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 02 (골 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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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기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서론>
우리가 한 번씩 사용하는 용어 중에, 그 동기는 이해되지만 조금은 조심스러운 표현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작정기도’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를 위해 솔로몬의 1000번제를 따라하여, 3년 동안 매일 쉬지 않고 하루 한 끼 금식 하며 거기에 매일 헌금을 드리며 하는 기도입니다.
네, 좋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정기도’는 더없이 귀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가?’는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하반절에서 12절은 지난 주 살펴 본 ‘기도의 두 가지 내용’ 『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②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과 관련된, ‘기도의 목적 네 가지’를 말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기도하는 목적은, 성도들이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며」 「오래 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 네 가지 목적은 모두 10절 상반절의 ‘주께 합당하게 행한다.’는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하나님의 뜻과,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기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네 가지 목적으로 설명합니다.
오늘은 세 가지만 나누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맥추감사주일에 나누겠습니다.
<본론>
1.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10中)
먼저, 기도의 첫 번째 목적은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기도」제목 가운데 첫 번째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삶의 특징이기에, 바울은‘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선한 열매’를 맺도록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한다.’(롬16:19)고 말합니다.
바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사명은 ‘복음전파’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복음에 충실한 것’이지만 반면에 ‘그렇지 못한 것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에 충실하려는 모습 자체」가 「선한 것」이었던 바울에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섬기는 것은 「최고의 선」이었습니다.
바울의 기도 첫 번째 목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성도의 지향점과 자세가 무엇인가입니다. 즉 ‘성도는 어떤 일에 집중해야하며 무엇에 애써야 하는가?’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목적이 자기 배만 위하고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악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충실하고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섬기려는 「선한 것」이 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기도’는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기도할 때 마다 삶의 모든 것에서 「선한 열매를 맺기를 간구」하여, 「그리스도와 복음」「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려하는 선한 열매」를 맺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10下).
두 번째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성도들의 「하나님의 뜻과,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기도」두 번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라게 하시고’는 ‘식물이나 아기와 같은 생명체가 성장하고 점점 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마치 ‘생명체가 자라듯이 자라되, 쉼 없이 지속적으로 자라는 것’처럼, ‘쉼 없이 계속 내적으로 성장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10절의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는, 9절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와는 각도가 다른 기도입니다. 성경을 펴고, 9절과 10절의 말씀을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성장’을 말하지만 9절에서는, 「정도(레벨)의 개념」으로 예를 든다면, 마치 「100리터 물병」에 「100의 물로 가득 채워진 상태」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지혜와 총명이 풍성하게 채워진 상태’가 되기를 기도했다면,
10절의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는 「시간적 개념」으로, 마치 「물이 계속 흐르는 수도꼭지」를 통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물병에 물이 채워지는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계속적으로 자라서 성숙한 신앙인(성화)으로 나아갈 것’에 대한 기도입니다.
9절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지식」에 대한 간구라면, 10절의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는 이러한 「그리스도를 아는 충만한 지식이 삶 에서 실천되고 적용되어서 믿음의 성숙과 삶의 변화」를 가져 오는 「내적 성장」에 대한 간구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앎’ 곧 ‘지식’이, 하나님에 관한 단순한 이해를 넘어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3)고 말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데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농작물이 아니라 관상수입니다. 이미 목적을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무엇일까요? 그대로 사시사철 자라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관상수 같은, 보기에 그럴 듯한 삶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아는 구원과 성경의 지식을 적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아는 것」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물으며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 아는 것」이 「삶으로 나타날 때 계속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극단적이고 지나치게 비약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자라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믿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는 신앙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닮아 감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매일 매일 증대하기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기도 목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이 되어서, ‘믿음이 「매일성장」 「더욱 성숙」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오래 참을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11).
우리 성도의 세 번째 기도 목적은, 오래 참을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기도」세 번째는, 「신앙을 위협하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오래 참는(잘 견디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1절에서‘견딘다.’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나 형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는다.’는 것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행하고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대적하는 환경 때문이든, 아니면 사람 때문이든지를 불문하고 ‘그 어떤 것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어떤 힘과 능력으로, 환난과 시련 중에도 견뎌내고 오래 참을 수 있을까요?
그 「힘과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힘과 능력」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이 얻게 되는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는 새 힘」입니다(사 40:31).
「기도한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그 믿음으로 어떠한 어려움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잃지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쌘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이기는 놈이 쌘 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신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고, 강한 믿음으로 인내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기도하는 것이 힘입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기도목적이 「위기의 순간에 잠깐 스퍼트(spurt)해서, 잠시 혹은 한두 번 이기고 마는」 「이 땅의 것을 위한 것」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기도하며 바랬던, 어떠한 환경적 또는 대인적 어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오래 참고 견딜힘과 능력을 받아, 믿음에 능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도의 목적(작정기도)이 하나님께 합당하기를 원합니다.
‘선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런데 바울의 세 가지 기도 제목들은 ‘맺게 하시며’ ‘자라게 하시고’ ‘능하게 하시며’ 라는 서술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세 서술어는 모두 ‘현재분사’의 형태입니다. 이 ‘현재 시제’는 ‘계속적인’의미의 강조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도들이 ‘선을 열매를 계속 맺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계속 자라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기에 계속 능하게 될 것’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신앙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한 번 행했다」고, 「하나님의 뜻을 한 번 알았다」고, 또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번 행하였다」고 해서 온전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력은 「반복성과 지속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생명력을 살리고 지속시키는 것이 기도」입니다.
영어를 마스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아는 것이라도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야 하지 않습니까? 한 번 단어를 암기했다고, 한번 문법책을 읽었다고, 한번 대화했다고 능통해지지 않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예전에 한번 했던 것을 자랑하는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은 무익합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기도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도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게 해야 합니다. 잠시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내 뜻대로 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가는 계속적인 「하나님의 뜻과,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기도」를 통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속적인 선한 열매, 계속적인 성장, 계속적인 인내의 능력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