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8 저녁]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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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3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본문 막8:22-26
예수님께서 벳새다 지역에 도착하셨다. 여기서도 주님의 소문을 들은 많은 무리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저들은 맹인을 한 명 데리고 와서 주님께서 안수해 주시기를 구하게 된다. 이 맹인은 날 때부터 못 보던 자가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시력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온 후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첫 번째 안수 후에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닌다’ 고 하였는데, 날 때부터 못 봤다면 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 맹인의 손을 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고, 이후에 두 번 치유해 주셨다.
첫 번째로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하시며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을 때 맹인이 눈을 뜨고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보이는데 마치 나무가 걸어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 눈에 안수하실 때에 그의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무얼 말씀하시는가? 세 가지를 전할 것인데, 이를 마음에 잘 새겨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귀한 사역들을 감당하시는 3,4여선교회와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첫째,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자는 맹인과도 같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벳새다에서 행하신 사건이다. 이곳은 이전에 주님께서 5천명의 무리를 배부르게 먹이셨던 곳이었고, 또한 수 많은 이적을 나타내셨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아 주님께 책망 받던 성읍이었다. 이러한 지역에서 맹인을 치유하신 본문의 사건은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특별한 기사이기도 하다.
오늘 본문의 흐름을 보라. 함께 읽진 않았지만, 막8:11-13 을 보면, 바리새인과 헤롯당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다. 이어서 14-21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제자들 역시 주님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여 책망을 듣는다. 바로 그 뒤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앞서 등장하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제자들이나,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면, 본문 속에 등장하는 맹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곁에서 아무리 많은 가르침과 이적을 경험하였다 할지라도,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주님은 맹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다. 그리고 29절을 보시면, 주님은 맹인에게 질문하셨던 그대로 제자들에게 물으실 것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당시 수많은 무리들은 눈 앞의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국을 독립시킬 정치적인 지도자 정도로 여겼다. 그들은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고 듣고 경험했지만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주님께서 여러분 앞에 서셔서 여러분의 눈을 여시며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실 때,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뭐라고 대답하시겠는가? 오늘날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이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알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이신 것도 알겠지만, 그것은 그거고 나는 내 뜻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면서 세상과 아무런 구별됨 없이, 마치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내 나라가 임하길 원하고, 내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길 원하고, 내 뜻이 이뤄지길 바라는 무신론자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왜 세상의 신뢰를 잃어버렸는가? 왜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렸는가? 하나님이 문제이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뭔가 잘못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가? 아니면 우리가 소유한 복음이 문제인가? 천만에! 교회 울타리 안에 있으며 모든 종교적인 열심과 종교행위들로 자신을 양처럼 포장하고 있는 염소와 같은 자들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찬양도 하고, 헌금도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 무신론자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여러분, 혹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주일에는 열렬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지만 교회당 문턱을 넘어 밖으로 나아가는 순간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께서이 땅에 임하셨다. 그러나 그 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허름한 구유에 뉘이셨고, 명문 집안도 아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으며, 허름한 촌 동네에서 자라셨고, 결국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 아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주님께서는 넓은 길로 가라 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라 하셨다. 자기를 드러내는 인생, 자기를 자랑하는 인생을 살라 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그 분을 따라가기 위하여 성공적인 인생, 유명해지는 인생을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으실 때 과연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아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지극히도 사랑하셔서 하늘 보좌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버리고, 저와 여러분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려 낮고 천한 이 땅 가운데 내려오시고, 죄 없으신 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철저한 죄인으로서 십자가에서 수치와 죽임 당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은 맹인과도 같다. 분명 육체의 눈은 멀쩡하지만 영적인 눈은 가로막힌 영적인 소경과도 같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셔야만 한다. 우리 가운데서도 혹 하나님을 나의 생각으로 가두어 이해하려 하고, 내 뜻대로 곡해하려는 모습들이 있을 수 있다. 나의 고집과 오해와 그릇된 생각들이 우리의 두 눈을 가려서 진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복음을 들어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언제나 겸손하게 엎드려 우리의 두 눈을 덮고 있는 아집과 교만과 그릇된 생각들을 걷어주시고 완전하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의 두 눈을 바로 보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 신앙의 연수가 깊어져 갈수록 더욱 더 주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깊어져 가는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원한다.

둘째, 우리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눈뜬 맹인들을 주님께로 이끌고 나와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 22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맹인을 데리고 와서 손 대어 주시기를 간구했다고 말씀한다. ‘그들은 예수님께 맹인을 만져주도록 간청’하였다. 어떠한 마음으로 맹인을 예수께로 데리고 나왔을까? 성경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맹인을 주님께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
그들은 왜 주님께로 데리고 나아왔을까? 이를테면 좋은 병원도 다녀봤겠다. 좋은 약도 먹어봤겠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소문을 듣자 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시고, 귀신도 내어 쫓으셨다고 한다. 나병환자도 깨끗하게 하시고, 중풍병자도 낫게 하시며, 손 마른 자도 고치시고, 바람과 풍랑도 잔잔하게 하신단다. 혈류병 여인도 고치시고 죽은 것 같았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까지 다시 살리셨단다. “아니! 이분이라면 이 불쌍한 맹인 친구를 고쳐주시기에 충분한 분이 아니신가?”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파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없던 그 믿음을 이들은 소문을 통해 이미 갖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이 불쌍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던 것 아니겠는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누구신지에 대해 알고 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에게 어떤 놀라우신 일을 베푸셨는지, 현실에서 어떠한 은혜가 임하는지와 장차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맹인을 불쌍히 여겨 주님께로 데려왔던 이 무리들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충만해 지는 것 아니겠는가? 죄로 눈이 가려져서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하는 죄인들을 불쌍하고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바로 그 마음으로 그들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와야 한다. 주님 만이 이 사람의 유일한 소망이시고, 주님 만이 이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고, 주님 만이 이 사람을 치유하실 수 있고, 주님 만이 이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이끌어 와야 하지 않겠나.
안그래도 OECD 가입국 가운데 우울증 수치가 가장 높은 나라가 우리 한국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코로나19로 인하여 더욱 우울증은 우리의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고 한다. 평소 가족들과 친구들과 재미있게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괴로움, 외로움, 우울증 가운데 살아간다. 그 어느 때보다 부요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데도불구하고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흥청망청 누릴 것 누려보고, 즐길 것 즐겨봤다 할지라도 그 마음 한 켠에 늘 공허함이 남아있다. 이 공허함은 세상 것으로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고 더 큰 공허함만 남긴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이 마음속 빈 곳은 결코 세상 것으로 채울 수 없다. 사실 사람이 창조된 그 순간부터 이 빈 곳은 하나님의 자리였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오는 만족과 평안,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채워가는 공간이었다.
여러분, 저는 개개인의 인생사를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누리는 평강이 충만하신 줄로 믿는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지금 이 순간에도 누리고 계시는 줄로 믿는다.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나만 알고 몰래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이 복된 자리로 초청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만난 예수, 내가 경험한 예수를 전하여 많은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주님께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라옵기는 일평생 예수의 증인되어 소망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진리를 전하는 3,4여선교회와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지막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5절 말씀을 보라.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눈을 뜨게 된 맹인이 정신을 집중하여 보니 지금껏 깜깜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완전하고도 또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두 번의 안수를 통하여 맹인의 시력이 완전하게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번의 안수는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 맹인의 시각 장애가 그만큼 심각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가장 어렵고 가장 심각한 장애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고치신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님께서 처음의 안수를 통해 그의 시력이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을 때에 ‘이 정도만 되어도 살아갈 만 할 것이니 여기서 만족하며 살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이 맹인이 부분적으로 시력을 회복하였을 때에 한 번 더 안수하심으로 그가 세상을 분명하게 보도록 완전하게 치유해 주셨다. 물론 두 번에 걸친 안수를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무능하셔서 두 번이나 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지금 고의적으로 두 번에 걸쳐 맹인을 치유하셨다. 왜일까?
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파와 같던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였고, 심지어 함께 있던 제자들까지도 주님을 오해하였다. 주님은 두 번에 걸쳐 맹인을 치유하시며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자 하셨다. 그 가르침이 무엇인가? 바로 앞의 본문인 막8:18-20 를 보면,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 예수님은 여전히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 교훈을 심어주고자 하셨다. 오늘 맹인을 두 번에 걸쳐 치유하시면서 이 일들이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완전한 은혜를 내려주시며, 풍족히 채워주시며, 언제나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한 것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완전하다. 주님께서는 맹인의 시력을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고, 또한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시되 그의 말이 분명하도록 회복하셨으며,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되 풍족하고도 배부르게 먹이셨다. 우리에게 어떠한 눈꼽 만한 공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죄인중의 괴수인데, 우리를 먼저 택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구속하시며, 인 치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아줬으니 이제 알아서 잘 살아봐라’ 라고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천국 문에 이를 때까지 지켜 가시고 보호해가시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신다. 결코 홀로 이 땅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 분이시다. 온 우주 만물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으니 이 세상의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하나님 모르게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 이러한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주님께서 나의 하나님 되시고, 나의 아버지 되시니 어찌 그 감사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완전하다는 것을 믿으며, 비록 지금의 형편이 힘들더라도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금의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시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상황과 형편에 가장 적절하게 부어주신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고 차고 넘치도록 부어주신다. 비록 연약한 우리는 언제나 흔들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며, 우리는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며 완전한 은혜를 베푸신다. 히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신 은혜를 신뢰하며 믿음으로 오늘도 고난 중에 인내하고, 환난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려 한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3가지 교훈을 말씀드렸다.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자는 눈 뜬 맹인과 같으며, 이처럼 소망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우리는 소망이신 주님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인내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날마다 우리의 신랑되신 주님을 더욱 분명히 알고 경험하며, 많은 잃어버린 양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완전하신 은혜를 신뢰하며 주어진 삶 속에서 인내의 열매를 맺는 3.4여선교회와 이 자리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기도하자.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변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은혜를 늘 신뢰하며 지금 나에게 주어진 환경들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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