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 예상을 벗어난 선택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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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views마태를 통해 1. 낮은 자를 품으면 넓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2.기독교는 잔치하면서 전하는 종교이다. 3. 잠재능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마태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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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27-39
눅 5:27-39
할렐루야! 수요예배에 오신 초양의 가족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마태 - 예상을 벗어난 선택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 중 2번째 그룹인 빌립, 바돌로메 도마, 마태 중 마태에 대해 보기로 합니다.
마태라는 이름이 마태복음에는 마태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여러 분분한 설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의 세리직을 가지기 위해 발음하기 쉬운 마태로 바꿨다라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마태와 레위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태는 레위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막3:16-19과 눅6:13-16에서 제자의 목록에, 그리고 행1:13의 사도의 목록에는 레위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라는 이름은 포함되어 있으므로 마태가 세리이야기 속 레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겁니다.
더구나 그는 레위지파입니다. 본래 레위 지파는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역사가 흐르면서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의 부모는 마태가 성전에서 봉사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 중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비난받는 직업으로서 파렴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마태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오히려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힌 세리가 되었습니다.
마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관에 앉아 있다는 것은 세리임을 말하는 겁니다. 세리는 당시에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세액을 정해주면 그것 이상을 걷어서 세액 외의 나머지는 자기 것이 되었던 겁니다. 예를 들어 로마에서 세금으로 1만원을 부과했는데 세리가 거두어 들일 때는 2만원, 3만원을 거두고 그중 1만원만 로마에 보내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지는 것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로마가 있으니 사람들은 뒤에서는 욕을 하여도 그 앞에서는 굽신거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세리는 아무리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매국노,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와 가까이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러면서 세리는 사람들과 단절된 채 더욱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던 겁니다.
이렇게 많은 부를 축적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을지라도 그들의 마음 한 구석은 뻥 뚫려 있을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사람들도 개무시하니 어찌 그 마음이 평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영적인 부분에서도 고통이 있을 수 밖에는 없는 겁니다. 자기의 민족의 고혈을 빠는 세리가 어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영적인 공허함은 그들을 더욱 낙심시켰을 겁니다.
세리 삭개오를 보세요. 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겠습니까? 많이는 가졌지만 그것으로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에게도 삭개오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아무리 경제적인 풍부함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에게 평안과 만족을 주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리가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세리는 고학력자였습니다. 로마가 아무나 세리를 시켰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적어도 세리는 3개국는 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아람어,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세리는 고학력자예요.
또한 세리는 로마에 충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로마에 충성하는 사람을 뽑았겠지요.
그리고 이들은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자, 매국노라고 욕을 먹었습니다. 더구나 가버나움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으로 이곳에서는 물건 값의 10-12%의 세금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어부들에게서도 과중한 세금을 받았습니다.
그랬기에 세리는 언제나 욕을 먹는 직업이었습니다. 파렴치한 들이었고, 때문에 세리들은 창기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겁니다.
바로 이런 취급을 받던 마태, 이런 고민이 있던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눅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는 첫번째 순간에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즉시로 순종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방금전에 말씀드린대로 마태는 백성들로 부터 파렴치한이란 소리를 듣고, 창기와 같은 취급을 받는 등 육적으로 영적이고 육신적 고통에 있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니 즉시로 따르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마태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그 즉시로 예수를 믿는 겁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직없이 있지요. 그런데 그 가운데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서는 안되는 직업이 있습니다. 마태의 직업인 세리도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 있어요. 이단이 운영하는 것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이런 것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학도 이단이 운영하는 대학이 있어요.
또한 예수 믿는 자가 술집을 운영하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채놀이도 당연히 마찬가지이고요.
아마 마태도 이런 것에 대하여 고민하였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하나님의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인데 내가 이래도 되는가?’
바로 그때 예수님이 부르셨고 즉시로 따랐던 겁니다. 위대한 결단인 거지요.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과정을 보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눅5:27-28 “27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는 예수를 위하여 그토록 좋아 하였던 세리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하였습니다.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나의 인생입니다.
선비와 리더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선비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쓰지만 리더는 욕먹더라도 자신이 이루려는 뜻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선비가 아닌 리더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쓰지 않고 마태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마태를 제자로 삼으신 이유, 즉 예수님이 어떻게 마태를 통해 엄청난 뜻을 이루셨는지 보기로 하겠습니다.
Ⅰ. 낮은 자를 품으면 넓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리를 가장 나쁜 사람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재판정에서 증언할 자격이 없었으며 회당에 들어갈 자격도 없었으며 헌금도 바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문둥병으로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기존 제자들은 비록 어부와 같이 미천한 자들 많았지만 나름대로 애국심이 있었으며 진실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들어가는 순간 제자들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과 더불어 긴장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깨어지고 그동안의 좁았던 사고가 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이 마태를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30절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는 말씀을 증명하였습니다.
36절에 나오는 새부대는 가치없고 맛없는 새포도주를 담는 부대입니다. 새부대는 저사람은 안돼 라고 평가되는 사람까지도 담는 부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유대는 과거 익숙한 사람만 품었습니다. 그러나 새부대는 낮아져서 낮은 사람까지 품을 수 있는 부대입니다.
우리는 낮아지고 다른 사람을 섬길 때 넓어집니다. 익숙하지 않는 것을 틀렸다고 해서는 안되며 그 익숙하지 않은 것을 품어야 합니다. 낮아지고 깨어지면 훨씬 많은 사람 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시험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높은 곳은 축복이 아니라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빨리 내려와야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마태와 같은 사람을 품으면 모든 사람 품을 수 있습니다.
Ⅱ.기독교는 잔치하면서 전하는 종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는 축제하면서 전하는 종교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따르자마자 큰 잔치를 벌입니다.
눅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C.S 루이스는 <기독교인의 삶은 잔치로부터 시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그렇습니다. 죄를 버린 것이 기뻐서, 예수를 만난 것이 기뻐서 그토록 좋았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잔치할 수 있어야 참 기독교인입니다.
사람들도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당신이 하나님의 딸이 된 것을 축하하오'라는 축하를 받는 잔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잔치집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 이념을 만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나는 내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하였다. 공산주의라는 사상이 이제부터 나의 애인, 나의 목숨, 나의 전부, 나의 생명이 되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가지려고 출발하면서 잔치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요?
우리의 기독교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엄숙주의에 깃들어 있습니다. 경건은 Fear라고 하는 바, 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두려워하는 인간을 품어 주셨으며 그 결과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29절에서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에 대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비난하고 못마땅하게 보았습니다. 한쪽은 축제와 잔치 분위기인 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비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축제를 벌이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마태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다시 눅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어쩌면 이것이 최초의 전도집회이지 않습니까? 마태가 예수를 따르면서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막2:15에는 세리와 많은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동료들을 데리고 왔던거지요.
어떤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지 여부는 그가 전도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드레를 만나주니 그는 베드로에게 가서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주니 그는 나다나엘에게 가서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만나주니 그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의 감격이 크니 사람을 불러 잔치를 하게 됩니다.
버지니아 주에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3분의 2가 식당입니다. 당시 지도자들이 그 식당에서 식사(잔치/축제의 의미)하며 독립을 논하고 국가를 위한 토론을 벌인 결과 미국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안드레의 전도방법은 한사람이 한사람 전하는 친구 전도법입니다. 한편 마태의 전도법은 밥 같이 먹는 축제의 전도입니다. 마태와 같은 모습을 통해 기독교는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1차 대각성 운동을 벌인 죠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해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19세기 중반 챨스 페니는 방법이 중요하다며 모든 예배와 설교에 있어 사전에 치밀한 각본에 의해 했습니다. 챨스 페니의 방법에 대해 많은 비판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죠나단 에드워드나 챨스 페니나 다 사용하셨습니다.
방법론이 문제가 아니라 전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적이 위대하면 수고의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마태에게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니 주변의 평가는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축제의 종교입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기뻐하는 축제를 통해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잠재능력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마태를 사용합니다.
마태는 분석능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언어에 있어 정통하였습니다. 그 결과 공관복음 중 가장 주석이 많은 책인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특히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정리해 두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의 비유를 7가지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도 14대,14대,14대로 잘 분석해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세리로서의 잠재능력을 멋지게 사용하였습니다. 실력과 사명이 만나니 마태복음이 나왔습니다. 마태라는 개성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은 풍성하게 채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잠재능력이 사명과 만나야 합니다. 많은 능력을 가지고도 헛된 인생 사는 사람이 있음. 사명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 사명이 너무 크면 실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때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사명을 주셨음을 생각하며 이제는 실력을 키워야 할 때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마태가 그 후 무슨 일을 하였는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무슨 말을 하였는지도 한 구절도 없습니다. 마태의 업적은 단 한 가지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중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장 놀랍게 꿰고 있는 책이 바로 마태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약 2,000년의 역사를 꿰뚫고 있습니다. 그가 공부한 모든 것이 마태복음을 쓰기 위하여 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겁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마태복음 한 권을 남기고 그는 에디오피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이 그가 바로 마태입니다.
우리도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럼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실력 키우는 방법 보기로 합니다.
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먼저 이룬 자를 만나 대화하라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을 먼저 이룬 자를 만나 대화하면 내가 그 일 이루기 위해 치루어야 할 시행착오를 훨씬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② 자기 전공분야를 위한 도구를 위해 투자하라
바이올리니스트가 최고 성능의 바이올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수천만원의 바이올린도 기꺼이 구입하듯이 우리도 우리의 전공분야를 위한 도구의 투자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 도구란 특정의 구체적 능력일 수도 있고 또한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도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전형적인 제자인 마태를 통해 낮은 자를 품으면 넓어진다는 사실과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면서 실력를 길러야 함을 전하였습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실력 키우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