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그 위에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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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44-46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서론

오늘은 드디어 길었던 가상칠언의 마지막 칠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정말 긴 시간동안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와 지금까지 조국 교회가 잊었던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칠언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들과 더불어 조금 더 확장된 의미들을 살펴봄으로 길었던 가상칠언의 마지막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Ⅰ. 어둠이 임하다

어둠에 관한 이야기는 일전에 나눈바 있습니다. 그때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이 그 의미를 기억하시리라는 소망이 저에게 없으므로 간략하게 전에 살펴보았던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둠이란 즉, 하나님과 반대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빛에 해당하십니다. 그런다고 우리 주님이 빛의 입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빛의 속성에 부합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우리 주님을 빛이라 말씀한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어둠은 모든 것을 감추는 속성이 있습니다.

어둠은 모든 것을 감추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빛은 모든 것을 드러내는 속성이 있습니다.
또한 어둠 빛을 이기지 못하지만, 빛은 아주 작은 빛으로도 어둠을 물리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속성입니다. 즉, 감추고 가리는 것을 드러내시며 비추시고, 어둠을 물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우리 주님을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5)
분명 우리 주님은 이땅에 빛으로 오셨으나 악에 가득한 인간은 그 참되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본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며, 그를 조롱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빛이 사라진 것은 첫 번째로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성부께서 분노하셨음을 동형론적 표현으로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어둠은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분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참 빛이신 우리 주님은 어둠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동시에 참 빛이신 우리 주님은 어둠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그러나 우리 주님은 지금 인류의 모든 죄악을 자신의 몸에 담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덩어리를 감당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부께서 성자를 사랑하시나 빛이신 성부는 인류의 죄악을 지심으로 악의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성부는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분노를 성자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53:6-8)
성부께서는 지금 죄악으로 가득한 성자를 향해 인간에 향해야 할 분노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3. 성자 예수님을 외면하심

마지막 세 번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봐야 할 어둠의 다른 이해입니다.
앞서 ‘어둠’에 관해 살펴본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가상칠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어둠’을 통해 살펴보고 싶은 세 번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로서의 성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부분이긴 하지만 이 땅에 창조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은 성부만이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함께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하나님 자신을 복수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천지 창조의 과정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 논의하는 ‘어둠’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를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사랑과 연민 같은 주님께 속한 성품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성애와 모성애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놀라운 성부의 계획 속에서 성자는 자원하는 기쁨으로 성부의 작정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성부와 성자는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부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성자가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성부의 진노까지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니 성자를 사랑하는 성부께서 어찌 이것을 바라만 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의도적으로 성부는 성자를 외면하십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둘 사이를 갈라놓게 만든 것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부의 아픔과 성자의 고난은 이미 출애굽당시에 예표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의 예표

우리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르치는 방편이 되었으며, 동시에 애굽과 열방에는 세상을 통치하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식하며, 두려워 떨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하이라이트는 아홉 번째 재앙과 열 번째 재앙입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바로 어둠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3일 동안 애굽 온 지역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애굽의 모든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어둠 속에서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 가운데 드디어 열 번째 재앙이 임하는 것입니다.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장자가 죽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닌 모든 가축도 동일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아담이 타락하므로 모든 피조 세계가 죄로 오염된 것과 같이 역시 인간의 불순종으로 모든 가축의 처음 것들이 죽게 됨을 다시 한번 보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모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자들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어둠은 구원을 향한 전 조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신 하나님이 눈 한번 깜빡하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번도 단절되지 않으셨던 그토록이나 사랑하신 성자를 고통과 멸시에 두어야 하는 것이며, 죄를 향한 불같은 성부의 진노를 그가 가장 사랑하는 성자께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외면해야 했던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구원이었습니다. 비록 어둠이 일었지만 그리고 이 어둠이 우리를 두렵게 하였지만, 그러나 실상은 이 어둠은 바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결코 가벼운 길이 아니며,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역사 역시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Ⅱ. 성소의 휘장이 갈라지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바로 휘장이 갈라진 사건입니다. 이 역시도 에바다 수련회 가운데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얼마나 많은 인원들이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나눈 이야기를 간략하게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전의 구성

성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첫 번째 구역은 성전 뜰로서 일반 제사가 진행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성전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성소는 또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만 휘장 넘어 아주 은밀한 공간에는 금으로 만든 법궤가 있는 지성소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 지성소는 주님께서 좌소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도 일년에 단 하루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대속죄일에 들어갑니다.

휘장이 찢어지다.

앞서 말하듯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습니다. 이 휘장은 두 마리에 코끼리가 끌어도 절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5장 38절에서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휘장이 바로 우리 주님이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며 죽으시는 순간 위에서 아래로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으로써는 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성자의 죽음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9-10)
라는 말을 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죄 가운데 종 노릇하며 고통 속에서 울고 있을 자들이었습니다.
감히 빛 가운데 나아가지 못하며, 감히 그의 백성이라, 그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지 못할 자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의 죽으심과 그의 사랑 안에서 그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며, 우리 주님께 나아갈 담대함을 얻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그러니 에바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험난한 길을 걸어가며 우리가 기댈 곳은 오직 그분의 사랑과 은혜 밖에는 없습니다.

세상과 갈라지게 하심

더 나아가 휘장이 갈라짐은 다른 의미도 포함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십자가의 역할과 휘장이 갈라진 의미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갈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4-38)
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존재상 세상과 화합할 수 없는 우리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과 화합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화목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국 교회가 자꾸만 세상과 화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이 미덕이라 말합니다.
우리만 진리라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와 등을 돌릴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우리와 세상을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우리 주님과 함께 달린 죄수들을 보십시오! 한 죄수는 주님의 모습을 봄으로 그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받은 것은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보았음에도 회개치 않은 자는 결국 그의 행위에 따라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우리의 끔찍한 죄 가운데 기대야 할 것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지 않으며, 왜 세상에 당당히 이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지 않고, 그저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며 살려 하십니까?
고개를 들어 분명히 보십시오! 시대가 더 악해짐에 이 믿음의 고백들은 더욱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세상에는 걸리는 것이 되겠으나 믿는 우리에게는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 주님의 위로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고백은 곧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더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따라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그의 영원하신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으시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던 그 날에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것처럼 여전히 우리는 그의 사랑과 은혜 안에 우리의 어떠한 노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 그것은 바로 그분을 영화롭게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그 무엇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시며, 필요치 않으십니다.
제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나의 삶을 불태우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십시오! 세상의 것과 우리 주님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Ⅲ. 큰 소리로 부르시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 순간 우리 주님은 마지막 힘을 다해 외치십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두 가지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외침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상칠언 가운데 처음 내용이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1. 주님의 삶은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이었습니다. 즉, 우리 주님은 십자가 대속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기도로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십자가의 대속에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 주님은 기도로 마무리 하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만이 우리 주님의 기도의 삶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공생애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 주님은 역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4:1-2)
그리고 역시나 사역이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주님은 다시금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가 바로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였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은 매일 습관적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22:43)
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고 그 영혼의 어려움과 고난을 감당할 힘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도에 대한 적용

여러분들은 얼마나 기도에 힘쓰십니까?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일상들 속에서 우리의 삶이 우리 주님에게 드려지는 예배의 삶이 되기 위해 얼마나 하늘의 힘을 구하며 사시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푸념과 탄식만으로 삶을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하늘로부터 허락하신 그 힘을 구하며 사십니까? 우리가 바른 고백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인생의 답은 그냥 이 땅에서 평안히 안락을 누리를 삶이 아닐 것입니다.
나의 삶에 한 자리라도 주님의 모습처럼 살기 위한 분투하는 삶일 것입니다.
우리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은 이러한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구하지 않고, 나의 온 힘을 다한 분투의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각자의 삶을 좀 돌아보시며 우리 각자가 얼마나 기도의 삶에 힘을 내시며 살아가는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우리 주님의 부르짖음의 내용 중에 “내 영혼”이라는 이 말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우리 주님이 외치시는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단수를 사용하심

먼저는 우리의 신앙은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우리의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라는 복수형으로 사용하는게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오늘 단수로써 “내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주님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그의 믿음으로 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일생 동안 가장 많이 물어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것 역시도 우리 영혼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외모에 치장하는 것 만큼 영혼을 돌봐야 합니다.

자매 여러분이 외모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십니까? 우리의 외모에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데 어찌하여 우리의 영이 주님 안에 바로 서있는지 점검치 않으십니까?
그리고 여기에 모인 주일학교 선생님들 제발 아이들의 영적인 상태를 좀 점검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어떤 것을 믿고 있는지? 바른 믿음을 소유하고 바른 구원을 바라고 있는지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 할 것은 그들의 외적인 반응이 아닌 그들 내면의 영적인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제 여름이 다가옵니다. 여름 사역에는 많은 분주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영적인 상태를 바라봄으로 사역 속에서 제발 주님을 발견하는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영혼의 최종 위탁자 성부 하나님

더 나아가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위탁자가 바로 우리 성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세상의 가치관에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가상칠언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본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성부라는 사실입니다.
이 인식이 없이 오늘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오늘도 세상의 가치관에 우리의 삶을 맞추며 살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손에 창조되었으며, 우리는 다시 주님 앞에 서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날을 생각하십니까? 마지막 그날 우리의 영혼이 바로 주님 앞에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라 우리 홀로 주님앞에 설 것들을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며,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

결론

여러분들 이제 길었던 가상칠언이 끝이 났습니다. 이제 결단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지금까지 조국 교회가 가장 중요한 십자가의 도를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교회를 운영했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주님 앞에 회심하기로 엄위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 바로서며, 우리에게 사랑으로 그 생명을 주신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고, 세상의 어떠한 고귀한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고귀하심으로 우리의 악함을 고백하고 그의 선하신 옷을 입는 자! 참 신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세상과 주님을 견눈질 하시며 사실지? 그래서 주님의 은혜 앞에 우리의 함당한 책임을 다하는 은혜로 구별된 거룩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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