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밝아지면 일어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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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은 룻이 나오미에게 이삭줍기로 얻은 보리 한 에바를 보인 후에 나타난 나오미의 반응에서 시작합니다. 나오미는 룻이 가져온 한 에바의 보리로 인해 감격을 했습니다. 당시 이삭줍기를 해서 하루에 얻을 수 있는 가장 많은 양이 1㎏ 정도였는데 그것을 열일곱 배에 해당하는 양을 가져왔기 때문이죠.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결국 룻은 자신이 일한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다고 밝히자, 나오미의 입에서 감탄과 축복이 터져 나온 것이죠. 2장 20절 합독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나오미는 지금 엄청난 축복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며느리에게 보아스라는 말을 듣고서 축복을 하는 내용을 보면 마치 선지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혹시 그런 분들 보신 적 없으세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영을 받아 계시를 전하는 신령한 권사님 같은 모습이지 않습니까?
이 본문을 가만히 더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가장 위대한 비밀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요. 나오미는 지금 보아스를 향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자”,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은 다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들 아닙니까? 나오미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 예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왔을 때의 상태를 기억해야 하는데요.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고 말했고,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영적으로 회복된 빵집 공동체인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깊은 우울증에 빠져 심각한 좌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인 됨과 무능함은 인정하고 알겠는데, 거기서 멈추어 버리고 주저앉아 버린 것이죠.
2장을 시작할 때, 룻은 나오미에게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말했잖아요? 이삭줍기는 힘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젊은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밭의 일꾼들에게 여러 어려운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본문 여기저기서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오미는 룻과 함께 밭에 나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고부간에 이삭을 줍다가 힘들면 같이 쉬기도 하고, 어떻게든 먹고 살고자 노력하는 며느리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오미는 룻을 보내고, 종일 혼자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나오미의 나이가 너무 많거나 몸이 아파서도 아니라, 무너진 마음 때문입니다. 집 밖에 나와서 고향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힘든 거예요.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줍고 있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장 좀 굶어도 체면 때문에 이삭줍기는 못 하겠는 거예요. 나오미의 진짜 병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음에 중한 병을 가지고 온종일 집 안에 앉아 며느리가 ‘언제 돌아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나오미가 갑자기 엄청난 계시의 말을 쏟아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에 대해 우리는 나오미의 고백을 살펴봐야 하는데요. 먼저 보아스를 향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라고 불렀잖아요? 그런데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산 자에게만 은혜와 선대를 베풀 수 있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보아스를 향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분이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나오미가 보아스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를 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속자’,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속하다’라는 뜻은 ‘대신 값을 주고 원상으로 회복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구속 사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2천 년 전, 저 지구 반대편 변방 예루살렘의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이 고엘의 역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고엘 즉 구속자로 이 땅에 오셨는데, 나오미는 보아스의 행동에서 구속자의 역할을 읽어 낸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대단한 것 아닙니까? 지금 나오미가요. 새벽에 룻을 보아스의 밭으로 보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바뀌는 것일까요? 정말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바뀔까요?
우리는 죽을 사람이 낫게 되고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사람의 성품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고후5:17]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 변화될 것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켜주실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믿으시죠?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서 변화시켜주실 것도 믿으셔야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눈이 바뀌면 삶도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것을 배우거나 또는 경험하면서, 또 어떤 충격적인 일을 통해 생각이 바뀌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을 통해 나를 보시고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들의 가족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시길 소망합니다.
여러분, 적어도 제가 아는 하나님은요. 끊임없이 저의 생각과 충돌하시는 분이세요. 저는 정말 이게 맞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끈질기시더라고요. 저의 아내를 통해 저와 부딪히게 하시고요. 관계도 힘들고, 목회도 쉽지 않은데, 제게 주시는 말씀은 제 삶의 고엘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하여튼 우리 주님은 가만히 쉬고 계실 때가 없어요. 만일 우리 교우님들이 듣고 있는 설교가 바른 설교라면, 또 그 설교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에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생각과 자꾸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절대 말씀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이 너무도 강력해서 아무리 돌처럼 굳어진 마음이라도 말씀의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내고 결국에는 열매를 맺게 하는 복음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말씀 앞에 바로 서 있는 성도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세상에서 흐릿한 안개가 거두어지고 길이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여러분과 제가 가야 할 생명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열왕기하 6장의 말씀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도단이라는 작은 성에 도착했는데, 엘리사를 원수로 여겼던 아람 왕이 군대를 보내 도단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엘리사의 종이 뛰어와서 “선지자님, 어찌하리이까”(왕하6:15)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야, 큰일 났다!” (이게 아니고요.) 큰 산처럼 태연하게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6:16)라고 대답합니다. 이거 너무 황당한 대답 아닙니까?
아니, 분명히 아람 왕의 군대가 도단을 포위하고 있고, 심지어 아람 군대는 엄청 많고, 도단의 주민들은 기껏해야 소수인데 어떻게 아람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편에 더 많은 군대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그 종이 믿었으면 좋은데, 저처럼 두려움과 의심이 많으니까 종을 위해 엘리사가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 합독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눈에는 종은 볼 수 없었던 것이 보였습니다. 자신들을 둘러싼 아람 왕 군대와 자신들 사이에서 지키기 위해 진을 치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본 거예요. 이 기도 후에 종의 눈이 밝아져 그도 하나님의 큰 군대를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오미는 한 에바의 보리 앞에서, 그리고 이 보리를 챙겨 준 보아스라는 그 이름 앞에서 그녀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베들레헴에 오긴 왔으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무너진 마음, 이 땅에 살 소망이 없어 죽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낙심한 마음, 룻이 일하러 나갈 때 함께 있어 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함께 따라나서지 않았던 극도의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마음과 생각에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죠.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베들레헴 땅에 풍년을 주셔서 자신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마음을 주셨던 그 여호와, 보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채우려 하신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종의 눈을 열어 그들을 둘러싸 보호하는 불 병거와 군대를 한순간에 보게 해 주셨던 것처럼, 나오미의 눈이 한순간에 밝아져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엘리사가 자신의 종을 위해 했던 기도처럼 정말 우리 모두가 세상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말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세상뿐 아니라, 그 세상과 우리 사이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지키고 계시는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렇게 나오미는 영적인 눈이 밝아지고 나니까 깊은 침체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더라고요. 눈이 바뀌고 나니까 위풍당당해졌습니다. 여러분, 저를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까?
“눈이 바뀌면” “당당해진다” (하~ 저 목사는 설교 때마다 왜 이렇게 따라 하라고 해?)
여러분,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 새벽에 룻이 나가서 이삭을 줍겠다고 할 때만 하더라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던 초라한 나오미는 룻을 도와준 보아스의 이름을 듣고는 단번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3:1 합독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러분,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도 집 밖으로는 나가려 하지도 않았던 나오미가요.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며 나오미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 룻을 위한 일을 계획하는 자세를 보여 줍니다. 이거 대단한 변화 아닙니까?
눈이 바뀌니까 자신의 며느리, 룻을 돌보게 된 거예요. 그리고 룻을 도와줄 사람을 찾게 됩니다. 어둠의 자리, 숨어 있던 자리에서 나와 이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나오미 아닙니까? 그 일이라는 게 뭐예요? 며느리 룻의 인생에서 남편이 없는 근본적인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냥 나오미의 눈이 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작은 변화가 그녀를 타인을 위한 행동을 하도록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나오미는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노동력도 없어요. 하루하루 룻이 주워 온 이삭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룻이 재혼해서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큰일 나는 거죠. 그런데 시어머니의 입에서 며느리를 위한 진실한 사랑과 권면의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내 딸아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나오미가 룻에게 처음 한 말이 아니거든요. 룻기 1장 9절에서 나오미가 룻과 둘째 며느리였던 오르바를 각각 친정집으로 돌려보내려 할 때 했던 말과 같습니다. 1:9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면서 두 며느리에게 했던 축복의 말과 똑같습니다. 한 마디로 “너희들 새 인생을 살아가라” 뭐 이런 말이잖아요? 그런데 베들레헴에 돌아온 이후에 나오미는 이 기도와 축복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의 기도가 자기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얘야. 며늘아기야! 내가 잊고 있었구나. 이제까지 내 눈이 가리어져 있었단다.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내 눈꺼풀을 벗기시니, 사랑하는 우리 며느리의 안타까운 모습이 보이는구나. 그때 내가 너를 축복하며 기도했었지. 그런데 얼마간 내가 정신을 못 차리다가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위해 너의 고엘을 구해 주기로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위해 계획한 일을 들어 보려무나”
나오미의 눈이 밝아지자, 이전에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 때문에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룻의 슬픈 미래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나오미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룻을 위한 계획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진짜 은혜를 경험한 분들은 이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주님을 알기 전에 가졌던 생각과 마음들, 행동들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사람을 보며 우리는 예수 믿고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나오미가 자신의 눈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이 달라졌습니다. 무기력하고 위축되어 있던 그녀의 말과 행동이 영적인 언어로 바뀌고요. 선한 행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나만 잘살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잊었던 기도가 생각나고요. 나보다 자신의 곁에서 더 딱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며느리가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이 며느리의 살길을 같이 고민하고, 길을 제시하는 성숙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있습니까? 온통 나를 향해 있습니까? 아니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사랑과 섬김과 수고와 헌신이 필요한 이들에게 있습니까? 해가 거듭해 가고 우리의 신앙의 연조가 늘어갈수록 주님은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시선이 주님이 보시는 방향으로 함께 향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룻을 위한 나오미의 계획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3장 2절부터 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합독).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참 이상한 계획이지 않습니까? 요약하면 이런 말이죠. “추수한 보릿단에서 보리 낱알을 떨어내는 밤에, 너는 예쁘게 단장하고 타작마당에 누워 자려는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그 발아래 누워라. 그리고 그 뒤에는 보아스가 하라는 대로 하거라.”
여러분, 어떤 시어머니가 이런 말을 며느리에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은 막장드라마 같은 데에 나오는 상황 아닙니까? 이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 권면을요. 눈이 밝아진 나오미가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나오미의 계획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근동 지역의 결혼 풍습 중에 ‘형사취수’라는 제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나오미의 계획이 바로 이 제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죠.
형사취수를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면, 가문을 이어 주기 위해 동생이 죽은 형의 형수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형의 가문을 잇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의 일차적인 목적은 형의 가문과 그의 재산을 보호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목민들이 가지고 있던 제도인데요. 다만 문제는,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문을 지켜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 일차적인 고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나오미는 지금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아스에게 고엘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약간 편법이지만 룻에게 네가 직접 가서, 조금 먼 관계의 고엘인 보아스에게 “우리 가문을 이어 달라”고 적극적인 청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보아스에게 들이대라” 뭐 이런 것이죠. 왜 그래야 합니까? 보아스가 그들의 고엘 즉 구속자이기 때문입니다.
한 에바, 즉 10kg이나 되는 보릿자루를 받아 온 것은 잘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칭찬을 듣고, 영적인 축복을 받은 것도 좋은 것이죠. 그것으로 마음의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추수 기간 보아스의 일꾼들 속에서 안전하고 풍족하게 일할 수 있는 것도 참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말의 핵심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 정도에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지금껏 받은 모든 것은 좋은 것이지만, 다 보아스의 손에서 나오는 것들이니까 “너는 그 모든 것을 네게 줄 수 있는 보아스 그 자체를 얻어야 한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는요. 룻의 보릿자루를 통해 보아스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가까운 친족이며, 기업 무를 자이며,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입니다. 보아스는 구속자이며 자신의 며느리에게 참된 안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너는 보아스에게 나아가라. 그를 붙잡아라. 보아스의 발치에 가서 은혜를 구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이요. 복음서 말씀에도 비슷하게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5장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마15:25-27] / 합독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이야기 잘 아시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 취급을 하던 가나안 여자의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26절을 보시면, 지금 귀신 들린 딸 문제로 나온 이 여인을 예수님도 무시하며 역시 개 취급하고 계십니다. 이때 여인이 주님을 향해 무섭게 들이대며 말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여인 스스로가 자신은 개라고 말을 하고, 그런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딸이 귀신에게 놓여 자유하게 되는 것도 부스러기니까 빨리 부스러기를 내놓으라는 것이죠.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이 여인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이없어하고 혼내셨나요? 28절을 보십시오. 마15:28
28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여러분, 이 여인의 진정한 갈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비록 자격은 안 되지만, 나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을 먹고 싶다”는 것 아닙니까? 부스러기를 말하지만 실은 “떡을 먹고 싶다”는 거예요. 왜 그렇죠?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에게서 모든 좋은 것이 나오는 것임을 이 여인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개 취급을 당하던 가나안 여인도 무엇이 떡이고 무엇이 부스러기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 역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너를 선대하고 과분한 양식을 주는 등 이 모든 부스러기의 근원인 보아스를 잡아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또 어떻습니까? “제발, 보리 한 에바를 주십시오. 제발 오늘 안정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십시오. 내 마음에 위로가 필요하니 위로를 주십시오. 제발 저를 인정해 주시고,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신다(마7:7)”라고 약속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실제 부스러기일 뿐이라는 인식을 갖고 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아스처럼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진짜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 멈추면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부스러기는 얻을 수 있지만,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는 있지만, 그것만을 믿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추수가 끝나는 시기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더 이상 이삭줍기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추수가 끝나기 전에 타작마당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분을 얻기 위해, 그분과 결혼하기 위해,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어느 때는 좀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는 것 같아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그분을 얻지 않으면 내가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계시잖아요? 지금 그분 앞에 나가 내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의 고엘을 얻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함께 우리의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떨어진 이삭 낱알이나, 떡의 부스러기가 아닌 진짜 주님의 얼굴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비록 염치없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이 생명의 떡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한밤중에 타작마당을 통과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부스러기 은혜를 구했지만, 이제 나는 생명의 떡이시고, 참된 생명수이시며, 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시는 예수님 당신만을 붙잡고 나아가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며 우리의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 자체를 소유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우물가의 여인처럼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우리가 진짜 붙잡아야 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합심기도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주님, 저의 눈이 바뀌길 원합니다. 나오미처럼 처량하고 힘 없는 저를 향해 있던 눈이 불병거와 보아스를 보길 원합니다. 부스러기 같은 은혜가 아닌 진짜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도 오히려 룻기 3장의 나오미처럼 누군가를 돌보고 고엘이신 예수님께 연결해 주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면서도 그저 은혜의 부스러기만 구하며 기대감도 없이 돌아가는 인생이 아니길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혹시 무너진 마음 때문은 아닌지요? 한 에바의 곡식을 구하는 믿음도 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예비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어두워져 있던 영안이 열려 엘리사의 불병거를 보게 하시고 고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심으로 당당하게 한평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도 나오미처럼 누군가를 예수님께 연결해 드리는 그런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를 드리며 우리 인생에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