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18_주일설교_창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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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조화로운
제목: 조화로운 삶
본문: 창세기 2:1-3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오늘 우리는 누구나 거의 예외 없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일이 많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만 바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저처럼 가급적이면 일을 적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도, 개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대개 바쁘게들 삽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바쁘다는 것이 미덕이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안부 인사를 받으면 '아, 나 요즘 바빠!'라고 대답해야 떳떳한 느낌이 듭니다. '나 한가해!'라고 할 것 같으면 답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왠지 부도덕한 것처럼 여깁니다. 빈둥거림은, 그 말 자체에 대한 인상처럼, 악덕이 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우리의 생활방식, 사고방식에는 이중적인 가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실제로 단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야만 그만큼 생활의 안정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남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만 남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현실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일거리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 된 현실에서, 일하는 것, 그것도 아주 바쁘게 일하는 것은 당연히 미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일들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 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지금의 일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보면 실제로 타인의 노동 덕분에 일하지 않고도 여유롭고 한가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른바 어떤 의미에서든 특권층입니다. 결국 우리 현실에서 바쁘게 일하지 않고도 한가하고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특권층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가운데 한가롭게 여유를 즐길 수 없습니다. 불안과 초조, 일할 때보다 더욱 힘든 긴장과 현실적 어려움만 겪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일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은 부도덕한 사람들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바쁘게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가치관 밑바탕에는, 한편으로는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숙명적인 현실에 대한 체념이 자리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일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별된 불평등한 사회 현실에 대한 저항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이유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근본 원인은 한 가지입니다. 일하는 사람들과 일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별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기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에서 어떤 사람은 일하고 어떤 사람은 일하지 않는 현실이 아닙니다. 개인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한편의 사람들은 일할 수밖에 없고 한편의 사람들은 사실은 바로 그들의 일 덕분에 고된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구조적 현실입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휴식은 부차적이거나 혹 그것이 지나치면 부도덕한 것으로, 확고불변하게 못박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과 휴식은 누구에게나 동시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면 휴식 또한 신성한 것입니다. 바쁜 것이 미덕이 될 수 있다면 빈둥거림 역시 미덕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그 노동과 휴식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공유할 수 있다면, 그렇습니다. 문제는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노동과 휴식, 바쁨과 한가로움의 가치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쉬고 싶지만, 일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일한다' 하는 정도의 요망사항만을 늘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창세기 1장에 이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두 편의 창조 이야기(1장과 2:4절이하)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거대한 드라마로 엮고 있는 제사관계 문헌(P기자)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이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이레 째 쉬셨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이레 째 휴식을 취하신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던 엿새 동안의 날들에 관해 전하는 것과는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의 질서를 일러주는 말씀이자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처해 있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민족이 처해 있던 구체적 상황에서 이 말씀은, 진정으로 휴식을 누리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 고단한 노동으로 지쳐 있던 이스라엘 민중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삶을 누릴 수 없었던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안식, 휴식을 누리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셨으니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주장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진정한 휴식을 누리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의 인권선언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이 문서가 기록된 바빌론 포로기 상황에서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 제왕들의 횡포와 끊임없는 외세의 횡포에 시달렸던 이스라엘 백성의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정말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일 때문에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창조의 대미로서 휴식은, 나아가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이 휴식을 누려야만 한다는 이치를 일깨웁니다. 그 휴식을 취하는 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했다는 것은, 그 휴식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휴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일한 다음에 잠시 짬을 내어 휴식을 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또 6일 동안 일한 다음에 7일 째 쉬었으니, 그 만큼 일한 다음에 잠시 쉬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창조의 질서 가운데 휴식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그 의미는 양적인 시간의 비중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일한 시간이 6이요 쉰 시간이 1이니, 일과 휴식은 6:1의 비중을 지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 창조 과정의 완성으로서 7입니다. 제7일이 없다면 6의 과정은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 제7일은 조화로운 삶의 질서, 조화로운 창조의 질서를 함축합니다. 그 7이 빠지면 조화로운 삶의 질서는 파괴됩니다. 이 사실은 노동만으로, 일하는 것만으로 창조의 과정이 결단코 완결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십계명 가운데 그 어떤 것보다 안식일 계명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안식일 정신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물)의 관계를 집약한 십계명의 정신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조화로운 질서를 구현하는 날로서의 안식일입니다. 그 안식일 제도가 사람들을 옭아매는 강제적 규율이 되어 생명을 살리고 조화로운 삶을 회복하는 안식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말았지만, 본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태도는 그 안식일의 본래 정신을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3-4장)에서 이 안식은, 궁극적인 종말론적 희망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창조의 완성으로서의 휴식의 의미는 그처럼 깊은 믿음으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성서에서 안식, 휴식은 바로 그 생명의 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생명체들이 안식을 누림으로써, 휴식을 누림으로써 비로소 온전해지는 생명의 질서를 말합니다. 조화로운 삶의 질서입니다.
대부분 누구나 바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심신의 여유를 찾지 못합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가족이나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도 희박한데, 자연을 바라보며 오묘한 생명의 질서를 생각할 여유도 없습니다.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여기다 뭐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부터 들지 않습니까? 도무지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뿐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이런 말이 소개됩니다. "문명이란 불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 여름 막바지에 엉뚱한 발상을 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누워서도 책을 편안하게 볼 수 있을까? 그래서 기어코 누워서도 책을 볼 수 있는 책걸이를 만들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누워야 할 만큼 뻐근하면 잠시 휴식을 취하면 될 것을, 굳이 누워서까지 책을 보려는 강박관념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혼자 실소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삶의 양식이 그런 것과 같습니다. 편리를 추구한다는 명분하에 뭔가 더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거기에 몸과 마음을 쏟아 넣느라 더더욱 분주해지고 결국 편리함과 안락함은 거꾸로 뒷전으로 물러나는 삶의 양식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쉼으로써 스스로 조화로운 삶을 보여주셨으며, 그것으로 우리에게 조화로운 삶의 질서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창조절을 시작하는 첫 주일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그 복된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