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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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바울
고린도후서 4:5 (DKV)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 되신 것과 예수 때문에 우리가 여러분의 종 된 것을 전파합니다.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전파한다는 것은 자신을 칭찬하는 것, 자신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것, 자신의 권위나 중요성을 홍보하는 것,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자기의 사상이나 교리를 설파해서 결국에는 듣는 사람들의 믿음 위에 자신을 올려 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행동 자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 은연 중에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그리스리도의 신성에 집중시킨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게 된 까닭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거짓 사도들의 도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태도는 11장에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1:13 (DKV)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들이요, 가증된 일꾼들이요,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가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당시에 거짓 사도들의 도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지만 실제로는 은연중에 자기를 자랑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되신 것과 이에 바울은 내가 진정으로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 되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하게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종된 것을 예수님께서는 종으로 오셔서 주님의 뜻과 일을 행함으로써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지배자가 아니라 종으로 왔다. 하인으로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후 12:15입니다.
고린도후서 12:15 DKV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기쁘게 소비하고 나 자신도 다 소모할 정도로 희생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더욱 사랑하면 내가 사랑을 덜 받겠습니까?
이처럼 바울과 아무런 연고도 없고, 상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바친 이유는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열정과 고린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 때문에 섬기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면서 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했던 것 입니다.
고린도후서 4:6 DKV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은 성경에서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령 창조세계에서 어둠은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질서를 부여하기 위하여 빛이 생기라고 명령하기도 하셨습니다. 때론 어둠은 죽음을 의미하며 그때 빛은 생명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때론 어둠은 악으로 대표되기도 하며, 그 때 빛은 진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마 추상적으로는 이 모든 뜻을 잘 아시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의미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어둠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 진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9:3-4절 입니다.
사도행전 9:3–4 DKV
사울이 길을 떠나 다메섹 가까이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춰 그를 둘러쌌습니다. 사울이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름의 가치와 신념으로, 의로움으로 한 평생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그 모든 것은 180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 신념이 아니라 그 안에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지식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아무런 연고도 없던 고린도 교인들의 분쟁의 한 가운데 서서 자신의 이익과 유익은 단 하나도 챙기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며, 혼신의 힘을 쏟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 DKV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는데 이는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질그릇은 다른 그릇보다 가격기 저렴하고 잘 깨어지는 그릇입니다. 구약에서 질그릇은 부정이 스며든다고 해서 반드시 깨뜨려야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레 6:28). 이런 점을 봤을 때 질그릇은 연약함과 무가치함, 메마름의 대명사 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런 그릇에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묘사된 내용만 보면 거지나 다름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약하고, 평판도 좋지 않고, 헐벗고, 구타를 당하고, 집도 없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런 조건은 사람들 앞에 서서 매력을 끌기는 너무나도 부족한 조건입니다. 사람들은 지혜롭고, 명예가 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이라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런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보잘 것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야?,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용된다고 그래.”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 구원을 가져오는 복음의 메세지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인식에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더 빛날 수 있는 것이야.” 라고 말입니다.
사실 바울에게는 어떤 장애물도 평가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빛으로 임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전념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유능함도 부족함도 전부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결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1. 사도바울은 무엇을 전파한다고 말하나요?(5절)
2. 질그릇 안에 담겨진 귀중한 ‘복음’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3. 질그릇인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낙심하지 않는 바울
고린도후서 4:8 DKV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며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으로 사용되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11:23-33 절을 통해 자신이 받은 고난을 진술합니다. 간략하게 요약을 하면,
바울은 매도 맞고, 감옥살이도 많이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또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채찍과 돌로 맞으며, 파선을 당한 적도 있습니다. 또, 강도의 위협도 받고, 거짓 형제들의 위험도 겪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수고와 곤고와 자지 못함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음 가운데 지냈습니다. 또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는 등 온갖 고초는 다 겪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온갖 모욕과 궁핌과 핍박과 곤경이 있어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약할 때가 그리스도가 드러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즉, 강할 수 있을 때 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 절 입니다.
앞서 고린도에 일부 사람들은 이런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졌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보잘 것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야?, 하나님의 영광으로 사용된다고 그래.”
고린도후서 12:9 DKV
그러나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한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진리를 안 바울을 거짓 사도들이 핍박했다고 하더라도 사도바울의 이 확신은 결코 흔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살겠다는 자신의 신념은 결코 흔들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의지가 투철해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안에서 그 영원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찾아온다고 하더라고 절망하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 이 또한 아름다운 주의 영광으로 사용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또,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영광의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써내려 가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약함은 자신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도구이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자존감이 낮아지고, 심령이 지치며, 초라한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때 그런 것으로 충분한데 그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무언가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내 자신의 환멸과 자괴감이 드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죠. 어쩌면 그 순간이 우리의 포장지가 벗겨지는 실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족한 우리를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필요로 하십니다. 부족한 나를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과연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있으며,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 영광의 값어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의 강함을 내 팽개치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며 주의 복음을 위해 전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 고난의 순간이 두려움과 슬픔의 시간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의 순간이며 영광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약함은 믿지 않는 자의 고난과 그 의미와 가치가 같을 수 없습니다.
선교의 개념은 시대별로 점점 변화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리적인 구분, 신학적 구분, 문화적 구분입니다. 지리적 구분은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선교적 개념은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의 상황을 반영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신학적 구분이다. 신학적인 구분에 따르면 선교는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것은 앞서 말한 지리적 개념과 의미를 달리한다. 앞서 말한 지리적 개념이 단순히 지역을 의미했다면, 신학적 개념은 더 나아가 복음을 전파 받지 못한 지역인지 아닌지 구분한다. 주로 미전도 종족에게 초점을 맞춘 선교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은 선교의 대상을 문화로 분한 것으로 말한다. 이는 반드시 지리적인 구분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한 지역 안에서 다양한 문화가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선교적 개념이 구분되는 이유는 복잡 다양해진 현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저마다 각자의 고난과 고통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의 종류는 저마다 다르고 각자가 느끼는 고통과 고난의 크기도 제 각각 입니다.
설교를 듣던 중 한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성경 학교를 여시며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셨던 분이십니다. 양육과 사역을 배제한 채 한 평생을 성경 연구만 하셨던 분이니 얼마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으셨겠습니까? 그렇게 사역을 하시던 중, 어린 자식을 잃은 상가집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은 홀아비라고, 남편을 잃은 아내를 과부라고, 부모를 잃은 자식을 고아라고 말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마땅한 호칭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슬픔과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화로 돌아와서, 그 목사님이 울고 있는 그 집사님을 보며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이렇게 많이 알고 할 말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한 권사님이 들어오더니, 그 어머니께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울지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먹어.”
그 순간, 그 집사님은 그 권사님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 권사님은 몇 해전 큰 사고로 자식 모두를 잃은 권사님이셨다고 합니다. 동일한 아픔과 슬픔을 아는 사람만이 그 집사님에게 위로를 해줄 수 있던 것입니다.
만약 제가 가서 집사는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해요.라고 했더라면 저는 더이상 사역하기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어느 누가 성경을 제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모두의 고통과 고난을 위로를 해줄 수는 없습니다. 위로는지식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을 필요로 하시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다양하게 세상 곳곳으로 보내셔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영역으로, 문화로, 사람으로 향하게 하셔서 주의 복음의 도구로 전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환난이 몰아 닥친다 하더라고, 답답한 일과 억울한 일이 몰아 친다고 하더라도 전혀 낙심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광의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찾아올 때 도리어 기뻐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기도합니다.
1. 세상에 환난과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복음이 모든 사회와 문화의 영역 속으로 미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3. 지금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하나님께서 질그릇인 나를 복음 전 파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시는 곳은 어디일까요? (가정, 직장, 학교, 열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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