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전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Notes
Transcript
성경본문 : 시편 4:8(구약 806쪽)
설교제목 : 나를 안전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라 불리는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인데요. 대략적인 내용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농부가 싼 값에 원하는 크기만큼의 땅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요. 그 땅을 얻기 위해서는 직접 그 땅을 걸어서 해가 질 때까지는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서 해가 질 때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걸어간 곳 까지는 싼 값에 땅을 살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해가 질 때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그 땅을 절대로 살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농부는 욕심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출발점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제한이 있었고, 생각보다 멀리 왔다고 생각한 농부는 허겁지겁 출발선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해가 지는 순간에 농부는 출발점에 도착하게 돼죠. 그렇게 농부는 자신이 원하는 땅을 원하는 만큼 싼 값에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농부는 그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출발점으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광한할 땅을 뒤로하고 약 2m 남짓되는 땅에 묻힙니다.
굉장히 울림을 주는 소설아닙니까? 한편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볼 것이 좀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아마도 톨스토이는 인간이 어리석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요. 그 욕망에 따르면 우리에게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방금 소개해 드린 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일지라도, 필요이상의 것들을 분명 소유하고 있을 거예요. 가령, 우리의 옷장을 열어보면, 몇 벌의 옷이 있나요? 우리에게 그 옷이 모두 필요한 것인가요? 오히려 ‘입을 옷을 없네’하고 말하죠.
그런데 대체 우리는 왜 이러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불안’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해요. 언젠가 어떤 방송에서 들었던 얘기인데요. 아기가 태어날 때, 울음을 터트리잖아요. 그것은 엄마의 자궁속이라는 완전한 세상에서 밖으로 나오면서 불안을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러니깐 엄마의 자궁속 세상은 탯줄을 통해서 영양분이 공급되고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는 완벽한 공간이었는데요. 그곳으로부터 떨어지게 되니까요.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을 가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살면서 여러 일들을 행하게 되는데요.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유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필요 이상의 것을 소유하려는 것은 불안을 떨치려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소유를 통해서 우리는 만족을 경험하는데요. 그 만족은 마치 엄마의 자궁 속에 있었던 때와 같은 충만감을 우리에게 주죠. 그래서 더 큰 만족감을 주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가죠. 그래서 인간이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소유하려고 그렇게도 애쓰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있는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다시 말해서 많은 것들을 소유하면,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대부분 경험해 보셨겠지만, 소유가 주는 만족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큰 맘 먹고 샀던, 물건들이 주는 만족감이 얼마를 가던가요? 일년이요? 한달이요? 하루요? 어쩌면 몇 시간인지도 모르죠. 분명한 것은 그 만족은 언젠가 끝이 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와 같은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편은 이 대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어요.
먼저 오늘 성경본문 1절과 2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방금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어떤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시인이 처한 곤란한 상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느끼는 괴로움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연민이나 안타까움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과 다른 신앙의 삶에 관한 불안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들 곧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이 많지만요. 반대로 비그스도인들은 우리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세상의 물의를 일으킨다고 할 때에 또는 세상 사람들보다 잘 먹고 잘 살지 비결을 가진다면 몰라도 말이지요. 그러니깐, 신앙인들의 삶의 방식이 비신앙들에게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제대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손해를 보니까요.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 아무리 좋다고 선전을 해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 성과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히려,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또는 신앙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거나 불안에 휩싸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가령, 차라리 신앙생활을 안했다면, 더 인생을 즐기고 편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 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해 때때로 우리의 마음은 연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질투나 불안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마지막 8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방금 읽은 성경구절에서 시인은 깨달았던 것 같아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를 안전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시 말하면, 불안이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깐 우리의 불안을 떨쳐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얘기를 했지만, 어쩌면 모든 인간은 불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벗어날지를 계속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한 한 방법으로 소유에 집착할 수 있습니다. 분명, 어떤 것을 가지게 되면, 만족감을 느끼고, 그 순간에는 불안이 사라지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이라서, 계속되는 소유의 집착을 만듭니다. 결국 소유를 통해서는 우리의 불안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죠. 그때 시인은 하나님을 통해,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면, 어떤 것을 소유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만족감을 느끼고 불안으로 벗어나게 되더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곧 안전한 상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놓고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돼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세상의 논리와 가치 기준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대체로 손해를 보는 일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안을 느끼게 될지 몰라요. 그러나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어 주지도 못하죠.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그래서 바라건대 오늘 우리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안전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으로 신앙생활 해 나가는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길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