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4 양청] 청년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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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전11:9-12:1a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대교리문답을 보면 루터가 작성한 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옮기자면 이러하다. “저는 박사이자 설교자입니다. 배울만큼 배웠고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리를 배울 때에는 어린 아이처럼 배웁니다. 매일 아침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십계명, 신조, 주기도문, 시편을 또박 또박 입으로 소리내어 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일 조금씩 더 읽고 연구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게으른 목사와 거만한 성도들이여, 제발 부탁드립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고 암송하며 그것으로 고민할 때에 생기는 특별한 도우심이 있습니다. 그 도움은 악마와 세상과 육에 대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중세시대의 부정부패, 잘못된 교리, 잘못된 예배를 바로 잡기 위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에 대해 여러분들은 다들 아실 것이다.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고, 부패한 예배를 성경적으로 바로 잡았을 정도였다면, 이 사람 만큼이나 당대에 성경박사가 또 있었을까. 그럼에도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배우는 일에 어린 아이처럼 임했다고 말한다. 그의 평생에 늘 겸손히 그분의 말씀 배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만이 그랬겠는가?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길이다. 평생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길 멈추지 않았던 삶.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라. 성경은 “청년이여" 라는 말로 시작한다. 청년은 어떤 때인가? 얼마 전에 심방했던 어떤 청년이 이런 말을 하더라.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지 잘 해낼 것 같고, 늘 자신감으로 차 있다" 그렇다. 이것만큼이나 청년의 때를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는듯 하다. 청년의 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 패기, 능력, 힘, 젊음 등. 뭔가 마음먹은 것을 다 이뤄낼 것만 같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시기가 바로 청년의 때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전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 “으이구, 이 한심한 녀석아! 그 젊은 날에 너 하고싶은대로 한번 살아봐! 그러다가 인생 끝장날 줄 알아!” 이런 협박의 의미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 하나님은 협박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 높은 자신감으로 충만해있을 그 젊음의 날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다 생각될 그 날 그 순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저의 20대 중반까지의 지난날이 그랬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여러분이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을 정도의 온갖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다. 그 시절에는 내 젊은 날이 영원할 것 같았다. 내 무한한 가능성은 절대 꺾일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내 건강과 내 능력이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내 눈 앞에 나타나서 당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라!” 라고 오만방자하게 외치던 나였다. 그랬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그 압도적인 은혜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그분의 전능하심으로 나의 그 모든 교만함들을 꺾으시고나니 하나님을 떠나 살던 내 지난 수십년의 날들이 얼마나 아깝던지, 얼마나 가슴 치며 후회가 되던지.
저도 고등학교때 오토바이 사고로 종아리에 3도 화상을 입어 6개월 넘게 고생했다. 많은 사람들이 화상의 통증에 대해 가볍게 여겼을 때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막상 화상을 경험해보니까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픔을 겪어본 자가 그 아픔을 아는 법이고, 맛있는 것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아는 법이고, 그 길을 걸어가본 사람이 그 길이 어떠한지를 아는 법이다. 저는 지금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 역시도 젊은 날의 힘과 능력에 취하여 하나님을 떠나봤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때 그 시기가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른다. 청년의 때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청년의 때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하나님을 떠났다. 그 때 더욱 하나님을 알길 소망했더라면, 그 때 더욱 바른 신앙 교육 받기를 힘썼더라면, 그 때 더욱 하나님 예배하길 힘썼더라면…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당대에 셀 수 없이 많은 부와 권세와 명예와 힘을 가졌던 지혜자이다. 그랬던 그가 그의 젊은 날에 셀 수 없이 많은 금과 은을 모으고, 셀 수 없이 많은 아내와 첩을 두며, 셀 수 없이 많은 병거와 마병들을 두며 하나님을 떠났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방황하며 돌아오고나니까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없는 삶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도서이다. 지금 당장 눈 앞의 재미, 쾌락, 꿈, 인생의 목표를 위해 좇아가느라고 하나님을 잠시 미뤄둔 인생이 얼마나 의미없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특히 12:1을 보라.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하면서 7절까지 쭉 이어지는 내용들은 유한한 인생이 늙어 몸이 여기저기 고장나고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과정들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12:1-8까지를 요약하면 “모든 것들이 끝날 그 순간이 찾아오기 전에 너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아부부터 청년부까지를 교회학교 혹은 교육부서라고 말한다. 이는 청년들 역시 교육을 받아야 할, 양육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영아부 때 받아야 할 교육이 있고, 초등부때 받아야 할 교육이 있고, 청년부때 받아야 할 교육이 있다. 지금 여러분의 때에 이 기회를 놓치면 어쩌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다시는 지금과 같은 순간들이 없을지도 모른다. 무한한 가능성, 넘치는 힘, 잠재력, 꿈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이 청년의 때에 교육을 받고 양육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 성가대, 그 외에 다른 봉사와 헌신의 자리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주 역할이 아니다. 여러분은 교육부서에 소속되어 있다. 여러분은 청년부이다. 청년부이기에 청년부의 교육을 받는 것, 청년부 안에서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교제하길 힘쓰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유익이 되며, 함께 이 안에서 자라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제가 겪었었으니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청년의 때는 아침 안개와 같이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다. 어느 순간 청년의 때가 지나가버렸다. 봉사는 선교회에 들어가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청년부의 모든 교육과정들을 수료하고나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가 지나간다면 다시는 청년부 안에서 있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더 이상 교육부서 소속이 아니기에 교회에서 대하는 입장이 달라진다. 이제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교육부서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뭔가 조금 잘못하면 목사님께로부터 책망도 듣고, 때로는 성경적인 조언도 듣고, 목회적인 상담도 받고 하지만, 교육부서를 떠나면 이 모든 것들이 이제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삶의 다양한 유혹과 선택의 기로 앞에서 무엇이 성경적인 길인지 알지 못하고 결국에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선택하게 된다. 그 결과 봉사와 헌신은 곧잘 해왔는데 정작 돌아보니 믿음의 확신과 담대함, 복음의 위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더라. 마음 속 공허함을 다른 세상의 것들로 채우고 채우고 채우려 했는데, 더 큰 공허함만 남게 되는 자신을 보게 되더라. 이것은 다른 누구 이야기가 아니다. 저의 이야기였고, 여러분의 선배들의 이야기였고, 또 이 자리의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우선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실 정도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혹 이 자리 가운데 아직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공예배에 부지런히 참여하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를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간다. 예배때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해진다.
또한 엡2:21-22 말씀에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고 하셨다.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간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지어져간다는 것이다. “함께”. 내 앞뒤 양옆의 지체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이 지체들과 함께 지어져간다는 것이다.
내 옆사람의 성격이 조금 모나도, 내 뒷 사람의 성격이 조금 유별나도, 내 앞 사람이 나에게 상처주는 말을 했어도, 혹은 나와 관계적인 면에서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앞뒤양옆의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길 기뻐하신다 말씀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나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소속이 되어야 한다. 함께 지어져갈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해야 한다. 서로의 모습 가운데 자극도 받고, 격려도 하며, 때로는 보듬어주고, 때로는 이끌어주며, 때로는 이해도 해주고, 때로는 그 사람을 품기 위해 눈물 흘리는 이 모든 과정들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을 기억하라.
따라서 이 가운데 아직 청년부에 나오지 않는 분들은 이 기회를 통해 청년부로 나오라. 아직 여러분들은 양육을 받아야 할 때이다. 말씀을 배움으로서 청년의 때에 합당한 교육들을 받아야 할 때이다. 이 시기를 통해 잘 훈련받아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파송받아야 할 존재들이 바로 여러분들이다.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기본적으로 ‘모임’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을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시지 않고, 여러분을 공동체로 부르셨다. 나 혼자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이다. 함께 지어져가는 것이다. 함께 결속하며 자라가는 것이다.
공동체 안에 믿음이 연약한 자들도 있고 신실한 자들도 있고, 성격이 괴팍한 사람도 있고 유순한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통해, 서로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성숙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고, 서로의 연약함을 보듬으며 인내하는 법과, 격려하는 법과, 리드하는 법과, 섬기고 헌신하는 법 등을 통해 그분의 공동체를 세워가신다.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조금 껄끄럽다고 해서, 공동체를 떠나 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 않으실 뿐더러,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이 기회가 얼마나 좋은가? 청년부에 등록하고, 함께 교제하며, 함께 훈련받고, 함께 성장 성숙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란다.
우리 이 시간 함께 기도하자. 주여,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의 젊은 날에,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닐 때에, 겸손히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청년의 때에 늘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여 주시고, 늘 부지런히 한 몸된 지체들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세우신 청년부 공동체를 세워가는 우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