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K - 서로를 잇다
0 ratings
· 14 viewsNotes
Transcript
담대하고 인내하라
담대하고 인내하라
작년에도 그랬는데 3박 4일이 꽤나 긴 것 같으면서도 짧다고 느껴지는 오늘 인 것 같아요.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또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또 믿음의 싸움을 하게 되겠죠.
모든 신앙의 여정과 믿음의 싸움 속에 참여하게 된 이번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붙들고, 또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들이 있음에 힘을 내는 사랑하는 모든 청년들이 되기를 소망해요.
(쉬고)
여러분은 혹시 복음을 믿는다는 이유로, 신앙을 갖고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혹은 괴롭힘을 당했던 적 있나요?
그럴 일은 없지
만 만약 지금 갑자기 누군가 저 뒤문을 열고 들어와서 우리에게 예배를 멈추라고 한다면, 예배를 계속 드리면 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을 느낄 것 같은가요?
사실 우리는 실제 삶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복음으로 인해 협박을 받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는 많이 없어요. 술자리나 혹은 주일 출근 등과 같은 것들은 있겠지만, 정말 목숨 그 자체를 위협받는 일은 경험하기 어려울거에요.
곰곰히 생각해보았는데 저도 최근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거든요.
예전에 나누었던 이야기이긴한데, 저에겐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려움에 쳐했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예수를 믿으라고 한번만 더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때리겠다. 죽이겠다!”라고 말하는 수많은 남자들 앞에, “그럼에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밖에 없다!”라고 외쳤던 한 여자친구도 있었어요.
힌두교와 이슬람 교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 제 눈 앞에서 구타 당하는 장면”을 보기도 했어요.
구타를 당하는 그 친구를 꺼내와 제가 데리고 병원으로 가면서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라는 저의 질문에 “나는 지금 죽어도 영원한 천국에 가지만, 저 친구들은 지옥에 가니까 나는 전할 수밖에 없어"라는 이야기를 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우리는 복음을 지키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까지 경험해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복음을 지키며 사는 것에 대한 위기와 공격을 받고 있어요.
말씀대로 살아가려 노력하면 할 때마다 우리를 향한 세상의 공격은 더 거세질거에요.
(쉬고)
예수님을 따르는 희생을 치르느라 지쳐가던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점점 공개적인 자리에서 신앙을 포기하고 물러나고 싶은 유혹을 받기 시작했어요.
진짜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개적인 자리에서 눈 딱 감고 한번만 말하고 나오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딱 한번만 믿지 않겠다라고 말하자. 그럼 편해질거야 라는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어쩌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내 신앙과 믿음을 굳이 드러내 보이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기도 하죠.
저자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이 필요하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36-38절.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감옥에 끌려가는 시련을 받고, 돌로 얻어 맞고, 칼에 찔려 죽고 양과 염소의 옷을 입고 동물 흉내를 내는 등, 정말 상상도 안되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저자는 두 가지를 이야기 해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그리고 인내하라
이 두 가지는 현재 그 상황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들이에요.
채찍에 맞을 때 덜 아픈 각도를 알려준다거나,
감옥에 갇혔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덜 맞는 법을 알려준다거나,
칼에 찔릴 때 고통 없이 한번에 죽을 수 있는 부위를 알려준다거나,
그런 실제적인 이야기가 필요한데, 저자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인내하라"는 전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하고 있어요.
이것만으로도 킹받는데, 이번엔 또 이렇게 말해요.
10장 38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물러나면 기뻐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 실제적인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줄 위로는 전혀 아니잖아요?
만약 여러분이 저에게 어떤 고민이나 기도제목을 이야기해주었어요.
그런데 제가 듣고나서 그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지 않고, 어떤 공감도 없이 “참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거야"라고 한다면 여러분 더 이상 저랑 대화를 하지 않을거라 생각해요.
저자는 지금 정말 상황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정말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고, 내 일 아니니까라는 마음으로 하고 있는 조언일까요?
(쉬고)
아니죠.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각자 사람마다 다른 형태의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삶이 찾아가는데 그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지나갈 일이다"라는 것이에요.
비록 지금은 정말 뭐라 설명할 수 없을만큼 갑갑하고 또 속이 상하고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영원히 오랫동안 지속시키지 않으실 것이거든요.
우리는 각자 다른 삶의 어려움과 상황들을 마주하지만, 동일한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존재들이에요.
여러분 여름휴가 가세요?
휴가를 갈 때 버스, 기차 혹은 비행기 등을 타고 이동할거에요. 여러분들이 여름 휴가를 해외로 간다고 같이 상상해볼게요.
짐을 쌀 때부터 굉장히 기대가 될거에요. 공항에 도착하면 흥분도가 올라가겠죠. 그리고 비행기를 타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할거에요.
기대하는 사람, 초조한 사람, 흥분된 사람 혹은 비행기 멀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볼 수 있을거에요.
(쉬고)
비행기는 탄 사람들의 어떤 감정이나 행동과 상관없이 정해진 목적지로 여러분을 데려다주는데 역할을 할거에요.
타고 있기만 하면 우리가 가야하는 목적지로 저와 여러분은 갈 수 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겪고 있는 모든 일들 역시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어떤 감정을 보이고 또 행동하고 이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어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절대 바뀌지 않아요.
비행기를 타면 목적지에 내려주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는 “현 상황을 넘어선" 미래의 목적지에 무조건 도착하게 되어 있어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구원을 얻는 믿음"은 언제나, 끝까지 계속되는 믿음을 이야기 해요.
믿음의 삶은 영원해요. 그 분이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그 분 곁으로 갈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 될거에요.
진정한 믿음은 도중에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이어져요.
(쉬고)
왜 저자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견딜 것을 계속해서 독려하면서, 그런 삶을 살라고 도전을 하고 있을까요?
솔직히 이런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게든 견뎌낼텐데, 왜 똑같은 말을 지겹도록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일까요?
(쉬고)
우리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이야기 해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은, 그 분의 말씀을 통해 얻는 격려와 경고를 통해 이루어져요.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어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에요.
(쉬고)
그래서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주권적으로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에요.
내 구원의 믿음을 붙들고 있는 존재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거에요.
그 분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했고,
그 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를 알게 되는 것이죠.
“주권적으로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라고 이 정리된 문장은, 믿음을 지켜오던 주체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거에요.
(쉬고)
말씀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지, 또 버텨낼 수 있을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말씀을 통해 내 삶에 하시는 경고도 들어야 하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알아야 해요.
생각처럼 그 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어렵지만, 그럼에도 생각을 하게 하고 한번이라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이유는 “주권적으로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부르심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인내해야 해요"
그 부르심을 외면하면서 담대함과 인내함을 버린다면,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된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모세
모세
히브리서 11장에는 정말 많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기록이 되어있죠. 그 중 우리가 잘아는 모세부터 오늘 본문을 잡았어요.
왜냐하면 모세가 살았던 그 시대의 환경이 히브리 독자들과 우리 사회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모세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었고 꽤나 높은 위치까지 올라갔어요. 올 초에 모세에 대해 나눌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모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전쟁에 능한 장수였어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만큼 인기도 있었구요.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며 잘 나가던 그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인식하고 세 가지 결단을 하게 되어요.
첫째, 믿음으로 지금의 것을 포기했어요.
그는 영향력도 많고 특권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지금처럼 지내기만 하면, 큰 사고 치지 않고 숨만 잘 쉬고 있으면 그에게 높은 지위가 자동으로 오게 되어요.
자신의 동족이 고난을 받는 것을 계속해서 보고 자라왔어요. 그도 유대인과 같은 다른 노예들을 부리면서 전쟁에 나갔고, 노예 위에 서 있던 사람이었어요.
노예는 노예답게 무시당하고 고통받고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 당연했어요. 그 것이 당연한 시대를 살았고, 모세도 노예들을 부리면서 살아왔어요.
노예를 괴롭히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던, 아니 계급을 나누고 사람을 부리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몰랐던 그였는데 갑자기 어느날 불현듯, 노예가 핍박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같은 동족이 얻어맞는 것을 보면서 공감하기 시작했고, 노예가 아닌 자유를 주어야 하는 존재라 생각하게 되었어요.
24절. 그래서 그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어요. 세상에서 성공이 보장된 신분을 포기했어요. 세상의 기준으로 굉장히 바보같은 결정을 했어요.
왕족의 신분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편함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노예의 신분이 되어, 그 백성이 겪는 멸시의 삶으로 기꺼이 내려 가기로 결정한거에요.
권력을 포기하고 가난한 노예 신분을 선택한 것이죠.
(쉬고)
편했을까요? 불편했을까요?
바보 같은 질문이죠?
누가봐도 바보 같은 결정을 모세가 한거에요.
평생의 편함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수치 당하는 일을 선택했어요. 이제 다시는 편안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제 그는 노예와 같은 위치가 되었거든요.
둘째,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어요.
모세가 사람을 죽인 후 애굽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어요.
지난 번에 나누었던 것처럼 “자신을 거절한 이스라엘" 때문도 있었지만 “자신의 경솔한 실수로 백성을 이끌라는 부르심을 완수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에요.
모세는 바로라는 사람 자체를 두려워하진 않았어요. 자신이 죽어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웠어요.
그는 애굽을 떠났고 4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면 의미 없이, 꿈도 없이 남의 양을 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그는 그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40년동안 지내면서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 자신의 현실을 보며 낙심하기도 하고 좌절하고 또 포기하기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놓지 않았고 계속해서 붙들고 있다 결국 일어서게 되었어요.
그가 정말 모든 소망과 꿈을 잃어버리고 40년을 허비했다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그냥 돌아섰을거에요.
40년이란 시간 동안 다양한 감정과 상황을 마주하면서 배운 것이 있었어요.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살인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계획을 내 힘으로 하려다 실패했고, 결국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지만
지금 이 시기는 결코 헛되거나 의미 없지 않다.
언제까지 인내해야 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를 배웠어요.
내 힘으로는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아직 기회가 있다.
이 시기는 분명히 나에게 의미가 있는 시간이다.
셋째,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켰어요.
애굽으로 돌아온 모세는 열가지 재앙을 하나님을 통해 보이기 시작하죠. 그 재앙이 끝에 다다랄 때쯤 하나님께서 이상한 명령을 내리셨어요.
“양과 염소를 죽여 피를 문지방에 바르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모세는 사람들에게 규정을 지키라 말해요. 우리는 문지방에 피를 바른 것과 그 결과 장자가 죽지 않았다라는 결과만 보기 때문에 굉장히 쉬워보이는 일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지금 당장 흠없는 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 라는 명령이 아니었거든요.
이스라엘은 앞으로 흠 없는 어린양이나 염소를 며칠동안 간직해야 해요. 잡아야하는 순간 제물에 흠이 생기면 드릴 수 없어요. 그때 가서 제물을 준비하면 늦어요.
내 장자는 그날 밤 죽어요.
당근거래 해봤죠?
당근 할 때 어때요? 흠이 있으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기도 하고, 닦거나 해서 최대한 오염된 것을 감추려고 하잖아요.
그런게 있으면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최대한 깨끗하게 만들려고 하죠.
그리고 당근하러 나갈 때 조심해서 들고 나가겠죠. 막 들고 가다가 어디에 부딪치거나 스크래치가 나면 가격이 또 떨어지니까요.
또 우리가 구매를 할 때 설명한 것과 다르지 않은가 꼼꼼히 살펴보기도 하구요.
중고 상품을 거래 하러 나갈 때도 우리는 소중하게 여기며 깨끗하게 전달하려고 애를 써요.
중고 상품을 아무리 깨끗하게 만들어도 중고 상품에 불과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최상의 것이어야 하고, 흠이 없어야 해요. 흠이 생기면 드릴 수 없어요.
사람들은 유월절이 다가오면 그 때부터 어린 양이나 염소를 준비해요. 그리고 그것을 정말 애지중지 하면서 조심히 다루어요.
흠 없는 어린양과 염소를 소중하게 다루는 유대인들을 통해, 저는 우리가 예배를 향한 마음을 배워야 한다 생각해요.
이들은 제사. 예배를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물론 나중엔 제사를 드리는 제물조차 아까워하는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첫 유월절 사건 이후 그들은 제사에 한해 진지했어요.
다른 일정들보다 예배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제사 시간을 철저히 지켰고, 그 전부터 가서 준비했어요.
(쉬고)
최근 몇주는 그래도 순장들을 통해 공지가 되어서 그런지 1시 예배를 시작 할 때 인원들이 조금 늘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멀었어요.
예배 시작이 1시라고 해서 1시에 딱 맞춰와서는 안되는 것 알죠?
여러분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배를 통해 그 사랑을 확인하고 새로운 힘과 능력을 얻기를 바란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예배시간 보다 더 일찍 와서 기도로 준비해야 해요.
시간 딱 맞춰 오는 것도 감지덕지인줄 알세요!
네. 맞아요. 그래서 저 진짜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고마워하고 있어요. 코로나 이후 이렇게 빨리 회복된, 오히려 인원이 늘어난 공동체는 손에 꼽힐 정도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는 좀 죄송해요.
예배는 뭐 타협하거나 당연히 늦어도 되는 그런 시간이 절대 아니에요. 하나님과 나 사이를 확인하는 시간이잖아요.
목숨을 걸고 여러분을 구원해준 그 분께서, 또 여러분을 기다리게서 해서는 안돼요.
찬양은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과 나와의 자리로 나아가는 시간이이에요.
찬양은 흘려보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주간 살아왔던 나의 마음에 대한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시간이에요.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유월절을 지켜냈던 것처럼, 우리도 나의 믿음으로 예배 시간을 사모해야 하고 지켜야하고 늦지 않아야 해요.
그들이 흠 없는 양과 염소를 소중하게 다루며 지켰던 것처럼, 여러분도 예배 시작 전에 와서 기도로 “오늘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해야 해요"
(쉬고)
왜 그래야 하는 줄 아세요?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시하는 절기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우리 중 그 누구도 먼저 예수님에게 가서 “제발 나를 위해 죽어주세요!” 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흠 없는 어린 양을 준비하셨고, 애지중지 하시던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고 죄를 용서해주셨어요.
적어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분을 위한 예배의 자리를 소중히 여기며 기다려야 해요.
돌아오는 주일 한번 지켜볼게요. ㅎㅎ
(쉬고)
세 가지 결단을 한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애굽을 나와요. 그리고 그 이후 홍해 사건, 라합과 여리고 성 등 다양한 일들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요.
모세 이야기부터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 자에게 위대한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위대한 승리. 삶을 견디는 것을 넘어 주도하며 살아가는 삶은 불가능하지 않아요.
형태와 모습만 다를 뿐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는 언제나 여러분의 삶 속에 있었어요.
40년을 돌고 돌아 다시 가나안 앞에 선 이스라엘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 인물이 등장을 하죠.
이방 여인 라합이에요.
하나님에 대해 듣기만 했을 뿐, 그 분을 알려주는 어떠한 말씀도 가르침도 없었던 그 땅에 하나님을. 복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고 있었던 라합을 만나게 되어요.
언제부터 그녀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었어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쉬웠을까요?
바로 앞까지 왔다가 쫄아서 도망가서 40년을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
나약해 보이는 이스라엘의 신을 믿는게 쉬웠을까요?
그녀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 수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어요.
가나안 사람들이 믿고 매일 숭배하던 이방신 제사도 하지 않아야 했고, 세상의 가치가 아닌 잘 모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가치를 따라야 했거든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제 돌아와서 정복할지도 모르고, 그 안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랐지만 라합은 그것들에 신경쓰지 않았어요.
듣기만 했을 뿐, 어떤 신인지 모르는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기다렸어요.
이해할 수 없는 그 믿음이 그녀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도록 했어요.
뒤로 물러서지 않았어요.
민족을 버릴만큼 그녀는 구원이 간절했어요.
단순히 전쟁에서 살아남아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저급한 구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에 대한 믿음. 그 신을 통한 구원을 기다렸던 거에요.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을 향한 믿음을 갖고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반응하셔서 위대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게 하세요.
내 인생 최대의 기적
내 인생 최대의 기적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위대한 승리의 형태는 굉장히 다양한데, 그 중 한가지가 바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에요.
내일 출근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계절학기 들으러 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오늘 집회가 다 끝나면 늦은 시간이 될거에요.
그거 다하고 가면 피곤하다는 것도 알아요.
그럼에도 여러분은 집에 가지 않았어요.
집에 가지 않은 이유는
피곤함보다 더 중요한 가치 예수 그리스도. 내 믿음의 실상을 붙잡기를 원했기 때문이겠죠.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에요.
여러분은 이미 놀라운 위대한 승리. 기적을 경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해요.
코로나 이후 통계를 보면 2-30대 중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12%가 채 안된다고 해요.
예수를 주로 고백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없다는거에요.
여러분은 그 12%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에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위대한 승리.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기쁨의 가치를 안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우리르 먼저 택하셔서, 이 기적을 먼저 경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그 사실에 우리는 감사해야 해요.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곳이 아닌, 세상에서 곧 사라질, 헛된 가치들을 붙잡고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거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주셨고, 은혜를 누리는 기적을 주셨고, 그 기쁨의 가치를 더 알아 갈 수 있는 시간을 주셨어요.
(쉬고)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 3:8)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던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불어온 성령의 바람을 통해 우리는 거듭난 믿음과 구원을 얻게 되었어요.
내 선택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공동체로 모이게 되었어요.
여러분 중 바람이 어디에서 생기고 불어오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는 사람 있나요?
인간은 바람의 방향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죠.
땅은 잔잔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바람의 방향이 높이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군대에 있을 때 배웠어요.
공수부대는 공수 훈련 때 4번 낙하산을 매고 뛰어내리는 훈련을 하고 그 이후 분기마다 한번씩 강하훈련을 해요.
하늘에 올라가기 전 땅은 바람도 없고 굉장히 잔잔해요. 바람이 불지 않아요.
하지만 위는 달라요. 뛰어내린 후 낙하산이 잘 펴졌는지 확인이 되면 그 다음 해야하는 것이 바로 바람의 방향을 찾는 것이에요.
훈련 때는 바람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것이 있지만, 실제 전쟁이라면 그런 것이 없으니 가능하면 그 것을 보지 않고 바람을 찾아야 해요.
바람을 등지게 되면 낙하산을 조정할 시간도 없이 땅에 쳐박히고 크게 다치기 때문에, 바람을 마주할 수 있도록 바람을 찾아야 해요. 그런데 이 바람이 한방향으로 불지 않아요.
찾아서 마주하면 바람의 방향이 또 바껴요. 그래서 긴장하면서 바람의 방향을 찾아야 해요.
사람은 바람의 방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어요.
하지만 성경은 바람의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라고 말해요.
(쉬고)
바람의 움직임을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바람이 임의로 불매" 우리의 통제와 무관하게 바람은 움직여요. 아주 더운 날 “바람아 나에게 오라!”라고 외친다면 그건 미친 사람이겠죠.
바람은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불어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바람은 우리의 영과 같은 뜻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신 우리의 영 속에 성령님이라는 바람이 들어왔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일 수 있었어요.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고민과 설득의 시간이 있었을거에요. 최종결정을 내가 한 것 같지만, 사실 그 결정을 하도록 인도하신 분. 바람의 방향을 유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누구도 바람을 멈출 수 없어요.
아무리 인간의 기술이 뛰어나도 태풍의 경로를 저지하거나 바꿀 수 없어요. 가끔 태풍의 눈에 들어가서 강력한 폭탄을 쏴서 태풍을 없앤다라는 내용의 영화들이 있는데, 사실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태풍을 저지하거나 소멸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어떤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태풍보다 강력한 힘이 있다면 그건 우리들에게 다른 해로운 영향을 주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성령의 바람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만 주어요.
이 시간 여기에 모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를 멈출 수 없어요.
하나님의 의지 앞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세상을 살아가느라 굳어지고 딱딱해진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여유를 주시기로 마음 먹으셨다면 우리는 그 것을 막을 수 없어요.
(쉬고)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주 그리스도라 고백하게 되었나요?
어떤 계기를 통해 “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라고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었나요?
그 고백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고백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당신의 주권적인 바람을 보내주셨어요.
인간의 눈으로는 바람을 볼 수 없어요.
바람이 강하게 불면 우리는 “와 미쳤네”라고 탄식하죠.
보이지 않는 바람의 영향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 상황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을 향해 흐르고 있는 성령님의 바람. 그 일하심도 평소에는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강력하게 나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부흥회나 수련회와 같은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이런 시간에 특히 나를 향해 꾸준히 흐르고 있었던 성령님의 일하심을 우리는 더 진하고 강렬하게 보게 되더라구요.
이따 기도할 때, 여러분을 향해 흐르는 강력한 성령님의 바람. 일하심을 반드시 느끼길 바래요.
(쉬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바람이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알 수 없어요.
저는 5살 때부터 논산훈련소가 있는 연무대 작은 시골에서 살았어요.
제 주위에는 다 딸기나 벼 농사를 지었고, 군인들밖에 없었어요. 어떤 꿈을 꿀 수 없는 시골이었어요.
비행기는 책이나 티비로만 봤었고, 제 친구들 아버지는 경운기를 타고 다니셨어요. 옆에 논산은 그나마 좀 커서 뭐가 있는데, 연무대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제가 살던 빌라 옆에는 산이 있었고, 저는 맨날 산에 올라가서 애들하고 사슴벌레 잡고 놀고, 무덤 사이에서 축구를 하면서 자랐어요.
해외를 가본 적도 없고,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던 어떻게 보면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에게 하나님께서 열방을 품으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9살 때 “선교사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 꿈을 계속해서 간직하며 살아왔어요.
해외 여행도 가본 적 없는 제가 맨날 선교를 이야기하고, 열방을 이야기하고, 세계를 누비며 말씀을 선포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교회 선후배들은 다 웃었어요.
군대에서 제대를 한 후 저는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옮기게 되었어요.
연무대라는 시골을 벗어나 그나마 좀 더 큰 논산이라는 곳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어요.
그 때부터 제 삶은 다이나믹하게 바뀌기 시작했어요.
오늘부터 딱 한달 뒤 청년들과 함께 단기선교훈련을 필리핀으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만나게 될 김수찬 선교사님들 통해 제 삶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어요.
필리핀으로 데려가셨고, 그 곳에서 영어를 배우게 하셨고 실제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인도로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여러번 나누었던 것처럼 다양한 삶의 간증들을 갖게 되었어요.
인도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도하고 싶어 학교를 배회하다 기도실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너무 더워서 부채질하면서 찬양을 하는 도중 불현 듯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어요.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 그 안에서도 연무대라는 정말 작은 시골에서 살던 내가 어떻게 인도에 와 있는거지?”
“내가 살았던 그 작은 세계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같이 있을 수 있는거지?”
“다 다른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는거지?”
“어렸을 때 선후배들이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을 듣고 비웃었었고, 나는 낙심했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구나"
“그 누구도 연무대. 읍에 살던 내가 인도에 올 것을 예상히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끌고 계시는구나"
작은 촌에 살던 저를 부르셨고, 다양한 곳에서 사역하며 섬기도록 하셨어요.
그 것 처럼 오늘 이 시간 이후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을 어떻게 이끄실지 아무도 몰라요. 저 역시 또 제 삶을 어떻게 흔드실지 몰라요.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의 바람. 일하심 앞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내실 수 있고, 이루어내기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하셨어요.
(쉬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 그 거듭남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절대 아니에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얻게 된 것이 아니에요.
가만히 있던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바람을 보내셨고, 개입하셔서 얻게 된 것이에요.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앞으로 성취하게 될 위대한 승리와 삶의 발자취들을 우리는 기대해야 해요.
그 분이 일하기로 작정하셨어요.
그 분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책임지겠노라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나에게 구원 얻는 믿음이 밀려들어왔어요. 그리고 그 성령님의 일하심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될거에요.
온전해지다
온전해지다
Keep going. 그래서 우리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고 인내함으로 계속해서 이 길을 걸어가야 해요.
Together. 담대함을 버리지 않도록 서로를 독려하면서 인내하자 말하면서 함께 이 길을 걸어가야 해요.
2019년 런던 마라톤 경기 중 결승선 앞에서 마라톤 선수 한명이 쓰러졌어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있었어요.
결승선을 앞에 두고 쓰러진 이 선수는 결국 손과 발을 사용해서 이어나가기를 결정하고 결국 결승선을 통과했어요.
이 선수처럼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가져야 해요.
믿음으로 사는 삶을 절대 포기하지 말자!
끝까지 함께 달려나가자! 라고 서로에게 말하며 독려하며, 내 믿음을 고백해야 해요.
(쉬고)
우리가 계속해서 결승선을 달려가기 위해 그리고 함께 달리기 위해 붙들어야 하는 것이 세가지 있어요.
첫째,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무거운 것들이라는 것은 여러분의 삶과 굉장한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이 무거운 것들을 벗어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데 굉장히 큰 어려움을 겪게 되어요.
이 중 대표적인 것은 “나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나 스스로에게 굉장히 과한 짐을 부여하는 거에요.
남에게는 관대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거에요.
공부를 할 때도 스스로를 계속 몰아치면서 쉬지 못하게 만들어요.
내가 다른 여유를 가지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막 쪼아대면서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해요.
과거의 나와 자꾸 비교하면서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주는거에요.
나 스스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나"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하셔요.
여러분을 그 어떤 것보다 존귀하다 말씀하셨어요.
(쉬고)
우리가 계속해서 내 자신에게 엄격해지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이유는, 그 것이 가장 약한 부분, 넘어지기 가장 쉬운 죄이기 때문이에요.
죄는 우리를 중독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나를 탓하고 나에게서만 문제를 찾다보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공부를 끝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한 나를 자꾸 탓하게 되면,
우리는 나를 죽이는 죄에 중독 된 것과 마찬가지에요.
(쉬고)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해요.
그 중독에서 나오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는 더러운 죄의 감옥에서 나왔다는 것을 말하는거에요.
더러운 죄의 감옥에서 나오면서 우리는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거기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왔어요.
하지만 미련이 남았어요.
그 것이 내 자유를 막고, 내 삶에 여유를 빼앗고, 숨도 못쉬게 만든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없으면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같아서, 다시 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거에요.
자꾸 그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죄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품에 안고 놓지 못하고 있어요.
무거운 것 때문에 삶을 버거워하면서도 내려놓을 용기를 내지 못하는거에요.
왜요?
예수님보다 그것이 내 삶에 더 안정을 주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계속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거에요.
그 것은 우리가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혼자 힘으로 벗어낼 수 없어요.
예수님을 붙들고 옆에 있는 동역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면서, 그 짐을 서로 벗겨주어야 해요.
지난 목요일에 제가 보경이에게 한가지를 부탁했어요.
만약 내가 엄청 힘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면, 넥슬라이스를 날리고 뒷목을 잡아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저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보경이 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에게 저는 제가 힘이 들어가면 엉덩이를 걷어차달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여러분은 제가 신뢰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기 때문이에요.
혼자 할 수 없다면,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받아 무거운 짐을 벗어내야 해요.
둘째, 인내로 경주하라.
여러분 달리기 해봤죠?
달리기가 쉽던가요? 뛰기 시작하면 진짜 멈추고 싶을만큼 힘든 순간이 와요.
특히 충분히 숨을 고르지 않고 갑자기 뛰면 산소가 부족해서 핑 돌아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근육이 놀라서 오래 달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요.
갑자기 무리해서 뛰지 않고, 처음부터 예열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페이스를 찾고 뛰기 시작하면 오래 뛰는 것이 가능해요.
정해놓은 목표지까지 페이스만 유지할 수 있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달리다가 힘들면 잠시 걷기도 하고, 쉬어도 괜찮아요. 목표 지점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우리 신앙의 여정도 동일해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순간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어요. 여기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있어요.
멈춰서도 되고 쉬어도 되고,
달리기 힘들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숨을 고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세요.
중요한 것은 꺽이지 않는 마음이에요.
내가 이 신앙의 길을 완주해내겠다! 라고 하는, 내가 걸어가는 길이 정말 미련해 보이고 힘들어 보이는 길이라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하지 않는 것을 쫓아가는 삶과 같아 보인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길을 걸어가겠다!라는 꺾이지 않는 마음만 계속해서 가지면 돼요.
(쉬고)
여러분, 여러분은 왜 은혜가 나에게 필요하다라고 생각하세요?
왜 은혜 받기를 원하세요? 아니 은혜가 도대체 뭐길래 나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쉬고)
은혜는 우리가 노력하고 결심하면서 도착지를 향해 달려가도록 하는 동기와 능력을 부어주는 것과 같아요.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인내 할 수 없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어요.
은혜가 있어야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갈 수 있어요.
(쉬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8)
은혜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게 만들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향한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도와주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삶을 계획하셨고 길을 보여주셨어요.
우리는 그 분이 계획하신 길 외에 따라 갈 길이 없어요.
세상은 그 길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해, 눈 앞에 주목할 만한 달콤하거나 즐거운 일을 때로는 말도 안되는 어려움들을 통해 계속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할거에요.
그 때 이 것을 꼭 기억하세요.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우리를 위해 만들어두신 하나님의 길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길"이며 “계속 감당 할 수 있는 길"이에요.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가온누리 공동체에요.
함께 달리며 격려한다면 충분히 그 신앙의 길을 완주해 낼 수 있어요.
(쉬고)
믿음으로 사는 삶은 엘리트 선수만을 위한 경주가 아니에요.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갖고 인내하며 달려가는 사람의 삶이 진정한 믿음의 삶이에요.
그 믿음의 삶이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해요.
마지막,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는거에요. 우리 앞에는 그 신앙의 길을 완주해 낸, 성공적으로 끝마친 예수님이 서 있어요.
그 분은 우리를 위해 그 길을 걸어가셨어요.
우리에게 그 길을 걸어가는 노하우와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먼저 기꺼이 그 길을 걸어가셨어요.
그 분도 힘드셨어요. “이 잔을 내게 옮겨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지만 마음의 중심을 꺾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행해달라" 고백하셨어요.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셨고 성공적으로 완주해 내셨어요.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면,
나를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싶다면, 우리는 시선을 예수님에게 고정해야 해요.
제가 교육부서 사역을 할 때 꼭 지키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 것은 아이들의 눈높이 맞게 무릎을 굽히거나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것이에요. 애들을 만나면 거기가 흙바닥이던 뭐던 상관하지 않았어요.
때론 아이들보다 낮은 시선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장난을 쳤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 시선의 높이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우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될만큼 낮아지셨어요. 우리의 시선의 높이까지 기꺼이 즐겁게 내려오셨어요.
그리고 우리 눈을 보며 분명히 말씀하고 계셔요.
“물러서지 마라.”
“자책하지 마라. 충분히 잘하고 있다.”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나를 믿으며 사는 것 힘들지? 다 알고 있다"
“괜찮아. 정말 잘하고 있어.”
“이제 나에게 맡겨. 내가 부축해줄게. 조금만 더 가면 돼"
(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달려가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지거든, 그 분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힘차게 솟구칠 것입니다!”
(쉬고)
믿음의 삶을 사셨고, 그렇게 살도록 삶을 창조해 내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해요. 예수님이라서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너도 완주 할 수 있어!"를 알려주기 위해 오셨어
.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는 여러 어려움과 고난 그리고 힘든 모든 일들은 여러분이 잘못해서 생겨난 결과들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그만큼 예수님과 가까워졌기 때문에, 그 믿음의 경주를 너무나 잘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잡고 흔드는거에요.
우리가 잘 살아내고 있기 때문에, 괴롭히는거에요.
(쉬고)
예수를 바라보세요.
혼자 바라보는 것이 힘들면, 옆에 있는 동역자들의 손을 붙잡으세요. 손을 뻗어 함께 잡아주세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앞에 계신, 옆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세요.
나를 위한, 동역자를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세요.
(쉬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히 11:6)
“without faith it is impossilbe to please God” (Heb 11:6)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을 기쁘게 만들었다는 거에요. 삶의 자리에서 보인 믿음의 결단과 고백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미 기뻐하고 계신데요.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을 보고 행복해하고 계셔요.
그러니까 진짜 여러분은 잘하고 있어요.
(쉬고)
오늘 기도의 시간을 통해,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던 짐을 벗어버리고, 함께 벗겨내고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갖기를 결단하며 인내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함께 마음을 모아 예수를 바라보는
그래서 그 분의 따스한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는
정말로 사랑하는 모든 가온누리 청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1.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개인의 기도시간 오래 주기 / 20분 - 5/15)
우리 먼저 찬양의 가사를 보기를 원해요.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내 마음을 쏟아내는 것이에요.
조용히 나간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이에요.
다른 사람의 기도, 반응 이런것에 주목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거에요.
하나님께 집중하며,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놓고 기도하면 큰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세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세요.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갖겠노라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를 원한다고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 고백하세요.
2. 기대 (20분 - 5/15)
우리가 찬양으로 고백한 것처럼,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과 함께
형제 자매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동역자들을 통해 주님의 모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생각나는 사람 / 기도해주고픈 마음이 드는 형제자매들을 향해 다가가세요.
손을 붙잡고, 함께 끌어안으며 기도하세요.
하나님! 나에게 이러한 동역자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 동역자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함께 예수를 바라보기를 소망합니다! 라는 마음을 담아 함께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3. 선한 능력으로 (25분 - 7/18)
우리 이 시간엔 순끼리 모여볼까요? 순이 없는 경우 앉아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순으로 들어가주세요.
친하던 그렇지 않던 한 학기 같은 순으로 묶여 신앙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해주셨던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세요.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가며, 서로를 축복하며
우리가 고백한 이 찬양의 가사처럼 “선한 능력으로 나의 동역자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우리 함께 그 날을 고대하게 해주세요" 라며 기도해주세요.
나의 귀한 동역자 순원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4. 나의 하나님 (30분 - 5/10/10)
이 시간 우리 03-04또래들 가운데 모여볼까요?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다가가기 쉽지 않을 수 있고, 혹 나라는 존재가 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어 말을 걸지 못했을 때도 있었을거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한 공동체로 부르셨어요. 그 이야기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넘어서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로 붙여주셨음을 의미해요.
03-04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이들이 걸어가는 그 길 속에 버팀목과 힘이 되어주는 선배가 되게 해달라고
이 친구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며, 온전하게 하시는 이 예수님을 향해 걷게 해달라고
이번에는 작년과 올해 교회에 등록한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청년들이 가운데 모였으면 해요.
여러분 다른 공동체에 들어와 적응하는 것 쉽지 않아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고 이들을 품어주지 않는다면 이들은 외부인처럼 서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잘 적응할 수 있기를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함께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해달라고
5. 이 믿음 더욱 굳세라 + 기대 후렴 (15분 - 5/10)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기도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기도의 결단이 이 시간으로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서로를 향해 나누었던 축복과 사랑의 언어가 이 자리에서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과 나의 그리고 동역자를 잇는데 힘을 쏟는 내가 되게 해달라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굳세지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가온누리 청년들 머리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