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

주일1-2부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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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에베소서 5:18(신약 315쪽)
설교제목 : 성령충만
Ephesians 5:18 NKRV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반갑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충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셨길 바랍니다. 우리 서로를 향하여, 미소띤 얼굴로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서로 인사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익숙하기 때문에 놓치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제 사촌동생이 결혼하기 전에 그 당시 교제하던 지금은 아내가 된 제수씨를 소개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껏 한번도 교회를 나가 본적이 없어서, 제가 목사라는 사실이 매우 신기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무심결에 저를 소개하며 교회에서 사역한다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분에게는 그 ‘사역’이라는 단어가 매우 특이하게 들렸습니다. 아무래도 보통 직장생활에서 ‘사역한다’는 말을 사용하진 않을테니 말입니다. 이처럼 익숙한 것에서 한 걸음 떨어지면 새롭게 보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 하나가 (좌측의 십자가를 가리키고)저기 보이는 십자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성도 분들은 어떻습니까? 이 십자가 이렇게 놓여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기 꽃이 놓여 있는 것처럼, 십자가도 하나의 중요한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기에 큰 거리낌없이 잘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미적인 취향의 차이는 발생할 수 있을 겁니다. 더 예쁘다거나 덜 예쁘다거하는 생각말입니다. 그래도 십자가 자체가 거북하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실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십자가를 우리나라 사극에 나오는 망나니의 칼이나, 프랑스의 단두대로 바꿔놓으면 어떻겠습니까? 매우 이상하고 한편으로 거북함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십자가가 본래는 그와 같이 거북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대에 이 십자가는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사형집행도구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는 십자가가 새롭게 보여지십니까? 만약 예수님 당시의 로마인들이 오늘날 교회의 십자가를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쩌면 그들은 이것을 종교적 상징물로 한편 신성시되고 거룩한 상징으로 십자가를 사용하는 우리를 참으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십자가에 달린 신을 믿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낙서가 역사적 기록물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낯설게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이 십자가는 본래 추악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바꿔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이렇게 일하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오늘 성령에 관한 연속 설교 세 번째 시간으로 ‘성령충만’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령 충만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성령충만을 술취함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서로 대조적인 것이지만, 비교될 수 있는 유사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술취함은 알콜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장악을 당한 상태입니다. 반대로 성령충만은 성령 하나님에게 전적인 인도함을 받는 상태입니다.
오늘 성경구절에서 문법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고 현재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은 계속적인 상태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성령 충만함을 매순간 이뤄가야 함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영과 육의 싸움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영혼과 육체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아니냐하는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관심에 마음을 빼앗길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삶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고 살아갈 때 그것은 영적인 삶이고 그것이 곧 성령충만한 상태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또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공부하면서 내내 그러했지만 참 어렵다고 느낍니다. 성령 하나님은 결코 손에 잡히지 않고 정말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분이어서 쉽게 가닿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도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자 이 자리에 서면서 익숙했던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 삶 가운데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역사하셨나하고 말입니다. 제가 특별한 환상이나 기이한 체험을 하지는 않았지만, 제 삶도 앞서 십자가와 같이 낯설게 보기 시작하니 그 안에서 분명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셨음을 발견합니다. 참 보잘 것 없는 나를 하나님이 귀히 여겨주신 순간들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이 곧 성령의 도우심이라 여겨지고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흔적임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충만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소 사적일 수 있지만 제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물론 그것은 제가 성령충만한 사람이라서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제 삶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성령충만함에 관해 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해서 입니다. 비록 제 삶이 누군가의 눈에는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추악한 십자가를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상징으로 바꾸셨듯이 제 삶 가운데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저는 미약하나마 제 삶 속에서 일하셨던 하나님을 통해 성령충만을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목사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목사는 좀 외향적인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성향의 사람말입니다. 또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하니깐 내향적인 성향은 어려움이 많이 따를 것이라 생각도 됩니다. 근래 유행했던 NBTI 곧 성경유형검사에서 ‘E’성향을 가진 사람말입니다. 참고로 저는 ‘I’성향이고 이는 내향적인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실 저는 설교의 처음에 인사를 나누는 것도 어색해서 고민하고 결단해서 이를 행하기로 했던 사람입니다. 제 기억엔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초등학교 때 아니 국민학교 때인가? 학교에서 반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중에는 응원구호처럼 노래하고 율동하는 것이 있었는데요. 정확히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을 발표하면서 꽤나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것이 아직도 어렵풋이 기억나는 것으로봐서는 약간의 트라우마였는지도 모릅니다.
또 제가 대구에서 교육전도사를 할 때였는데요. 그때 어린이부서를 맡았었고, 한번은 대구에 있는 우방타워랜드라는 놀이동산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놀이기구 타는 것을 즐기지 못하는데, 어린이들 앞이라 최대한 그것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어린이들과 함께 몇몇의 놀이기구를 탔습니다. 그러나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기절할뻔 했고, 차마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켜야 했습니다. 또 귀신의 집에 갔다가는 무서워 혼났는데, 어린이들 앞이라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내적으로는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실 큰소리를 잘 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거나 찬양을 할 때는 마이크의 도움을 받아서 소리를 내어보지만요. 실은 멀리서 반갑게 인사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아는 사람이 가까이 오기까지 미소로 답하고, 가까이 왔을 때 용기를 내서 말을 건냅니다. ‘안녕, 또는 안녕하세요.’ 낯선 식당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더 두드러지는데, 종업원에게 도움을 청할 때, 벨이 없으면 한참 종업원을 살피거나 종업원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점에서 제가 여기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 것도 제게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의 이러한 내향적인 성향으로 저는 목사로 또는 목회를 하는 것에 한편으로 적합하지 않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한 그것을 어떻게 바꿔볼 수 없을까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족한 저를 제가 소화하고 감당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또 성향을 완전히 바꾸기보다 그러한 성향을 통해서 일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제가 지금 목사로써 우리 성도 분들과 만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비록 제가 어떤 분들에게는 좀 탐탁치 않고 어떤 기대에 못미치는 목사일지는 몰라도 또 어떤 분들에게는 이와 같은 목사도 있다는 것에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또 저는 컴플렉스가 참 많은 사람입니다. 때때로 그것이 제 삶을 흐트려놓고 저의 자존감을 떨어트리는 일을 마주하면서, 나는 왜 이럴까를 자주 고민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외모에 관한 컴플렉스가 참으로 컸던 사람입니다. 저의 얼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저의 얼굴과 관련하여 많은 별명을 얻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네모, 사각형, 도시락, 스폰지밥 등등의 것이 그렇습니다. 제 또래들에게서 또 교회에서 학교에서 그와 같은 별명으로 불리거나 그렇게 보이는 것이 참으로 싫었습니다.
언젠가는 이것이 좀 문제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군대를 갔다와서 본격적으로 교회에서 사역을 했는데요. 그때는 20대 중반쯤이었으니깐, 주로 어린이부서를 담당으로 맡았습니다. 제가 예배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몇 주 경험하셨을 테니, 어린이부서를 맡는다는 잘 상상이 안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제가 담당했던 어린이들이 고생이 많았습니다.
한편 어린이들은 호기심이 많기도 하고 순수하게 자기 생각을 표현하곤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 같으면, 저의 외향에 관하여 인상이 좋다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말할지 몰라도 어린이들은 보여지는 그대로 말합니다. 그래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저는 어린이들로부터 또 무수한 네모난 것에 관계된 많은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시에 군대를 갔다가 온 후였고 나름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도요. 여전히 어린이들의 그 말들이 제게 참 불편하게 다가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외모에 관한 컴플렉스가 변치 않고 제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내가 그 문제를 크게 여기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치면서 관심이 가고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내 마음을 전했다가 받아들여지 않기를 반복하면서, 그 원인의 대부분을 외모에 따른 것으로 생각해버리곤 했습니다. 물론 전혀 영향이 없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잘 생긴 사람들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좀 더 쉬워보이긴 하니까요.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꼭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음을 압니다. 사실은 관계에 서툴고 여러 컴플렉스에 따른 낮은 자존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되는데요. 그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이 외모 때문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됐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때로 저에게 관심을 주었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매력 또는 내적인 세계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지나오면서 저는 조금 더 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변모시킬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가꿀 수 있는 것에 힘을 쏟고 성숙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자주 저의 실패한 연애담을 얘기하곤 해서 아마 아실테지만, 그럼에도 연애와 결혼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잘 풀리지 않는 것으로 제 안에 남았고, 도무지 가능성의 기미가 비춰지지 않아서 자주 이러한 문제가 제 삶에서 크게 다가오곤 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를 새롭게 변화시켜야지만 하나 이상의 관계를 이룰 수 있으려나하는 생각들이 컸고 그것이 늘 삶에서 풀어지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마다 저를 아껴주시는 분들은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고, 분명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 있다고 위로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저를 분명 아껴주시는 분들임을 알기에 그 말씀을 좋게 받기는 하였는데요. 사실 여전히 그 이야기들이 제 안에서는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의 판단으로는 제 현실이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저는 결혼시장에서 인기없는 직업군에 속한 목사이고 올해 마흔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연애와는 더욱더 거리가 멀어진 상태인 것 같고, 집에 특별히 재산도 없고, 컴플렉스를 가질 정도로 외적인 요소와 더불어 그에 따른 내적인 자존감이 부족하고 하는 등등이 미래를 더욱 불안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요사이 저는 뜻밖의 계기로 특별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제가 단점으로 치부해서 고치거나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지적받았던 것들이 도리어 장점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람입니다. 또한 제가 고민하고 계획하는 것들을 맘편하게 공유할 수 있고 같은 길을 걷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현재 저는 그 사람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씌어지 콩깍지가 아직 서로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덕분에도 좋은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편 무슨 연애 시작했다는 얘기를 이렇게 거창하게 하느냐고 말씀하실 분들도 있겠지만요. 저에게는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이 그냥 기분 좋음을 넘어서 어떻게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저로써는 잘 이해되거나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제가 연애와 결혼과 관련하여 아주 다양한 그룹에 상담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담당하는 청년부에게까지도 말입니다. 그 분들은 애정어린 마음으로 저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문제라고 지적받았던 것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것이 최근 이룬 만남 가운데 아무런 문제없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약간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간이 맞이하곤 합니다. 또 이전에 저를 위로해 주셨던 분들이 말씀하신 때가 이때인가 또 예비한 사람이 그인가를 생각합니다. 더불어서 하나님은 내 한숨을 외면치 않고 계셨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어딘가에서 혼자 걷지 않고 같이 걷고 있다면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론 아직은 시작 단계이니 또 혼자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생각되고 아주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괜찮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충분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임을 말입니다.
설교시간에 다소 아니 많이 아주 사적인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앞서도 밝혔지만, 저의 미약한 경험을 통해서 제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다소 부정적인 다가온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제 삶에서 너무 당연하고 익숙하게 여겨왔던 것들에서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니까, 이전과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삶에 분명 하나님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이 다소 저의 수준의 모자람으로 유치하게 전달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저를 들어서 오늘 이곳에서 사용하시는 분이 하나님심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게 일어난 삶의 변화들이 제게는 도무지 하나님 없이는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목사가 되기에 적합한 종류의 사람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를 목사로 이렇게 세워주셨습니다. 또 저는 컴플렉스가 심한 사람이라 연애와 결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직 결혼은 과제로 남아 있지만, 이러한 저에게 하나님은 뜻밖의 만남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저의 노력과 의지로 이뤄진 것이라면, 저는 오늘 이와 같은 얘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제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제게서 벌어졌고 그 일들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놓고 저는 성령충만한 삶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삶이 내 노력과 의지로 이룩되지 않았음을 경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힘이 온전히 빠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상하게도 성숙해 질수록 더 겸손히 주님 앞에서 서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더욱더 의지하게 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저는 성령충만한 삶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확신과 나의 경험과 나의 능력으로 살아온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는 삶 그 분의 인도하심 따르는 삶 말입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데, 저는 우리 성도분들께서 이러한 삶을 이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그분께서 나보다 나를 더 잘아셔서 내게 온전한 길을 인도하여 주시길 것입니다. 그것에 이끌림바 되어 살아가는 우리 성도 분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잠깐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역사하십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 다름 아님 성령충만입니다. 그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삶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이를 놓고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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