배가 다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배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 물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서 예배가 무엇인가로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하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동네의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요 4:39)
1)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 하나님께 집중하라(23)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자신의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성적으로 탈선한 여인입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의 단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아침에 물을 길으러 오지 못하고,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이 여인이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물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인식하게 됩니다.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 “보다”라는 동사는 즉흥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조심성 있게 관찰해본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첫 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요 4:20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질문하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죽게 되고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성전이 남 유다의 예루살렘에 있으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곳으로 가는 백성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내려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왕의 정통성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에 물들게 됩니다.
이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아브라함, 야곱도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쪽이 더 정통성이 있지 않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된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요4:21-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오늘 사마리아여인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장소,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부족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 야곱에게 주신 언약, 즉 모세의 시내산 언약에 의해서 생명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진정한 구원이 없었습니다. 목마른 갈증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주는 물은 물리적 물이 아니라 초월에서 오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을 얻게하는 생명을 주는 물이기에, 영원히 목마를 수 없는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상담을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상담 교과서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교과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중심의 시내산 언약의 완성자가 되셔서 이방인들이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생명 없는 모조품이 아니라 인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마땅한 대접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아빠가 되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아빠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고 오직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이룰 수 있기에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하고 가치와 존중을 돌린다는 말입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올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 찬양,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응답하는 시간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연인들을 보세요. 제가 지난날, 총회 회의가 있어서 서울에서 지하철을 탄 적이 있습니다. 그중 제일 복잡하다고 하는 2호선을 탔는데, 제 앞자리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연인가 마주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0분 동안 그들은 얼굴을 만지기도 하며 눈과 눈을 마주보며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속삭이며 교제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언제 흘러가는지도 모릅니다. 헤어지는 시간을 아쉬워합니다. 돌아서기가 무섭게 다시 달려가고 싶습니다.
시42:1-2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찾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다라쉬’인데 원어적인 뜻은 ‘추구하다’, ‘따라가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나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신 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러 가지 중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왜 중독에 빠지게 됩니까? 이 세상 것에 목말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왜 인기 많고 돈 많은 연예인, 스포츠스타들이 마약과 도박에 손을 대는 일이 일어납니까? 끊임없는 이 세상에 대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이 목마름을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예배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통해서 영혼의 갈증이 해갈될 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붙들릴 때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은혜가 없으면 순간적으로 만족하게 해주는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없고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2016년 새해 첫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가 예배를 통해서 해결되고 회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예배가 회복된다(23,24)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예배를 드리는데 장소와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내용과 예배자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씀하십니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를 직역하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이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예배입니다. 예배 속에 성령의 인도는 반드시 진리, 즉 말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행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과 말씀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올바른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곳에는 반드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있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감정적인 흥분이나 이방종교의 신비한 종교적 엑스터시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들려야 예배가 회복되고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올바른 반응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지만 이제는 예배드리는 시간에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물론 설교자는 성령을 의지하고 성경을 정확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는 “설교자가 성경을 말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영적인 변화와 회복은 예배 속에 영과 진리가 충만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십계명 돌비를 받으러 올라가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합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크게 범죄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돌아오시도록 진 밖에서 회막을 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위에 세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 손으로 그를 덮으셨다가 손을 잠시 거둘 때에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등을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손, 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것입니다. 그 후 모세는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의 광채가 있어서 감히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얼굴에 수건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고후 3:7-9에서 자신은 옛 언약과 모세의 직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복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얼굴이며 그 영광의 광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거룩한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마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보고서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임하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염려와 근심,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전심으로 찬양드릴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때 우리의 심령은 뜨거워지고 내 속에 있는 불신앙과 어두운 그림자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배의식, 순서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중심이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붙드는 것입니다. 시 119:116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하소서”
성도여러분!!
예배하는 이 영광스러운 시간에 어떻게 졸 수 있겠습니까? 잠은 집에서 얼마든지 잘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데 어떻게 반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어떤 위대한 것도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2016년 새해 첫 주일을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매 주일마다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가정과 직장, 모든 삶의 터전 위에 예배가 회복된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