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이야기-하나님은 선하시다(신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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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예레미야 33장 10-11절(구약 1106쪽)
설교제목: 기독교교리 이야기-하나님은 선하시다(신정론)
예레미야 33:10–11 NKRV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옆 사람과 서로를 향해 크게 미소 짓고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서로 인사 나누고
감사합니다.
오늘도 준비한 영상이 있어서 먼저 시청하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조금 긴 내용일 수 있지만, 오늘 나눌 주제와 깊이 관련이 되어 있어서, 잘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 영상: 11분 50초(영화 ‘오두막’ 편집영상)
방금 보신 영상은 ‘오두막’이라는 소설 원작의 작품을 2017년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영상을 통해 보신 것처럼, 어린 딸을 잃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주인공이 신앙 안에서 치유함을 받게 되는 과정을 판타지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장면이나 언뜻 천국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다소 무리수가 있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합니다.
소설이 2009년에 나왔는데, 저는 영화는 보지 못했고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요. 소설 속에서 성부 하나님이 흑인 아줌마로 등장하는 것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하나님에 관한 이미지였습니다. 그와 같은 연출을 한 것은 사실은 주인공 맥이 과거에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것에 따름인데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관심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또한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인 맥은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으로 인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저는 그것이 오늘 우리 삶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고통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이 고통의 문제는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에 따라 우리는 종교를 가지거나 신앙 안에서 살아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이러한 고통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른바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본래, 신정론이라는 말은 두 개의 헬라어 곧 고대 그리스어의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신을 뜻하는 헬라어 ‘데오스(theos)’와 정당성을 뜻하는 헬라어 ‘디케(dike)’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래서 신정론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정당성’이라는 뜻이고 의미적으로는 고통 가운데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변호할지에 관한 뜻입니다. 그래서 신을 변호한다는 의미에서 ‘변신론’이라는 말로도 사용되지만, 보통은 하나님의 정당성이라는 뜻의 ‘신정론’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악의 문제는 모든 신학자의 지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통의 문제는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제대로 된 설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좋은 이론을 만들어도 그것이 고통의 현실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고통의 문제’라는 책을 쓴 20세기 기독교 최고의 변증가로 불리던 C.S. 루이스도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 이론의 무색함을 경험합니다. 어떤 그럴듯한 이론에서도 위로를 얻지 못해 그는 자신이 당한 슬픔 자체를 성찰하고 그것에 주목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 소설가인 박완서도 자기 아들을 잃은 고통을 그의 소설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이 사람 수효보다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껍질을 뚫고 들어와 속마음을 울리는 한마디 외에는 다 부질없는 빈말일 뿐인 것일. 세상이 아무리 많은 사람과 좋은 것으로 충만해 있어도 내 아들 없는 세상은 무의한 것처럼.”
고통에 놓인 인간에게 아무리 좋은 위로의 말과 아름다운 글이 있더라도 그것이 고통으로부터 쉽게 건져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욥기에도 보면,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한답시고 한 얘기들이 오히려 욥에게 고통을 더하여 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차라리 침묵하던 그 시간이 욥에게 위로가 더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고통의 이유가 참으로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이에 관해 미국의 유명 목회자인 팀켈러는 성경의 고통을 다음과 같이 넷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첫째, 죄에 결과로 오는 고통입니다. 다윗이 밧새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 범죄로 그가 밧세바를 통해 얻게된 첫번째 아이가 죽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고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의롭기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바울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모진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그 일로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름에도 고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셋째, 자연적 상실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를 잃고서 괴로워합니다. 꼭 성경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그와 같은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꼭 어떤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우리의 유한함으로 인해 상실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있습니다.
마지막 넷째, 신비로의 고통입니다. 신비라는 것이 헬라어 ‘무스테리온’에서 온 말인데, 이는 감춰진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받게 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욥에 해당합니다. 욥기의 시작에 욥의 고통의 원인을 우리는 그의 의로움에 따른 것임을 알지만, 막상 욥은 그 고통의 원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어떤 고통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이 다양한 이유로 일어날 수 있고, 어떤 것은 나름 이해할 수 있을지라도 어떤 것은 전혀 이해가 불가능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의 문제를 쉽게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도 수 많은 지성인들이 이를 해명해보려 하였으나, 그것은 언제나 인간 지성의 허약함을 드러내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난해한 고통의 문제에 관하여 어떤 이론을 세우거나 그것을 이해할 필요성은 있을까요? 혹 그것이 가능하긴 할까요?
분명 앞서 얘기했듯이 고통의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고통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는 의미있습니다. 고통을 방치하게 되면, 슬픈 기억을 반복하면서 망상에 이르게 되고, 그것이 자신을 너머 주변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한 고통으로 자신을 망가트리다 못해 다른 사람까지 망가트리 않기 위해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 철학자는 ‘고통의 감정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분명하고 정확한 이해를 하는 순간 고통이기를 그친다’고 얘기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기독교의 전통 안에서 이 문제를 빛을 비춰주는 인물이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이른바 그는 ‘교부’ 곧 초기 교회의 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불리는데요. 그는 고통의 문제에 관해 보다 정확히는 악의 문제에 관해 ‘고백록’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악이란 선의 결핍’이라는 말합니다. 이는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하게 되기까지 그는 약 9년 동안 마니교도로 활동하였습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 왕족의 후예인 마니가 창시한 종교인데, 이들은 세상에 악이 존재하고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는 선한 영적인 빛의 세계와 악한 물질적 어둠의 세계가 있는데, 이 두 세계의 충돌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악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것을 일으키는 존재 곧 악한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의 설명이 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지성인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 마저도 9년동안 마니교에 몸을 담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고통이 있는 것은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같거나 그와 겨룰만한 신적인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악한 영의 존재로서 사탄이 등장하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성경 또는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의 악한 신을 상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에 관해 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답한 것입니다.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악한 신과 같은 존재가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세상에 악을 가져다 주신 분이 아닙니다. 악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악을 일으키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방안에 불이 켜져 있으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불이 꺼지면 어둠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둠의 존재는 빛이 없음으로인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은 건강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배고픔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며 어리석음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그에 따른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선이 그 속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악을 일으키는 어떤 존재가 우리에게 준 고통이 아니라, 선의 부재 상황으로 악으로 고통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창조한 세계 속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방식이 사실은 충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고통은 악한 일을 행하는 누군가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역사에 악당으로 길이 남을 만한 히틀러의 경우를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의 악행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유대인만 600만명이 넘는 죽음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군사독재시절에도 얼마나 무고한 죽음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보면, 악이 정말로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멋진 답을 내어 놓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원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의지의 주체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악의 원인이 다른 외부적인 힘이 아니라, 나의 의지와 선택에 따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의지의 왜곡’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우리가 다른 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에서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 죄로 또는 악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악의 문제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또는 외부의 어떤 악한 존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우리에게서 죄의 결과로 또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고통과 악의 문제에 관한 완벽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야기로 고통에 처한 사람을 위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 전통에 따른 고통과 악의 문제 관한 이론적 이해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이해가 앞서 말했듯이 불필요하진 않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이해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아갈 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악을 사랑하시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악이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 자체를 사랑하신다. 선한 것들을 사랑하시고 악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 바로 이것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이러한 사랑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질서와 섭리이다. 하나님의 질서 있는 섭리가 바로 이러한 다름을 통해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기 때문에, 악한 것들도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문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잘 쓰임받게 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이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같이 성경을 찾아 봅시다. 신약성경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신약 251쪽입니다.
로마서 8:28 NKRV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고통과 악의 문제에 관하여 사실은 우리는 그 이유와 의미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얘기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적인 틀에 따르면, 결국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과 문제를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본문인 예레미야의 말씀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3장 10절에서 11절 말씀입니다. 구약 1106쪽입니다.
예레미야 33:10–11 NKRV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는 나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그것을 목도했던 예언자입니다. 그의 사역은 그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고, 그 아픔이 그의 생일을 저주할 만큼 힘겹게 했습니다. 그런대도 그는 방금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말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민족의 멸망 속에서도 고통스런 자신의 사역 속에서도 그가 바라볼 수 있었던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저는 오늘 신정론에 관한 교리를 설교로 준비하면서 또 이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이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악에 관하여 고통에 관하여 이해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론도 고통과 악의 문제를 충분히 설명해내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이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자 함입니다. 오늘 내게 어떤 고통의 문제가 찾아올지라도 그분을 끝까지 신뢰하며 그 분을 선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 말입니다.
바라건데, 오늘 우리 성도 분들께서 이오 같은 믿음 안에 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길 바라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고통을 맞이하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당장에는 그것이 이해되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천히 주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며 그분에 인도를 따라 이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믿음 가지고 오늘도 살아가는 저와 우리 성도 분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잠깐 같이 기도합시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이 선하신 분임을 잊지 않고 그 믿음 가운데 살아가게 해달라고요. 때로는 우리에게 풍랑이 일고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믿음 변치 않고 살아가게 해달라고요. 이를 놓고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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