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 3] 자비
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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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6월 11일 주일 청년부
시리즈 : 하루 아홉 번 : 예수 닮기
제목 : 철저하고 완벽하게 죽어라
본문 : 요한복음 8:1-11
결단 : 예수로 사네
[설교 전 중보기도 제목]
1) 성령의 열매를 나눕니다. 성령의 열매가 우리 삶에 맺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하소서. 작은 열매 마저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허락 하소서
2) 시험을 치르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김영찬, 류희제, 서재영, 윤대한, 홍수빈. 이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시험을 잘 감당케 하소서. 학업의 목적이 부와 명예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소서
[죽다 사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이 바뀌는 일]
여러분들의 바뀐 삶 중 가장 극적으로 바뀐 삶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또 여전히 바뀌지 못한 점은 무엇입니까?
제 인생에서 가장 극적으로 바뀐점은 역시 세상이 추구하는 멋보다 예수로 사는 멋을 추구하는 삶이 가장 큰 변화일 것입니다. 이 변화는 백번이면 백번을 생각해봐도 그저 예수님이 바꿔주신 변화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 내가 목사가 되었지?’ 생각할 때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바뀌지 않는 점도 참 많습니다.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습니다. 또 밥을 잘 먹고 싶어도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또 잠을 잘 자고 싶은데, 심히 피곤한 상태가 아니라면 깊은 잠에 들거나 낮잠을 자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또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을 잘 못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람이 바뀌는 점보다 바뀌지 않는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잘 바뀌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죽었다 살아나는 일보다 어려운게, 사람이 바뀌는 일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령의 열매를 무려 9개나 주시곤, 그렇게 바뀐 삶을 살라 명령하신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합니다.
물론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요? 이 열매들이 우리가 바꿀 수 있음도 아니고, 우리가 잘나서 맺어갈 수 없음을 하나님도 아시기에 ‘성령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방향성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늘 설교의 결론도 ‘주를 바라보라’ 입니다. 아니, 앞으로 남은 성령의 열매들을 다룰 때에도 결론은 ‘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몇 주치 설교의 결론을 다 알았다 해서 예배를 소홀히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나와야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양선이 무엇이고, 충성과 온유 그리고 절제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구절로 유명한 본문일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음행 중에 잡혀 온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구원과 용서가 담긴 본문 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다]
본문의 시작을 봅시다.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들의 목적은 간음한 여인을 징벌하고, 공개처형에 욕심이 딱히 없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그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잡을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한 것은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 예수님 앞에 세우고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음과 동시에, 대답을 들어 예수를 잡고자 했던, 그저 미끼였을 뿐이었습니다.
이들이 기대한 대답은 아무래도 ‘용서해라’ 였을겁니다. 지금껏 ‘용서’를 마음껏 언급하신 예수님이었기에, 간음한 여인 또한 ‘용서하라’ 말씀하실 것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듣자마자 이들은 합법적으로 체포할 예정이었습니다.
왜 이 대답이 합법적인가? 이들에게 가장 큰 권위는 모세오경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그 모세오경에 어떻게 기록되었냐면, ‘간음한 자를 죽이라’고 기록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본인들이 가장 믿고 따르던 모세오경에 반하는 대답이기에 합법적으로 예수님을 잡을 수 있다 생각한겁니다.
‘용서’라는 대답을 기대한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겁니다. 이 대답에 어느 누가, 죄 없다 말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죄인이 아니라 말할 수 있냐는 겁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도 율법적으로 틀린 것 하나 없던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살립니다. 10절과 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 순간, 절체절명의 순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나, 다시는 죄를 짓지 말거라’ 말씀하시며, 그녀를 구원하십니다.
아마 그녀는 그렇게 용서받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기도 했을겁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이 안되는 상황에서 용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녀를 용서했고, 그 십자가 사랑을 그녀가 경험했기에, 그녀 또한 그 십자가 사랑을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자비, 어떻게 열매 맺는가?]
그렇담 자비란 무엇이기에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용서하게 하시고, 또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 결단하며 살도록 사람을 바꿔버리는 것일까요?
자비란 ‘크고 넓은 마음’ 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는 ‘친절’의 의미가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절은 그저 친절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악한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자비라 말합니다. 곧 자기희생이 있는 친절이 바로 자비인 셈이죠.
그런데, 그 자비.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언제요? 이미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존재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로 말미암아, 죄인에서 은혜입은 자로 탈바꿈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비를 받았다 하여, 그렇게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다 해서 우리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성령의 열매 중 자비를 열매로 맺으려면, ‘우리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봐야 합니다. 내 죄가 얼마나 무거웠고, 그 죄가 결단코 용서받지 못할 죄였음을 우리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 놓여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비로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비로소 성령의 열매, 자비를 맛보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꽤 최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받은 사실에 감격도 했고, 또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고자 노력도 했지만, 죄짐의 무거움을 심판대 앞에 평가 받았다 느낀 것은 최근의 일인 것 같습니다.
감당해야 할 일도 많아지는 요즘. 하나의 하드웨어를 여러 방면으로 돌려야 하는 요즘. 참 쉽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늘 제게서 이유를 찾기에, ‘능력 부족’에 의한 과부화로 정의를 내렸지만, 생각할 것도 많고 행동해야 할 것도 넘쳐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하튼, 목회가 아닌, 목양이 아닌 비지니스처럼 상황이 다가올 때 참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시작한게 4시 18분 기상이었습니다. 새벽을 깨우고, 그 시간을 하나님으로 채우자.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의 무게는 상당한데, 나의 하루는, 나의 삶은 그 무게의 일절만큼도 갚아나가지 못함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내기로 결단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내 죄의 무거움을 겪어 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 심판대 위에 서 보셨습니까? 서 보셨다면, 그때의 고백을 여지껏 가지고 계십니까?
사실 쉽지 않습니다. 심판대 위에 서기 위함도 어렵지만, 그 위에 서봐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자비로운 자로 탈바꿈 함에 어려움을 겪습니까? 그것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죽을 죄인인 것을 아직도 진짜 깨닫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비가 어떤 자비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자비를 받았는지, 그 심판대 위에 놓인 우리를 향해 판정 내리신 하나님의 선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나면 사람은 바뀝니다. 사람은 반드시 바뀝니다. 아니 십자가가, 성령님이 바뀌게 하십니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죽어라]
우리는 하나님 심판대 위에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들 참 많이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근데,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정말 죽음을 강행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2장 2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나는 죽어야 합니다. 작은 씨앗이라 할지라도, 그 씨앗을 완벽하게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내 자신과 말입니다. ‘하나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도 웃긴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지, 결단코 죽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나를 죽이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일입니다. 내가 나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삽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죽음으로 처리해야 하고, 그것이 곧 믿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크리스토퍼 라이트라는 학자는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라면 나는 저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까? 예수께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까?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행동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 안에 나를 죽이고, 예수로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겠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또 심히 놀라운 일들만 가득 채워지는 삶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그 과정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이 저를 죽일 수 없지만, 서로가 한 마음과 한 뜻을 품어, 나는 죽고 예수로 살 수 있도록 붙들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매순간 예수는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결과가 너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마지막으로 말씀을 마치고 찬양을 하려 합니다. 더바디샵의 창업자인 ‘어니타 로딕’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비의 최종적인 결과는 그것이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천에게 자비의 최종적인 결과는 그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이끄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가는 삶이 곧 자비입니다. 그런 삶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후 기도]
1) 내 안에 나는 죽겠노라 다짐하고 결단케 하소서. 오직 예수로 사는 자 되게 하소서
2) 내 삶 주께 맡깁니다. 주로 살겠습니다. 세상 어둠 가운데 빛 되신 주를 바라보게 하소서
3) 수련회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여름 수련회를 준비하는 모든 손길이 주님의 뜻과 은혜 가운데 준비되어져 가는 시간 되게 하소서
4) 수련회를 비롯한 모든 예배와 우리 삶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임을 고백합니다. 왕이자 주인 되신 주께서 함께 만들어가며, 영광 받기에 합당한 예배요 수련회 준비하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이제 나는 죽겠노라, 철저히 또 완벽하게 죽겠노라 다짐하여, 이제는 예수로 살겠다 다짐한 자들과
삶의 주인되신 주께서 영광받는 예배요 삶 이끌어 가겠노라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