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틈을 만들지만 사랑은 다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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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틈을 만들지만 사랑은 다리를 만듭니다
[서론]
수년전 제가 독일에 있었을때의 일입니다.
저와 같이 한인교회를 다니시는 한 성가대 지휘자분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전도사님, 그리스도인들이 술마시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는 매우 진지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맥주마시는게 큰 문제가 없는데 유독 한국 크리스천들은 이 문제에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청년들하고 술마시는 것을 누군가보고 교회내에 소문을 퍼트렸는데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셔도 될까요?
술마시면 죄인가요?
그럼 담배는 어떻습니까?
술, 담배는 보통 한국교회에서는 아에 안하는게 좋은 신앙인으로 여겨집니다.
여기에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만 넣으면 훌륭한 한국형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술에 대한 지침은 성경에 몇 구절 나오긴한데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구절은 51개이고, 긍정적인 뉘앙스로 말하는 구절도 58개나 됩니다.
중립적인 구절들은 76개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과 제자들도 자주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우리도 성찬식때 물을 좀 타긴하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있습니다.
반면 담배는 어떻습니까?
담배는 아에 성경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물론, 둘다 몸에 안 좋고 중독성이 있으니까 그냥 하면 안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몸에 안좋고 중독성이 있는 기호식품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햄버거, 커피, 탄산음료, 과자, 아이스크림 등등.
그럼 음식말고 다른 것도 이야기해볼까요?
크리스천들이 웹툰을 본다거나 온라인 게임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영화는 되고 게임은 안될까요?
성경에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은 참 결정하기 힘든게 사실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분들이 이런 것들을 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실 것 같습니까?
말은 직접 안해도 서로 마음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기준이 나와있지 않지만 서로 양심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교회 안에 불거질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까요?
[본론]
우리가 오늘 볼 말씀은 로마서 14장 1절부터 입니다.
이 말씀은 12장부터 시작된 큰 줄기에서 흘러나온 말씀입니다.
11장까지 복음에 대해 설명했다면 12장부터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2-3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무슨 문제일까요?
먹는 것의 문제로 사람들이 분열되고 분쟁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고기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반대로,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기는 고린도전서 8장과 비교해볼때 아마도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말하는것 같습니다.
당시 사회는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는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온 고기들은 대부분 그 신들에게 바쳐졌던 고기들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채식만한 것입니다.
아마도 대체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고기를 거부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우상에 바쳐진 음식은 더러운 것이기에 여전히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오랫동안 지켜온 율법인지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입니다.
반면, 로마교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고기를 먹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우상이란 단지 나무나 철, 돌로 만든 의미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상에 바쳐진 음식도 무엇이든지 먹을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7장 19절 에서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서로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고기 안먹는 사람을 이렇게 판단합니다.
‘아이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고기를 못 먹는다구? 아직 믿음이 약해가지고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구만. 내가 마음껏 먹어주마’
반대로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은 고기 먹는 사람을 이렇게 판단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그렇치, 그래도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데 양심상 꼭 먹고 싶을까? 은혜가 안되네. 차라리 안 먹고 말지.’
고기뿐만이 아닙니다.
포도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21절에 보시면 포도주도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 많아 아에 안 마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날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5절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유대인의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의 절기와 안식일은 거룩한 날로서 그 날들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런 절기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수단은 두가지였습니다.
음식법과 안식일입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유대인이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예수님 안에 있으면 모든 날이 거룩한 날입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지금까지 지켜왔던 관습이 있으니까 양심에 거리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음식문제, 절기 문제들이 로마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문제가 안되는 것이죠.
중요한게 서로 다르니까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나에게 있어 꼭 먹지말아야할 고기와 같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에게는 술이나 담배같은 것일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CCM이 될수 있습니다.
거룩한 찬송가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성수일수도 있습니다.
주일날 공부하거나 일을 해서는 안될까요?
물론 이런 문제들은 복음이나 구원과는 전혀 관련없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의견차이가 교회 안에서 큰 분쟁으로 번질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1절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3절입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강한 쪽도, 믿음이 약한 쪽도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입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약한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지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을 하나님이 그들도 모두 자신의 식탁에 초대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식탁에 믿음이 강한 사람뿐만 아니라 믿음이 약한 사람도 초대하신 것입니다.
4절입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받으셨는데 니가 뭔데 비판하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이 좋으면 그만이지, 종이 종을 비판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인이 손님들을 초청했는데 손님이 와서 다른 손님을 나가라고 할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권한은 초대한 주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각자 마음의 확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각각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일까요?
7절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일인가 하는 확신입니다.
바꿔말하면 주님 앞에서도 할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주님 앞에서도 고기를 먹지 않을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만약 내가 주님 앞에서도 고기를 먹을수 있다면 또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술과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웹툰과 온라인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들은 성경에 명확히 나와있지 않기때문에 양심에 따라 하면 됩니다.
이런 일에 대한 최종 심판은 누가하십니까?
10절 하반절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2절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든 안먹든 그것의 동기와 목적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 마음을 모두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해 한 일이라면 주님이 결국 판단하실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 믿고나서 얼마 안돼 설날에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세배를 하는데 그 때 저는 안하고 거부했습니다.
부모님, 매형, 누나들한테 욕 바가지로 얻어 먹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믿음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배도 절이라서 누구한테도 하면 안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 후로는 자유하게 되어 매년 세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 때 제가 세배를 드리지 않았을때도 주님이 제 마음을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이제 그럼 서로 비판하지 않고 자기 양심대로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냥 둘다 하던대로 내버려두자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13절입니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이 말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깔보는 것을 그만둬야 하는 것에서 그쳐선 안됩니다.
그들 앞에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앞에서 고기를 먹는 것은 그들의 신앙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시면 앞서 말한대로 고기 그 자체가 부정한게 아닙니다.
단지 부정하다고 여기는 약한 믿음의 사람에게만 부정한 것입니다.
고기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15-16절입니다.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사랑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절제해야 합니다.
사랑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합니다.
내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내 권리를 행사하는 것보다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훨씬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다가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모기 잡으려 칼을 휘두르다가 자기가 탈 낙타를 죽인 꼴인 것입니다.
그는 옳다고 믿는대로 했을지는 몰라도 결국 가장 큰 계명인 이웃 사랑에 실패한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드려 엄청난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그런데 고작 자신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일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전에 알던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을 잘 믿는 장로님이신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니 바이어들 앞에서 술을 먹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의 대학원생 하나가 교수님이 술먹는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그 대학원생도 믿는 친구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교수님께 많이 실망한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분인줄 알았는데 술 마시는 것을 보니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 교수님은 그것을 보고 그 때부터 술을 마시지 않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원래 그 분의 믿음은 술을 마시는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절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학원생이 낙심할까봐 걱정돼어 그때부터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누릴수 있지만 사랑때문에 포기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따라 행하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지식은 사람들 사이에 틈을 만들지만 사랑은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법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훨씬 중요한 문제는 먹고 마시는 그런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비하면 사소한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에게는 천국의 열매인 의와 평화와 기쁨이 주어집니다.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럴때 그 분 안에서 이웃과 평화를 얻습니다.
이런 의와 평화의 결과 우리는 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전 영화에 나왔던 유행어가 있습니다.
‘뭣이 중헌디’
우리는 이 명 대사를 가슴에 꼭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위해 사소한 것을 포기할줄 아는 것이 바로 분별력있는 신앙입니다.
형식보다 본질을 볼줄 아는 눈을 갖는 것이 바로 분별력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아닙니다.
고기를 먹고 안 먹고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복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내 삶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자유를 충분히 절제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본질적인 문제때문에 본질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18,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이렇게 자기 유익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결국 사람들에게도 덕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뜨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은 결국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도대체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꼭 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 꼭 안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여전히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믿음이 더 강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조건 새벽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 무조건 주일성수를 해야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조건 술을 먹으면 안된다고 믿는 사람, 웹툰이나 게임을 하면 안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에서 오히려 자유로운 사람들이 믿음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그 자유란 내 권리를 누리는 자유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고싶은대로 하는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란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가진 사람이 진짜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진짜 믿음이 강한 사람이란 할수 있지만 공동체를 위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짜 성숙한 사람이란 자기 권리를 다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할말 다 하는 사람, 하고싶은 거 다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할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입을 다물수 있는 사람입니다.
할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소한 일로 논쟁이 생기거나 다툼이 생길것 같으면 멈출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믿음이 강한 사람, 성숙한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 오래된 격언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저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 격언을 품고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