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개관
BIble Stduy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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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서
들어가면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신약에서 가장 신학적이며, 실천적으로 도움을 주는 서신에 속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서신에서 많은 갈등으로 곤란해 하던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적했다. 이런 분량은 거의 로마서만큼 길다. 로마서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인 주제들을 표현했다면, 고린도전서는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난 특정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좀 더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는 1) 주의 만찬, 2) 파문, 3) 성도덕, 4) 우상의 제물, 5) 사랑, 6) 영적인 은사들의 남용 등 다양한 문제들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에 당면한 고린도 교회에게 바울은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이러한 지침안에는 1) 교회의 통일성, 2) 지혜와 능력, 3)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4) 몸의 부활, 5)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 많은 신학적인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
고린도 지도
지리적 상황
지리적 상황
오늘날의 그리스 영토가 신약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두 지방(province), 즉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구분되었다. 마게도냐의 수도는 데살로니가였고, 아가야의 수도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도시들 중 하나인 고린도였다.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와 동쪽으로는 에게해가 맞닿은 지협에 위치해 있었다. 몇몇 로마 황제들은 배가 이탈리아에서 아시아로 왕래할 수 있도록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차선책을 마련한 것이 지협의 양 쪽에 항구를 만들고 그 사이를 잇는 훌륭한 길(디오르코스)을 닦았다. 배가 한쪽 항구에 짐을 내리면, 승무원은 그 짐과 함께 육로로 약 9마일 떨어진 맞은편 항구로 배가 옮겨졌다.
또 작은 배의 경우 물에서 끌어올려 롤러장치를 통해 다른 쪽 항구로 끌고 가서 다시 바다를 항해하기도 했다. 이 일은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많은 무역업자들은 지중해를 경유하여 아가야 지방을 빙 둘러 가는 항로보다 고린도를 통과하는 길을 더 선호하였다.
문화적 상황
문화적 상황
이 지협은 고대 이스트미아 즉, 이스트미아 경기가 열렸던 곳이다. 이 경기는 2년에 한 번 올릭픽 경기 이전과 이후에 열렸는데 경기 내용은 레슬링, 권투, 시합, 판크라티온, 달리기, 멀리뛰기, 원반던지기, 마차 경주, 음악 경연등이 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운동경기 이미지가 풍성한데 아마도 바울은 이런 이스트미아 경기를 염두하고 운동경기로 비유를 들었을 것이다(고전 9:24-27).
고린도는 부도덕하고, 음란하고, 우상의 신전과 제단이 산재해 있었다. 고린도에는 많은 악행이 자행되었는데 그리스 격언에는 '고린도로 가는 항해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매춘부를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으로 ‘고린도여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린도 사람들과 수많은 방문객들은 매춘부와 부도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랑의 여신을 숭배하기도 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근친상간, 매춘, 술취함 등 여러 부도덕 함을 꾸짖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고린도 주변역시 신전과 제단이 산재해 있었다. 이렇게 이방 종교산재한 지역인 만큼 이방 종교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들도 많있다. 가령 이교도 만찬에 참석해야 하는지(고전8:1-18, 10:1-22), 그 만찬에서 남는 고기들을 먹어도되는지(고전 10:25-11:1)등 말이다. 그 외에도 부활, 영적 은사, 남녀의 역할, 세례, 성만찬에 대해서도 혼합되어 알고 있었다.
경제적인 상황
경제적인 상황
고린도 교회는 각기 다른 사회 경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부는 노예였지만(고전7:21-23), 많은 사람들은 매우 부유했다(고전 4:6-8).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해 바울이 논한 것은 고린도교회가 마게도냐의 신자들이 겪던 재정적 곤란에 비해 경제적인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만연한 부도덕, 이방 종교의 유행, 고린도 시의 경제적, 사회적 인종적 다양성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직면했던 수많은 독특한 도전들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요인들은 고린도 서신 해석의 길을 안내해 주는 유용한 통찰력이 된다.
주제
주제
교회는 하나님의 영의 거처이므로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세움으로써 연합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전 1:10-4:21)
그리스도인은 다음 네 가지의 실제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고전 8:1-9:18, 10:28, 33)
그리스도인은 문화적으로 민감한 복음 전도를 통해 불신자를 얻어야 한다.(고전 9:19-23, 10:27, 32-33)
그리스도인은 함께 있는 불신자들이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예배를 드려야 한다 (고전 14:16, 23-25)
그리스도인의 공중 예배에서는 개인적 과시를 위해서나 누가 더 나은 은사를 가졌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 영적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전11:2-16, 12;12-30, 14:1-35)
성관계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만큼이나 깊은 남녀 사이의 연합을 형성하며 따라서 성행위는 결혼에 국한되어야 한다.(고전5:1-13, 6:12-20,7:5, 15:29-34)
세례와 성찬은 중요하지만 둘 다 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살아가는 일에 비해서는 부차적이다(고전1:14-17, 10:1-5, 11:17-34, 15:29-34)
예수님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육체적 부활은 기독교의 신앙 및 실천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고전 6:14, 15:1-58)
고린도 교인들이 처한 문제
고린도 교인들이 처한 문제
주의 만찬
주의 만찬
공동체는 공동 만찬이나 “애찬”(love feast, 유 12)을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주의 만찬(Lord’s Supper)을 거행한다(고전 11:17–34). 이러한 공동 만찬은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 와서 나눠 먹는 정식 식사(full meal)로 그 끝에 주의 만찬이 거행된다. 하지만 음식이 동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고전11:21). 왜 그랬을까?
“서로 기다리라”(고전 11:33)는 바울의 권면을 보면 사람들이 각각 다른 시간에 도착해서 교대로 먹는 가운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의 부유한 교인들은 일찍 와서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들을 마음껏 서로 나누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늦게 도착한 하층 계급에 속한 교인들에게는 먹을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도착해 보니 부유한 교인들은 풍성한 만찬을 이미 끝낸 채 비싼 음식으로 배부르고 때로는 좋은 술에 취해 있었다(고전11:21). 늦게 도착한 사람들(아마도 교인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했을 것임)에게 제공된 남은 음식은 확실히 하층민의 몫이었다. 이 같은 처사가 그레코-로만 세계의 만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만찬 때에 종들은 항상 따로 밥을 먹었고, 잔치 때 남은 음식을 받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바울은 공동식사 때 일어난 이러한 불공평한 대우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고전 11:22)으로 여긴다. 그는 예수를 기억하면서 함께 먹는 식사(고전 11:24)가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는 일이 된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고전 11:22). 주의 만찬은 새 언약의 표현이고(고전 11:25), 빵과 포도주의 나눔(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ōnia])은 분열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행위이다.
파문
파문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에 음행을 저지르는 교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3).
교인들은 그 사람과 더 이상 사귀어서는 안 되고 함께 먹어서도 안 된다(고전 5:11). 바울은 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의 교제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이 사탄에게 그를 내어주어 “육신을 멸하는”(고전 5:5)일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아마도 이 말은 그 사람이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지 않음으로 그의 육신이 질병과 죽음의 공격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11:30 참조).
바울은 이러한 과감한 조처를 통해 그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얻기를 희망하지만(5:5), 더 큰 관심은 공동체 전체의 순결을 지키는 데 있다(5:6–7). 이 권면이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바울이 그 공동체를 방문할 때 보응할 일종의 처벌의 한 예일 뿐이다(4:18–21; 참조 고후 12:20–13:4).
기독교 내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쫓아내는(또한 그들을 사회적으로 배척하기도 하는) 관례를 “출교”(excommunication)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배제된 사람들이 더는 성도의 교제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교회들은 전형적으로 고린도전서 5장을 출교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 인용하고 마태복음 18:15–17을 그 징계를 수행할 절차로 언급한다(또한 고후 2:6–11; 갈 6:1도 보라).
성도덕
성도덕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많은 성적 문제를 다룬다(특히 고전 5–7장)
고린도 교회에는 창기와 관계를 맺는 일을 죄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고전 6:15–18) 하면,
부부들 가운데서도 성관계를 늘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고전 7:1).
이러한 양 극단주의자들이 지닌 공통점은 영적 헌신이다. 고린도 교인들 중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영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육체는 어떻게 다루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반면, 또 어떤 이들은 오로지 영적 행위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에 육신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부류가 육체를 중요치 않은 것으로 여겼다면, 또 다른 한 부류는 육체를 본래적으로 더럽고 나쁜 것으로 간주한 듯하다. 바울은 양자의 입장을 모두 거부한다.
몸은 중요할 뿐 아니라(고전 6:13, 15, 19), 본래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전 6:20). 궁극적으로 바울은 성적 문제에 관한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태도가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오해로부터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오해는 몸의 부활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올바르게 풀려질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적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고 선언한다. 그의 요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단지 영혼의 해방이 아닌, 변형된 몸과 연관될 부활의 첫 열매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고”(몸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 “몸은 주를 위하여 있다”(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는 말의 의미이다(고전 6:13을 보라).
바울의 기본적인 입장은 성적인 관계가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고전 7:2), 결혼이란 틀 안에서는 성적인 관계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고전 7:3–4).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독신(celibacy)이 결혼보다 낫지만(7:6–8, 25–28, 32–34, 37–38, 39–40), 성을 자제할 수 있는 은사를 필요로 한다(7:7, 9, 36).
이혼은 가능한 한 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7:10–13, 16). 그러나 이혼할 경우 이혼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는 안 된다(고전 7:11).
결혼은 믿는 자 하고만 해야 한다(고전 7:39 의 “주 안에서”). 그러나 불신자와 결혼한 경우 불신자가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한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전 7:12–16).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할 때 바울은 성경의 계명들(고전 7:19)을 염두에 두고 있고 예수의 교훈을 인용한다(고전 7:10). 그는 또한 단순히 자신의 견해를 제안하기도 하지만(고전 7:12, 25), 그것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의 견해라고 밝힌다(고전 7:25, 40). 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하에서 권면하고 있다.
개별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행동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종말 의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전 7:29–31)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든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주 섬김에 비추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전 7:32–35).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인다(고전 8–10장).
우상 숭배와 연관된 식사에 참여하는 문제이다.
로마 사회에서는 생일, 결혼, 잔치, 사업 파티 등을 포함한 모든 공적 행사 때마다 신들에게 경배하고 제물이 바쳐졌다. 아마도 불신자들과 거래한 그리스도인들도 이 행사에 초대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불신자들)과 단절된 생활을 해야 하거나(고전 5:10), 그들에 대해 정죄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교적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고한다. 그는 이교도의 신들이 사실상 귀신들(demons), 즉 강력한 영들이며, 그것도 사악한 영적 세력이라고 여긴다(고전8:4–5; 10:20).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에 참여하여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처럼, 우상 숭배와 연관된 식사에 참여하여 음식을 먹고 마신다면 귀신과 교제하는 셈이 될 것이다(고전10:14–22).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사안은 일반 시장에서 내다 파는 음식을 먹는 문제이다.
당시 로마 제국의 시장에서 팔린 고기들의 거의 대부분은 어떤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도살된 짐승들이었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어차피 죽을 짐승이라면 그것을 우상에게 바쳐 도살한 다음 그 우상의 신성에 호소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많은 유대인들은 그러한 음식을 사거나 소비하기를 거부하고, “코셔 가게”(kosher shops)에서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도살된 고기를 구입했다. 고린도 교인에게 문제가 된 것은 “우리가 이 사안에 대해 유대인처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음식은 단지 음식일 뿐이고 이방 우상이나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의 거리낌 없이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고 여긴다(고전10:25–27).
그러나 그는 목회적 관심에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제시한다. 우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우상 제물”을 먹을 만큼 충분히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7, 9). 만일 그 일이 불신자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믿음이 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라고 여기면서도 만찬에 참여하도록 유혹하는 경우라면, 그들은 그러한 음식을 먹을 권리를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고전8:10–13; 10:27–28, 32–33).
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태도야말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전체 논의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주된 논점이다. 그는 이 논의를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지침으로서 사랑이 지식을 능가한다고 교훈함으로써 시작하고(고전8:1–3), 더 나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권면함으로써 마무리한다(고전10:24, 31).
이 논의 중간에 그는 사도로서의 자신의 권리에 관한 내용을 길게 첨가시킨다. 그에게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처럼)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선교를 위해 이 권리를 포기한다(고전9:5). 그에게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생계비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것 또한 포기했다(고전9:6–14).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지식을 가진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는가”(고전9:4)라고 그에게 말하기 전에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고전9:12, 15, 18), 무엇이든지 “복음을 위해서”(고전9:23) 행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고전10:31)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사랑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부분 중의 하나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송가이다.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아가페(agapē)이다. 이 단어는 무조건적인 사랑, 즉 사랑하는 대상의 사랑스러움과 상관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랑을 가리킨다. 한 마디로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스런 존재가 된다.
바울은 이 사랑을 비이기적인(unselfish) 행동의 견지에서 정의한다. 아가페 사랑은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13:4–7). 모든 인간의 업적과 지식은 단지 일시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 13:1–3, 8–12).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영원히 묶어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시편 23편과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13장은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이 부분은 종종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의 전통적인 언어 그대로 인용되곤 하는데, 거기에서는 아가페(agapē, 사랑)가 사랑(love)보다는 오히려 자선(charity)으로 번역된다.
영적 은사들
영적 은사들
영적 은사들바울은 “영적 은사”(spiritual gifts)를 논의하는데 이 서신의 세 장(고전 12-14 장) 을 할애한다. 그는 “영적 은사”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고전 12:7) 교인 개개인의 삶에(고전 12:11) 나타나는 하나님에 의한(고전 12:6) 성령의 임재(manifestations, 12:7)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바울은 “은사”(헬라어로 카리스마타[charismata])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님께서 성적 자제력을 주신 것도 은사이고(고전 7:7),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자질들을 부여하신 것도 은사이다(롬 12:6–8; 참조 고전 12:28).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는 좀 더 특정한 은사들이 문제가 된다. 즉 그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사들은 전형적으로 교회가 함께 모일 때(고전 14:26) 하나님이 교회의 덕을 세우시기 위해 여러 교인들을 통하여 놀라운 방법으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은사(고전 7:7; 14:12, 26–27, 29–30)들을 말한다. 바울은 이러한 은사 가운데 아홉 가지를 나열한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기적) 행함, 예언, 영 분별, 여러 종류의 방언, 방언 통역(고전 12:8–10).
이러한 은사들 중에 방언의 은사가 가장 주목을 받는데, 이 은사가 교회 내에서 논쟁의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방언(글로솔라리아[Glossolalia])에 대한 내용은 사도행전에도 나오지만(행 2:4, 10:46; 19:6), 사도행전에 서술된 그 현상은 고린도전서에 언급된 방언 현상과 약간 차이가 난다. 사도행전에서는 성도들이 전혀 배우지 않았던 다른 언어들을 말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언어로 이해했다. 반면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이 알아들 수 있는 언어라는 지적이 없다(14:2, 9, 23). 실제로 황홀경에서 나온 그 언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천사의 언어(13:1)로 간주되었다. 더욱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 현상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 어디에도 오순절에 방언을 했던 사람들이 또 다시 그런 경험을 했다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고린도전서에서는 이러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방언으로 말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전 14:15, 18, 27).
우리는 왜 방언이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방언이 예배에 지장을 주었거나 아니면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영적인지 과시하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공동체의 일부가 방언을 아예 금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과잉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고전 14:39).
여하튼 바울이 영적 은사에 관한 논의를 두 번 중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번은 교회를 다양한 지체를 지닌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할 때이고(고전 12:22–27), 또 한 번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고전 13:1–13)에서 사랑을 “가장 좋은 길”로서 극찬할 때(고전 12:31)이다.영적 은사에 대한 특정한 조언으로 바울은 그러한 은사들을 공개적으로 사용하려면 공동체 전체의 덕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12:7; 14:12, 26). 이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방언이 배제되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덕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4:2, 4, 6–11, 16–19, 23).
또한 황홀경에 나온 말이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염려도 포함된다(고전 14:23; 참조 행 2:13). 하지만 바울은 신적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통역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공적인 방언 사용을 허용한다(고전 14:5, 13, 26–27).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방언을 허용할 뿐 아니라 권장하기도 한다(고전 14:4–5).
그는 고린도 교인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많이 말하며(고전 14:18), 또 그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전 14:5).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홀경에서 나왔지만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를 공동체에 전함으로써 자신의 영적 능력을 과시하려한 사람들은 “더욱 큰 은사들”(the greater gifts, 고전 12:31), 즉 공동체를 더 잘 섬기는 은사들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보통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말하는)은 덜 진기한 현상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전 14:1–5, 22–25, 29). 결론으로서 바울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고 가르친다(고전 14:40).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고린도전서의 주요 신학 주제들
고린도전서의 주요 신학 주제들
교회의 통일성
교회의 통일성
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한다(고전 1:10–11; 11:18–19). 교인들 중에 이런 저런 저명한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빌미로 계파를 조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을 바울의 제자로 규정한다(고전 1:12; 3:4).
또 어떤 이들은 아볼로를 따르거나(고전 1:12; 3:4–6, 22; 4:6; 16:12; 참조 행 18:24–19:1; 딛 3:13),
“게바”(Cephas)로 불린 베드로를 따른다(고전 1:12; 3:22; 9:5; 15:5; 참조 갈 2:7–9, 11–14).
바울은 “바울파”의 편을들지 않고 한낱 인간에 불과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경의를 표하는 모든 당파들을 책망한다(고전3:5–7, 21–23). 그러한 당파는 “시기와 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전 3:3). 이처럼 분열된 교회의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바울은 두 가지 교회상을 제시한다.
첫째, 교회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공동체 전체에 거주하신다. 한 분 성령이 모든 교인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공동체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개인이나 그룹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을 공격하는 셈이 된다.
둘째,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며 개별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양한 몸의 지체, 즉 손, 발, 귀, 눈 등과 같다고 가르친다(고전 12:12–27; 참조 롬 12:4–5; 엡 4:14–16).
지체들은 각각 서로 다르지만, 모든 지체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실현해야 할 이상이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성취된 현실로 인정하기를 요청한다. 교인들 개개인(과 여러 분파들)은 그들이 알든 모르든, 좋든 싫든 모두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몸의 한 지체가 고통당하면 몸 전체가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는 본래의 통일된 실체 그 모습 그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지혜와 능력
지혜와 능력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속적 지혜와 능력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고심한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가 교회 안에서 분열을 가져오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인간적으로 가장 지혜롭고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지도자들을 따르려고 한다. 이 문제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의 복과 권위의 표시로 과시함으로써 고린도 교회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침입자에 대해 경고하는 고린도후서에서 다시 한 번 다루어질 것이다(고후 10–12장).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치는 요점은 하나님이 지혜롭고 능력이 있다고 여기시는 판단 기준은 세상의 판단과는 다르다는 데 있다(고전 1:19–20).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고전 1:23–24)이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지혜와 능력의 행위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을 통해 성취되었다(고전 1:18; 참조 고후 13:4).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가치 체계를 재고하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바울은 그들 자신을 한 번 돌아보라고 제안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힘 있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다(고전 1:26–27).
끝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예로 든다. 그는 세속적인 기준에서 자신의 어리석음(고전 4:9–10; 참조 고후 11:16–17)과 약함(고전 2:3; 4:9–10; 참조 고후 10:10; 11:30; 12:5, 9–10; 13:4, 9)을 받아들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이 세상이 거부한 것을 귀하게 여기시며 세상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고전 1:18–29; 2:14; 3:18–20; 참조 고후 12:9–10; 13:4). 고린도 교인들이 지혜와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태도는 복음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소치이다.
십자가에 달리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 그리스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고전 2:2; 참조 고전 1:23; 11:26).
많은 해석자들은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고린도 교회는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십자가의 메시지가 그들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지 못했다. 기적을 경험하고(고전 12:10, 28; 고후 12:12), 온갖 종류의 놀라운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로서(고전1:7; 2:12; 12:4–10)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구원의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모든 결핍이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영광스런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여겼다. 바울은 그러한 태도를 꾸짖으며, 그들을 영적인 어린 아이(고전 3:1)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풍자적으로 표현한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해졌다”(고전4:8).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모습을 보라고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 때문에 왕처럼 살고 있다! 너희는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해야 하는 우리 비천한 사도들과 같지 않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지만 너희들은 마치 왕과 같다(고전 4:8–13)!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고(고전 5:5; 7:5; 8:5; 10:20–21; 참조 고후 2:11; 4:4; 11:14–15; 12:7), 하나님의 임재를 제한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으며(고전7:7; 8:2; 13:9, 12; 15:50, 53; 참조 고후 5:6), 죄의 유혹이 만연하고(고전 7:28; 10:12; 참조 고후 11:3; 12:21), 역경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고전 15:30–32; 참조 고후 1:8–9; 4:7–12; 6:4–5; 7:5; 8:2; 11:23–29; 12:7, 10)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생각하기에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이 오로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만 관계를 맺는 것에 만족할 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롬 6:3–5; 갈 2:19–20; 빌 3:10; 참조 고전 11:26; 15:31; 고후 1:5–6; 4:8–12). 바로 이것이 그가 그들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이다. 즉 십자가의 메시지야말로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만 했던 메시지였다.
몸의 부활
몸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은 신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곤 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부활 사건에 대한 역사적 증인 목록을 제공한 후(고전 15:5–8), 만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이며, 사람들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고(고전 15:14–17)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고전 15:19)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바울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점이다(고전 15:23). 바울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는 일이다(고전 15:18).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원수인 죽음은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파괴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쏘는 것(독침)을 잃었다(고전 15:54–57).
그러나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맞이할 부활이 영혼의 부활이 아닌 몸의 부활이라고 가르친다. 성도들의 실제 몸이 일으켜지고 썩을 것으로부터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고전 15:35–54). 몸의 부활에 대해 왜 그렇게 긴 설명이 필요한지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바울에게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참여할 수 있는 영적 부활, 즉 이미 현실이 된 보다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으로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전 4:8–13; 15:12, 19). 바울은 고린도후서 4:7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귀중한 보배를 담고 있는 연약한 질그릇 같다고 묘사하면서 이 주제를 다시 다룰 것이다.
겉 사람-인간의 몸-은 연약하고 부패와 유혹과 질병과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몸으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이미 천상의 영적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오히려 성도들은 현재 하늘의 영광스런 몸으로 옷 입혀질 것을 갈망하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 탄식하고 있는 존재이다(고후 5:1–10).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옷 입혀질 것이라는 확신을 제공해 준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가 새롭고 변화된 몸으로 일으키심을 받은 것처럼 그 분께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영광스럽고, 능력이 있으며, 영적이고, 죽지 않는 새로운 몸으로 일으켜질 것이다(고전 15:43–44, 53–54).
그러나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비로소 일어날 것이다(고전 15:23, 51–52). 부활은 미래의 일이고, 몸의 부활(고전 15:35–50)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은사들을 과장했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사건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부활의 교리는 또한 실제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무관심에 빠질 수 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시련이 닥쳐올지라도 인내하고 끝까지 신실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고전 15:32).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방종으로 해석한 일부 고린도 교인들의 엄청난 오해에 관해 권면한다.
교인들 중에는 창기들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고(고전 6:16–18),
심지어 자신의 계모와 근친상간의 관계로 살고 있는 교인도 있다(고전 5:1). 후자의 경우는 사실상 자랑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전 5:2, 6).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는 일을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는 교인을 교회 공동체가 왜 자랑하는가?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그러한 방종을 복음의 철저한 이행으로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고 그들은 말한다(고전 6:12; 참조 고전 10:23). 그들이 이러한 사상을 어디에서 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들은 바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지적한다(롬 4:15; 6:14; 7:4, 6; 10:4; 갈 3:24; 5:18).
하지만 그 경우에 그의 논점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단지 규정을 지키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은혜의 언약 안에서 사는 존재이다. 따라서 어떤 요구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행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말을 단지 반 쯤만 알아듣고는 그 요점을 잃어버린 것 같다.
여하튼 그는 이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해야 할 질문은 “내가 이 일을 해도 되느냐”가 아니라 “이 일이 내가 해야 할 선한 일이냐” 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유익이 되는 일(고전 6:12), 공동체의 덕을 위한 일(고전 10: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고전 6:20)만 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고린도 교인들이 추구한 자유 개념이 사실상 속박을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식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은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만족할 수도 없고 건전하지도 않은 통제 불능의 욕망에 지배를 받게 된다(6:12).
질문
질문
고린도전서를 읽으면서 교회는 무엇이라고 생각이 드나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사랑장(고전13장)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을 나눠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