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K - 너와 나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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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views1. 믿음 - 하나님에 대한 확신 2. 믿음 - 하나님께로 증거를 받음 (인정) 3. 당신의 믿음은 거듭났는가? 4. 무엇이 문제일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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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하나님에 대한 확신
믿음 - 하나님에 대한 확신
여러분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여러분이 함께 웃고 교제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 너무 너무 좋더라구요. 여러 상황과 환경들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그 것들을 포기하고 이 자리에 나와 은혜 받기를 결단한 여러분들에게 정말 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대해요.
어제부터 오늘 집회까지 우리는 나와 동역자를 잇는 시간들을 꽤 많이 가졌어요. 한 마디라도 더 이야기해도, 또 인사하고 운동회도 하면서 한발씩 더 가까워졌을 것이라 생각해요.
여러분들 노는 것 보니까 진짜 살벌하더라구요?
그 살벌함이 오늘 이 예배.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이 시간에도 나타나를 바래요. 놀 때 만큼 눈에 힘을 딱 주고! 오늘 이 시간 “하나님! 나에게 은혜 주지 않으시면, 나를 붙들지 않으시면 저는 죽습니다!”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마음이 가난한 자들 그리고 적극성을 보이는 자들은 더 큰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게 될거에요!
그 누구도 들러리가 되지 않고, 나를 위한 이 은혜의 수련회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해요!
(쉬고)
여러분 이 자리에 왜 오셨어요?
저는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향한 믿음 때문이라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우리 정말 바보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잖아요?
수련회를 왜 와요?
세상에 더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 더 많잖아요.
대학생들은 이제 종강했는데, 기말고사의 여독을 풀기 위해 놀고 자고 해야죠. 직장인들은 한 주간 열심히 일했으니까 주말에는 쉬어야죠.
이 자리에 오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많잖아요.
왜 여러분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바보같이 이렇게 수련회에 와서 불편한 그 바닥에 앉아있어요?
저와 여러분에겐 “믿음"이 있기 때문이겠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믿음"이 나에게 있기에, 뒷걸음질치지 않고 한발 한발 내딛기 위해, 믿음을 붙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라 생각해요.
구글에 믿음을 검색해보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완전한 신뢰나 확신" “증거보다는 영적인 신념을 근거로 한 종교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라는 정의가 나와요.
먼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완전한 신뢰나 확신"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의 완전한 신뢰와 확신을 갖고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겠죠.
우리에게 기록되어진 성경을 통해 계시.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 대한 확신이 바로 믿음이라는 거에요.
“증거보다는 영적인 신념을 근거로 한 종교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라는 두 번째 정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을 설명하는 문장이에요.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에요.
첫째, “증거보다는" “영적인 신념을 근거로 한"이라는 부분이에요.
이성적이거나 역사적인 증거가 없어요. 그저 개인이 체험한 어떠한 영적인 신념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생기는거에요. 진짜 황당한 종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몇가지만 이야기 하자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와 베이컨교에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스파게티와 베이컨을 믿는 종교인데, 전세계 수백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 종교를 믿고 있어요. 심지어 네덜란드, 러시아, 호주에서는 정식 종교로 인정을 받기 까지 했어요.
우리는 말씀을 듣거나 혹은 기도를 마무리 할 때 ‘아멘’이라고 하잖아요? 그들은 ‘라멘'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슬람의 ‘라마단'처럼 ‘라멘단'의 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다른 때 보다 스파게티를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해요.
베이컨교의 가입 조건은 ‘베이컨을 좋아하되 신을 믿지 않기’라고 해요.
스파게티교는 신이 있다라고 말하는 유신론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무신론자들이 만든 종교에요.
무신론자. 신이 없다. 신에게 어떤 믿음이나 신뢰를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겠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지금은 스파게티를 숭배하고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죠.
거기다 베이컨교는 신을 믿지 않기라고 하면서, 베이컨을 신처럼 숭배하고 있어요.
증거보다는 영적인 신념을 근거로 종교를 만들면 이런 것까지 숭배하게 되는 것이죠.
둘째, “증거보다는" “영적인 신념을 근거로 한" 믿음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에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믿던 믿지 않던 특정 대상에게 마음을 쏟거나 혹은 신을 믿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이에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죄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들이 깨어지게 되었어요.
죽음을 몰랐던 존재. 무한한 공급을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 에덴에서 살아야 했던 인간의 모습에 죄가 들어오며,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진거에요.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졌지만 완전히 다 사라지지 않았어요. 하나님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속성들은 남아있어요.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어요. 깨어짐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동행을 잊어버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에게는 “신적 존재를 갈망하는 믿음"이 남아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여전히 그들은 죄 속에 있고, 죄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받아드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종교와 신을 만들고, 자신의 마음을 쏟고 안정감을 찾을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달라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옛 것은 벗어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었어요.
(쉬고)
우리는 그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쉬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가 가득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도 “증거"보다는 “내 개인의 영적인 신념"을 갖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경우들이 종종 일어나요.
내가 한만큼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이나 복을 주셔야 한다.
좋은 곳에 취직을 시켜주시거나, 좋은 점수를 주시거나 등등 하나님을 위해 한 여러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좋은 결과. 댓가를 바라는 등의 오해를 할 때가 있다는거죠.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을 ‘기복'이라고 하죠.
하나님에게 복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에게 복과 은혜를 구해야 해요.
그러나 내가 한 만큼 무엇인가를 받기를 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의 태도가 아니에요.
(쉬고)
이미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복. 구원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받았어요.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모든 일들은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나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 되어야 해요.
구원과 동행이라는 가장 큰 복을 받았음에도 우리는 ‘영적인 신념'을 갖고 ‘나의 욕심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려 하는' 실수와 오해를 많이 범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어요.
말씀을 나누고 기도 할 때에 오늘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기도를 많이 하게 될거에요.
그 때 나와 같은 자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심에 감
사를 꼭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래요.
(쉬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갖고 있는 그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라고 지난 주일에 나누었었어요.
여러분 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었나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원을 줄테니 오늘부터 3년간 산에 들어가서 자연인으로 살아라"
“내가 너를 구원해 줄테니 나에게 돈 3억을 가져와라"
“구원을 얻고 싶다면 왼쪽으로만 누워서 10년을 자라" 이렇게 말씀하시던가요?
아니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기 위해 우리는 어떤 큰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복잡한 시간을 거치지 않았어요.
그저 하나님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한 모든 일들이 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 것을 내가 믿습니다. 라고 고백했을 뿐이에요.
그 고백이 겨자씨만큼 작고 보잘 것 없었다 해도, 하나님은 그 고백만을 보고 우리를 신뢰하시며 구원을 선물로 주셨어요.
시험기간이 되면 공부를 해야 하죠. 좋은 성적을 받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 하죠.
만약 공부 하나도 하지 않고 가서 시험을 보면? 점수는 당연히 낮을 것이고 어쩌면 학사 경고까지 받을 수도 있겠죠.
자격증, 진급시험 등도 마찬가지에요. 그것을 이루려면 우리는 부단히 많은 노력을 하고 또 하고 또 해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우리는 사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정말 작은 고백을 했을 뿐이에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드립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 살아가는 죄인의 삶에서, 세상을 만드신 분의 아들과 자녀로 한번에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어요.
(쉬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드린다!라는 이 고백은 저와 여러분이 미래와 보이지 않는 현실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겠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어쩌면 우리는 단 한번도 “미래와 보이지 않는 현실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합니다!”라고 입으로 고백한 적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그렇게 고백했어요.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드렸으니까요.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받아드린다는 것은 ‘약속하신 미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과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실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단호한 확신'을 함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다 하늘 나라에 갔을 때 자유함을 선포받고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가는.
그 천국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보이지 않지만 나는 확신합니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그 증거를 쥐고 있는 존재는 내가 아니에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에요.
그 분이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이에요.
내가 너를 위해 이 땅에 왔고, 죽었고 다시 살았다.
내가 너를 구원하기 위해 생각만 하지 않았고, 수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너를 다시 나의 품으로 불러오기 위해, 이 땅에 직접 오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증거이다.
보이지 않겠지만 그 증거를 붙들라! 그 증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쉬고)
매일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승선을 바라보며 걸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지쳐있어요.
결승선을 바라보기는 커녕 지금 당장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는 것 조차 버거워 할 때가 있어요.
왜 우리가 결승선을 바라보지 못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있지만, 약속하신 미래가 너무 멀게 느껴지다 보니까,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증거가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붙들 수 있는 뭐라도 보이면 견디고 결승선을 향해 달릴텐데,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믿어지지 않으니까 우리는 결승선을 바라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거에요.
(쉬고)
이로써 선진들이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 우리보다 먼저 믿고 신앙의 길을 걸어간 믿음의 선배들을 말하죠.
그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증거를 얻었을까요?
그들도 우리처럼 기도 응답이 없어보였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뀌지 않는 현실을 보며 낙담했고, 하나님을 저주했고, 하나님을 비난하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와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 선진들이 ‘증거를 얻었다'라고.
그들이 증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내 삶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자책하게 만들고 또 너무 혼란스럽지만 “약속하신 미래에 대한 견고한 확신"과 “보이지 않더라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단호한 확신”을 끝까지 붙들었기 때문이에요.
(쉬고)
히브리서 11장이 매일을 살
아내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혹은 내 믿음을 숨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며 낙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말씀 드렸었죠.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나를 향한 견고한 확신과 단호한 확신을 갖고 있음을 안다"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그리고 저도 여러분이 정말로 “약속하신 미래에 대한 견고한 확신과 보이지 않아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단호한 확신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확신해요.
그 근거는 3절이에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시는 것을 두 눈으로 봤나요? 그런데 어떻게 믿어요?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온 우주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요. 확신해요. 그것이 맞다라고 확정적으로 받아드리고 있어요.
이 것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러분에게 “견고하고도 단호한 확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쉬고)
저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믿음은 현재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이어주는 고리와도 같아요.
1-3절을 세가지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데 supporting, evidence, witness에요.
이 세 단어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면서, 현재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이어주고 있어요.
바라는 것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생기는 모든 현재의 일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supporting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evidence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혼자가 아닌 함께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witness를 주시는 성령님.
믿음 - 하나님께로 증거를 받음 (인정)
믿음 - 하나님께로 증거를 받음 (인정)
히브리서 11장은 역사적 사건.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현재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요.
2절에서 말하는 “증거를 얻었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 받다"라는 뜻이에요.
“증거를 얻다"라는 이 헬라어 단어는 법정에서 결정적인 변호를 할 때만 사용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셨음을 그 분이 직접 증언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요.
여러분 이 증거는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선배들만 얻은 것이 아니에요.
오늘 이 자리에 모여있는 여러분들에게 있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인정’을 우리도 받고 있어요.
(쉬고)
4-7절을 보면 아벨, 에녹, 노아 세 사람이 나와요.
먼저 아벨은 ‘피 흘림의 제사'를 드렸던 사람이에요.
가인과 아벨이 처음 얻은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드렸죠.
그들이 제사를 드렸던 이유가 뭘까요?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던 적이 없는데, 왜 가인과 아벨은 제사를 드렸을까요?
부모님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깨달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죄를 지어 쫓겨났기에,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죠.
그래서 서로의 삶의 영역에서 가장 귀한 것을 제물로 가지고 나왔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죠. 왜 받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원하셨던 것은 그 마음이었어요. 제사를 드리러 나오게 된 동기가 된 ‘믿음'을 원하셨던 것이죠.
가인은 좋은 인상을 하나님께 드리고 인정을 얻고자 했어요.
어떠한 믿음이나 감사의 마음 없이 그저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아벨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있었어요.
잘 보이기 위한 예배가 아니라,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어요.
어쩌면 아벨은 죄인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대체물의 죽음이 필요하다. 피흘림이 필요하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그들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시면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덮어주셨거든요.
아벨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 거에요.
수치를 덮으려면 어떠한 대체물의 죽음 혹은 피흘림이 필요하다.
이것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거에요.
하나님은 그러한 아벨의 제사를 ‘의롭다'라고 하셨어요. 인정하신거에요.
(쉬고)
사실 아벨은 하나님의 호감을 살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나님을 배신한 부모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올바로 된 믿음도 없었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의 크기와 상관없이, 마음의 동기를 보셨고, 그것만으로 기뻐하셨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어요.
이 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부분이에요.
우리도 동일한 죄인이기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림으로 불완전해져버린 우리를 다시 완전한 존재로 만들려면, 그 부족함을 잘 알고 채워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완전함으로 우리의 불완전함을 덮어주셨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바꾸어 주셨어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의로워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의로워졌어요.
여러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음에 낙망하지 마세요.
좌절하지 마세요.
이런 나를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 그만하세요.
저와 여러분에게 “의롭다”라고 선언되었어요. 확정되었어요.
의롭다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언제든, 영원히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이거든요.
우리의 각자의 자리에서 언제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 인정을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에요.
그래서 우리는 의로워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금처럼 믿음으로 의지하기만 하면 돼요.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의로움은 유지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주실 거에요.
다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5절을 보면 좀 답답해요.
그가 믿음으로 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거든요. 아벨은 제사를 드렸지만 에녹은 그런 기록이 없어요.
그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고만 밝히고 있어요.
에녹은 창세기 5장에 등장을 하는데 22,24절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변함없이 동행했다"라는 말이 반복되어요. 그리고 “변함없이 동행하던 에녹을 데려가셨다.”고 말해요.
에녹이 등장하기 전에 기록된 내용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요.
의심했고 불순종했던 아담과 하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고 두려워 숨어있다 결국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로부터 시작된 죄가 세상에 가득차고 오직 악함만이 보이던 그 때 에녹이 등장한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던 공급이 죄로 막히고, 인간이 약해지면서 죄에 빠져 미쳐 살아가던 그 때에 에녹이 등장하는데, 그는 믿음으로 다른 길을 선택했어요.
그가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우린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에녹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원했다”라는 거에요.
세상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고,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보이지 않으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걷는 것을 원했어요.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정말로 원하고 있나요?
당신은 하나님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나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며 함께 걸어가고 있나요?
에녹이 원했던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셨는지 5절에 적혀 있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
믿음으로 동행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살아내려 몸부림 쳤던 에녹의 삶을 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거에요.
그가 정말로 그렇게 살았던 살지 못했던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과 도전 그리고 몸부림에 주목하시며 기뻐하셨고 그를 의롭다! 라고 인정하셨데요.
그 결과 모두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잊었던 그 시대에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가는 놀라운 특권을 누릴 수 있었어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은 믿음을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는 그 시대에 믿음을 가졌고 지켰고, 하나님과 동행했고, 그 결과 그 분이 주시는 상. 특권을 받게 되었어요.
이 특권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어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개인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반응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거든요.
믿음을 향해 도전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이미, 함께 동행하는 특권을 주셨어요.
마지막 노아
는 ‘하나님의 경고에 순종해 의를 상속 받은 사람이에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창세기 4장, 에녹은 5장, 노아는 6장이에요.
에녹의 시대 때 죄가 극에 다달았을 줄 알았는데, 그 이후 노아의 시대 때 더 심해졌었어요.
모든 인류의 악이 극에 달았고, 심지어 하나님은 그들을 보며 한탄하시기 까지 했어요.
아벨과 에녹처럼 그 시대에도 한명의 사람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어느 날 노아에게 “땅의 모든 사람들을 물로 쓸어버린 예정이니, 135미터의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동물들을 구하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셔요.
하늘은 맑았고,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정확히 언제 그들을 쓸어버리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노아는 기약없이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노아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를 붙들고 배를 만들며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었어요.
세상의 모든 가치와 가르침을 역행하는 삶을 살았어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정말 바보 천치 멍청이와 같은 삶을 살았어요. 왜 그런 의미없는 가치에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느냐 비방했어요.
세상은 노아를 미친 사람. 미치광이 종교인으로 보았어요.
제가 중학생일 때 울산에서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국어시간이었어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 일어나서 책을 대표로 읽으라고 시키셔서, 책을 읽었는데, 저보고 너 어디에서 이사왔냐? 라고 물으셨어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애들 사이에서 사투리를 쓰지 않으니까 신기하셨던 것 같아요.
대답을 했더니 대뜸 너 종교가 뭐야. 라고 하셨어요.
전 아직도 왜 제 종교를 물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 다닙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 너도 예수에 미친 또라이구나?”
“야 교회 다니는 사람들 왜 그렇게 손을 모으고 기도하다가 울고 손을 들고 그러냐?”
“너도 그래? 그럼 너도 미친 놈이네"
그리고 그 이후 저는 한동안 미친놈이라고 애들한테 불렸어요.
노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랬던 거에요. 아니 더 심했을거에요.
농사를 그만두고 재산을 탕진하면서 배를 짓는 미련한 사람
비는 커녕 비구름조차 보이지 않는 좋은 날씨가 지속되는데 산 꼭대기에 배를 짓는 사람
홍수가 일어날 것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는데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미치광이
그 것이 노아를 대변하는 수식어었어요.
(쉬고)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삶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세기의 미치광이 노아를 “의의 상속자"라고 부르셨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고 믿음을 지켜내는 그를 보며 ‘의롭다'라고 인정하셨어요.
하나님이 변태라서 괴로운 상황을 주고 선택해라고 하시고 그 것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의롭다'라고 인정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에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어떤 상황에도 확신하며 단호함을 보일 수 있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에요.
지금 여러분이 보이고 있는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에요.
주말의 여유와 달콤함을 포기하고 이 자리에 나왔어요.
월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청년들은 내일 집회 이후 밤 늦게 인천으로 돌아가겠죠.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여기는 오면 안되는거에요.
와도 내일 예배 드리지 않고 집에 가는게 맞아요.
그래야 월요일 출근도 준비하고 한주를 살아내죠.
그런데 여러분은 미련해 보이는 선택을 했어요. 반차를 쓰고 왔고, 누군가는 10개밖에 없는 월차를 냈어요.
내일 집회 다 끝나고 가면 피곤할 것 뻔히 알아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 곳에 있는 것을 선택했어요.
왜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쉼이 더 달콤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요.
(쉬고)
사실 6월 수련회를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어요.
많이 올까? 괜찮을까? 상처 받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8월로 옮겨야 하나?
8월에 가족들과 함께 하거나 개인적으로 휴가를 가면서 쉬도록 하고 싶었는데 내 욕심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있었어요.
기도하며 선택했지만 이 선택이 청년들로 하여금 시험들게 하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어요.
제이원은 시험기간인데, 시험 공부하는 시간을 포기해야 했어요. 심지어 지난 주일 밤 11시가 넘어 집에 갔어요.
임원들은 수시로 모여 회의하고 준비하고, 계획을 세웠고 너무 많은 수고를 했어요.
수련회 TFT가 세워지고, 그 곳에 속한 청년들이 여러분을 위해 최적의 음료 비율을 맞춰내려고 머리를 맞대면서 만들고 시음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미안했어요.
또 청년들 모두 말하지는 않았지만 6월에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들이 분명히 있었을거에요.
그런데 저의 이러한 고민과 갈등이 참 부질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진짜 믿음을 갖고,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 자리에서 교제하며 행복해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았거든요.
(쉬고)
우리가 선택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6월 이 때 우리를 위한 은혜의 시간을 준비해두셨고,
우리의 마음을 오늘을 향해 달려오도록 해주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 “의롭다. 의의 상속자" “나와 함께 동행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당신의 믿음은 거듭났는가?
당신의 믿음은 거듭났는가?
설교 이후 함께 기도를 하기 전에 반드시 점검해야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나의 믿음이 거듭났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던지는 거에요.
거듭나다라는 것은 단지 마음이 약간 변화되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어떠한 감정적인 요소로 인해 그 순간만 바뀌는 변화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완전한 개조를 의미해요.
아예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것을 말해요.
옛 사람. 옛 습관이 무너지고 새 사람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해요.
거듭남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요.
부르심에 반응하여 이 자리에 온 것은 여러분 스스로의 결단이고 하지만, 그 결단에 대한 은혜와 거듭남은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어요.
우리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렇게 하기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기 때문"이에요.
구원과 부르심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에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
과거에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
우리의 마음에 박혀버린 고집과 쓸데 없는 생각들을 제거 하는 것
막혀 있던 것이 뚫리며 영적인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거에요.
당신이 믿음을 갖고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에요.
이 사실을 믿는다면 반드시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내 믿음은 거듭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해요.
(쉬고)
여러분 이 수련회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이에요?
왜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왔어요?
당신의 삶에 결여되어진 부분. 회복이 필요하다라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 아니에요?
지금 소개하려는 이 사람은 결여 된 것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어보는 사람이에요.
명예, 권력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도덕책이라 인정받으며 무한한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어요.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성경을 묻고 하나님에 대해 배워가곤 했어요.
그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듣고 해결책도 주고, 성경적인 답변도 들려주던 사람이에요.
모두가 보았을 때 절대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인데, 사실 그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아무리 성경을 읽고 보아도 기도해도, 사람들을 만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너무 답답했어요. 그러다 그가 한 이야기를 들어요. 요즘 가장 핫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에요.
대답을 찾기 위해 그는 나사렛 예수를 찾아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밤이 깊었을 때, 어두움으로 인해 서로를 식별 할 수 없는 시간에 집을 나서요.
이 만남은 반드시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어요.
큰 기대를 하진 않았으나 뭐라도 insight를 얻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사렛 예수를 찾아 떠났어요.
(쉬고)
여러분의 삶은 어떤가요?
혹시 여러분도 이 사람처럼 해결되지 않는 삶에 해답을 찾고 있지는 않았나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을 찾아나서는 특성이 있어요. 그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찾아나서요.
어쩌면 이성교제를 통해 나의 공허함을 채워보려 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수집한다거나 혹은 운동을 한다거나 하는 등 순간의 행복을 채워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에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어떤 방법으로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고 있었나요?
세상에서 해답을 찾아가려다 지치지는 않았어요?
만약 지쳤다면 그 것은 유일하게 해답을 가지신 분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일거에요.
내가 문제라는 것을 아는가?
내가 문제라는 것을 아는가?
밤 늦게 예수님을 찾아가고 있는 니고데모가 딱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는 당대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였어요.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단계까지 오른 인물이었어요. 머리도 좋았고 영적인 지식도 많았고, 부도덕한 행실을 멀리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어요.
그는 바리새인이었어요.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라는 뜻인데, 스스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분리되기를 바랬어요.
타락한 문화와 도덕적 오염에서 벗어나려면 나 스스로 이들과 선을 긋고 살아야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어요.
엄격한 격리를 하면 할 수록 그들은 자부심을 느꼈어요.
그는 산헤드린 구성원이었어요.
그들이 내리는 모든 판결은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쳤어요.
그러다보니 산헤드린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안에 들어가서는 또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 또 많은 노력을 했어요.
니고데모는 그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는 무엇인가 공허했어요. 채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었어요.
분리된 삶을 살고 매일 매 순간 말씀을 읽었음에도 그 마음은 공허함만이 가득했어요. 왜냐하면 그는 우리처럼 유일하게 해답을 가지신 분을 주목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의 신앙 상태를 평가하고 그에게 성경적인 해답을 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 스스로는 하나님을 붙잡거나 매달리지 않고 있었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이에요.
(쉬고)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그 사역의 자리들이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고 있나요?
그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고 있나요?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역의 현장, 우리가 하고 있는 여러가지 봉사와 노력은 믿음과 비례하지 않다는 것이에요.
사역을 하면 할 수록 그 것이 더 짐이 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순간으로 바뀔 때가 있거든요. 그럼 우리는 고민하죠.
“그만 둘 때가 된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까?”
다 맞아요. 하지만 사역이 일로 다가오고 힘들어진다면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신호에요.
니고데모의 믿음의 방향은 하나님이 아닌 사역 그리고 나로 향해 있었어요.
우리도 허락하신 모든 자리에서의 일들의 방향이 하나님과의 동행이 아닌 상황 그리고 나로 향해 있었을지 몰라요.
니고데모의 머리에는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차 있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어요.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선택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고백하기 위해 말씀도 많이 보고 기도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돌보고 했지만 그의 가슴은 텅 비어 있었어요.
머리에 있는 지식들을 나의 믿음이라 오해했어요.
여러분 정말 부끄럽지만 니고데모의 모습은 저의 모습이더라구요.
저는 노션을 쓴다고 했잖아요?
한달이 끝나갈 때가 되면 저는 한달의 달력을 보고 또 주간일정들을 보면서 스스로 피드백하는 시간을 가지곤 해요.
달력을 보는데 내가 한달간 정말 열심히 살았고 또 청년들을 만났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달에도 열심히 달려야지! 라고 생각을하면서 기분 좋게 가방을 메고 퇴근을 했어요.
집에 걸어가는데 뭔가 좀 고구마 100만개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거에요. 그래서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하면서 걷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가득 찬 달력의 일정과 주간 일정들을 끝냈음을 표시하는 것들이 저의 훈장이 되어 있었더라구요.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를 위한 어떤 영성의 시간에 대한 일정은 없고, 양육 훈련, 심방, 교회 일로만 가득차 있었더라구요.
저는 오해하고 있었던거에요.
사역의 첫 동기는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었는데, 내가 가진 것을 다 나누기 위함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바쁘게 사는 것이 내 인생이 되어버렸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니고데모의 모습이 내 모습이었던 거에요.
나의 개인적인 바쁨과 노력은
내 죽어가는 영혼 속에 어떠한 영원한 생명이나 새로운 힘을 창조해내지 못하더라구요.
많은 노력과 봉사들이 내 믿음을 보장해주지 않더라구요.
(쉬고)
여러분은 어떤가요?
사실 이 이 이야기 여러분의 이야기이기도 할거에요.
정말 그 분을 향한 순수한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어요?
많은 노력과 봉사들이 여러분의 훈장이 되지는 않았어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어떤 시간들을 보내오고 있었나요.
최근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쉬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우리의 어떠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로 맺어져요.
내가 어떤 봉사와 노력을 하는 것으로 올바른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요?
나의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와 은혜를 매일 더 많이 갈망하도록 하시죠.
그 분께서 우리 삶에 일하고 계심을 내가 믿고 신뢰 할 때, 비로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새로운 은혜로 채워질 수 있어요.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 똑같을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 은혜만이 텅 비어버린 내 마음을 채울 수 있어요.
그 분과의 개인적인 만남. 하나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만을 위해 준비하고 계획하신 시간. 보이지 않는 손의 주권적이고도 강권적인 개입하시는 만남
그것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해요.
(쉬고)
니고데모는 깊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어요.
그 만남은 단순히 니고데모가 어떠한 insight를 얻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어요. 태초 전부터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셨고 준비해두셨던 만남이었어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 그리고 여러분과 예수님의 만남은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두셨던 걸음이었어요.
오늘 나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분을 복잡하게 만드는 많은 계획들이 단순화되고, 여호와의 뜻을 알게 되길 바래요.
그리고 내가 앞으로 걸어 가야 할 삶의 방향을 찾기를 축복해요.
(쉬고)
니고데모는 여전히 자신이 어둠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어요.
예수님과의 만남이 계획 된 만남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답답함을 해답을 찾는 주체가 자신이 주체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갔어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자신의 지식을 더해 해답을 찾으려고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어요.
예수님은 그를 향해 ‘거듭나야 한다’라고 하세요.
머리속에 가득한, 경험으로만 가득한 하나님에 대한 일들이 텅 빈 가슴으로 흘러내려가야 한다.
머리만큼 가슴이 뜨거워져야 한다! 라고 말씀하세요.
그런데 니고데모는 그 말씀을 받아드리지 못해요. 왜냐하면 ‘거듭남'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삶의 습관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발걸음을 내딛어 거듭남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어요.
(쉬고)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있나요?
거듭난 믿음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나요?
아니면 거듭난 것처럼 보이는 믿음을 들고 세상 안에 더 들어가 있나요.
저는 여러분들이 니고데모와 다르게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었기를 간절히 바래요.
그런데 만약 내가 하나님 안이 아닌, 바깥쪽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 각자가 갖고 있는 설교노트나 휴대폰에 이러한 문장을 써보세요.
“나는 무엇을 쫓으며 살아오고 있었는가?”
여러분은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으며 살고 있었나요.
무엇에서 만족감을 채우고 있었나요?
도대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나요?
하나님이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 결여되어 있지 않았나요?
삶의 공허함을 내가 무엇으로 채우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지금 삶의 자리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쉬고)
죽은 심령에, 죽어가고 있던 심령에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에요.
보이지 않으나 내 믿음의 실체가 되며, 보이지 않으나 살아갈 소망을 주는 그 영원한 생명의 회복이 우리에게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마음을 고백해야 해요. 오직 하나님만이 이 시간 우리에게 각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세요.
나에겐 그 생명이 필요합니다! 라고 고백하세요.
그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실거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OO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고)
보이지 않으나 내 믿음의 실체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 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쉼을 간절히 사모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회를 통해 하나님과 찐한 교제를 누리는 시간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1. 내 마음의 한계를 넘어 (20분 - 5/15)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기 전까지 불안하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기 전까지 영원히 불안한 상태에 남게 된다.
내 안의 한계를 넘어 일하시는 분을 정말로 믿는가? 그 분의 일하심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 분을 일하고 계신다.
너와 나의 믿음. 여러분과 저의 믿음. 서로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함께 고백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해요.
각자의 믿음은 따로 가지 않아요. 각자 처한 환경이 다르고 기도의 제목은 달라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각자의 기도와 믿음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들고 맺어가신다는거에요.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세요.
주께서 주신 모든 시간들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것도 주의 뜻 알기 어려웠지만 어려워도 이유 있음을 아는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2.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시선 후렴 (25분 - 8/17)
우리의 믿음은 현재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 것에 대해 낙심하지 않아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야 해요.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드렸어요.
‘약속하신 미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실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단호한 확신' 선포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찬양한 것처럼 그 분의 꿈이, 성품이, 권능이 나의 비전과 인격과 능력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내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3. 하나님의 부르심 (A) + 나는 주님께 속한 자 (A) 후렴 (25분 - 7/18)
불가능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에요. 미래를 사는 사람들은 ‘소망'을 꿈꿔요. 그 것이 내 삶에 이루어 질 수 있다라는 ‘가능'을 꿈꿔요.
세상은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말할거에요.
그 신앙의 길을 포기하라고
너는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처럼 그 믿음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과 너는 다르기에, 믿음이 형편없다라고 말하며 우리를 넘어뜨리려 할거에요.
여러분 지지 마세요. 나약해지지 마세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세요.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부르신 것, 구원하신 것에 대해 한번도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세요.
확신을 가지세요.
내 지금의 상황을 보고 좌절하고 낙심하면, 우리 믿음에 의심이 들어와요. 의심이 생기면 포기가 그림자처럼 뒤따라와요.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세요.
너의 삶과 생각과 발걸음은 결코 틀리지 않았노라고.
지금처럼 나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부딪치며 걸어가라고
내가 너를 의롭다 인정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라고
여러분 지난 주 순모임 때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졌을거에요.
그 기도제목들을 꺼내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낱낱히 고하세요.
기도제목을 붙들고 씨름하세요.
4. 돌아서지 않으리 (25분 - 7/18)
여러분의 곁에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모두가 한 편인 세상 속에서 반대의견을 내며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가 함께 찬양한 것처럼 돌아서지 않겠노라고 함께 고백한 동역자들이 여러분 곁에 있어요.
공동체를 위한 기도는 내일 집중적으로 할건데요.
오늘은 여러분 양 옆에 있는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시간을 3-5분정도 드릴게요.
혹시 이름을 모르면 지금 물어보세요. 그리고 기도제목도 한 두가지 나눠주세요.
양 옆에 있는 지체를 위해 그리고 들은 그 기도제목을 놓고 함께 기도합니다.
5. 기대 (20분 - 5/15)
이 시간은 가온누리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기를 바래요.
일분 일초가 소중하고, 한해 한해가 정말 의미있는 우리의 삶.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가온누리 공동체를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것은 정말 특별한 축복이에요.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성격도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한 공동체에 묶여있어요.
그리고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을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 내시려 하고 있어요.
여러분에게 허락되어진 이 공동체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세요.
여러분이 기도할 수 있도록 반주로 찬양으로 돕고 있는 제이원을 위해서
수련회를 위해 머리를 싸매고 회의하고 준비하며 여러자리에서 섬기고 있는 임원들 위해
여러분들이 수련회에 오도록 하기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한학기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던 순장들과 엘더들을 위해
여러분을 위해 스스로 시간을 포기하고 섬기기로 한 TFT팀들을 위해
모든 가온누리 공동체를 위해 함께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